계급문제

벌써 한 달 정도는 지난 일.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발족식을 하고 난 며칠 후, 셀 황과 얘기를 나눌 자리를 가졌다. 그 사람 역시 트랜스젠더/성전환자 연구자이고 한국의 상황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그날의 자리는 인터뷰를 겸하면서 그냥 얘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셀 황은 그 자리에 함께한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구성원, 개개인의 계급에 대해 물었는데, 영어를 못하는 루인으로선 참 답답했다. 계급이라는 것이 자신의 수입 정도를 의미하는 것인지, 수입 정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연봉 2,000만 원인 사람이 자신은 하층이고 가난하다고 말할 수 있고 연봉 1,000만 원도 안 되는 사람이 자신은 가난하지 않고 중산층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급 혹은 계층이란 것은, 통계적인 수치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자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날 이런 얘기들을 했지만 통역하시는 분이 막 화를 내시면서(물론 이때 화를 낸다는 건, 웃을 수 있는 분위기에서 통역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화를 낸다는 의미) 간단하게 통역했었다, 하층과 중층의 중간이라고.

며칠 전, 玄牝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활이 비루하고 지겹다고 느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나 하는 우울이 몰려왔다. 궁상스러움. 물론 옥탑방에서 사는 것이 불편하다거나 싫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음식을 먹을 때부터 책을 살 때까지 통장잔고를 끊임없이 상기해야 하고, 그렇다고 앞으로는 좀 더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조차 하기 힘든 상황.

예전에 ㅆㅃ과 얘기를 나누다가 루인은 로또가 30억이 당첨되어도 그냥 이자나 받으면서 생활할 인간이라고 얘기했다. 부동산이나 다른 무언가에 투자하고 이익을 계산하는 것이 귀찮아서였다. 주식을 해서 두 배의 이익을 낼 수도 있겠지만 그럴 시간에 책이랑 음악이랑 영화랑 놀겠다는 것이 루인의 솔직한 몸이다. 하지만 이런 루인의 상상력은 루인의 계급적인 경험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소박해도 행복하잖아”라는 말을 주입하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근데 정말 행복한가요?)

얼마 전엔 라디오에서 “월 100만 원 미만의 극빈층”이라는 얘길 들었다. 루인은 루인이 극빈층이라기보다는 중하층 정도는 된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아뿔싸, 아니었다. 사실 루인의 한 달 생활비는 최저임금 수준인데 그럼에도 루인은 루인이 ‘부자’라고 믿고 있다. 이럴 때 부자라는 개념은 고정적이지 않는데, 이건희가 말하는 부자와 루인이 말하는 부자의 의미가 달라지고 그것의 의미가 경합한다. 사실 루인을 극빈층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건 루인이 대학원생이라는 신분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대학생, 대학원생은, 일반화하기엔 문제가 너무 많지만 그럼에도 어떤 지점에선 부르주아이기 때문이다. 이건 한국사회가 대학입학에 강박적인 측면으로 인해 가능한 명명.

하지만 루인의 대학원생이란 신분은 졸업 후의 생계를 보장할까? 루인이 경영학과나 경제학과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여성학과를 졸업한다는 것이 취직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루인이 다니는 학교는, 여성학과가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많고 생긴지도 이제 2년째다. (물론 바로 이런 이유로 현재 다니는 학교를 좋아한다. 유명했다면 오히려 불편했을 것이다.) 더더구나 전공은 트랜스젠더/성전환자고 그래서 취직은 커녕 먹고살 길은 더욱더 막연하다. (졸업하면 빚잔치도 기다리고 있다.)

물론 그날 玄牝으로 돌아가며 이런 몸앓이까지 한 건 아니지만, 막연한 우울함에 빠지려고 했다. …지겹다는 느낌. 그래, 어쩌면 이런 느낌인지도 모른다. 지겹다는 느낌. 생활방식이 지겨운 것이 아니라 생활을 굴러가게 하는 어떤 한 부분이 지겨운 것. 이런 지루함을 견디는 것이 삶인지도 모르지만, 지겹다.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 글쓰기

세르쥬 노박의 겨울여행, 2006.12.01. 20:35. 아트레온 9관 11층 F-5

영화를 읽은 날짜는 12월 1일인데 이 글을 끄적이려고 애쓰는 날짜는 12월 4일이니, 정말 이 영화를 읽고 난 느낌을 쓰기가 힘들었다. 정리가 안 되었다고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달까.

반전 영화이겠거니 했는데, 반전 영화는 맞다. 사실, 영화 초반에 내용을 예상했고 그렇게 가겠거니 했는데, 정말 스토리가 그런 식으로 진행해서, 그렇구나, 하다가 결국 또 한 번의 반전에 놀랐다. 물론 [아이덴티티] 만큼의 반전은 아니고 그렇게 충격적일 법한 반전은 아니지만 뭔가 몸 아픈 반전으로 다가왔다.

작가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글쓰기란 무엇인가, 글쓰기와 글 그리고 작가의 관계가 주요 주제이기도 하다. 단순히 반전 영화가 아니라 작가의 고민과 주제, 소재와의 윤리를 말하는데 그 윤리를 스릴러와 반전이란 장르로 풀고 있는 셈이다.

루인의 경우, 글을 쓸 때마다 누군가의 사례를 익명으로라도 인용하려고 하며 갈등을 느낀다. 이렇게 함부로 그 사람의 생애를 끌어다 써도 될까, 하는 갈등. 물론 다른 누군가의 글을 통해 접한 경험을 인용할 땐 이런 갈등이 좀 덜하지만 루인이 아는 사람의 경험을 인용할 땐, 그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래서 가장 많이 하는 방법이 루인의 경험을 파먹는 것. 그래서 루인의 글쓰기는 에세이와 논문의 경계가 모호한 곳에 위치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필명(세르쥬 노박이 필명이다)을 통해 20년 가까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고, 그럼에도 상당히 유명한 “세계적인” 작가이다. 그리고 그의 최대 성공작이자 가장 잘 쓴 작품으로 알려진 첫 번째 작품(작품 제목이 “겨울여행”)의 소재가 작가의 경험인지 친구의 경험인지와 같은 문제에서부터, 나중엔 친구의 글을 표절한 것인지 자신의 글인지와 같은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이 영화는 그 과정을 다루는 건 아니고 글을 쓴 이후 그 과정이 드러나면서 그 과정을 경험하며 드러나는 갈등을 다루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아무튼, 그런대로 재미있는 작품이긴 하다. 지능적인 팜므파탈이 나오는 영화라고 하는데, 그렇다기보다는 복수와 사랑 사이의 미묘한 감정변화를 겪고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어둠의 경로로 구할 수 있으면 다시 읽고 싶다.

12월 1일은 에이즈의 날. 그런데

구글에 검색하러 갔다가 멋진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검색사이트 대문에 빨간 리본이라니. 그래서 혹시나 해서 엠파스에 가봤다. 평소 엠파스가 어떤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검색스킨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빨간 리본은 에이즈의 날 기념. 루인은 하루 늦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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