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사기: 젠더로의 스트레스. 이렇게 예쁠 수도 있구나

지금까지의 관습에서 10월 달이면 조금은 쌀쌀한 날이고 그래서 샌들을 신고 다니기보다는 운동화가 무난한 시기다. 하지만, 봄, 가을이 없어지고 있다는 요즘, 아직은 샌들이 편하고 그래서 어제까지도 샌들을 신고 다녔다. 그런데 오늘 아침, 샌들을 신는데, 아무리 봐도 옷과 신발이 불화를 일으키는 느낌. 결국 운동화를 신었다. 그러며 이제는 미뤄둔, 신발을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새 운동화가 하나 필요했다. 일 년에 3켤레(겨울, 봄-가을, 여름)면 신발이 충분하지만, 한 번 사면 몇 년을 신지만, 겨울 신발은 좋아하고 여름 샌들은 그냥 그런 정도인데 반해 봄-가을용 운동화는 별로 안 예뻐서 그다지 신고 싶지 않은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새로 운동화를 하나 사야지, 하고 벼루고 있었지만, 사러갈 시간도 없고 그 과정에서 겪을 스트레스도 짜증나고 해서 미루고 있었다.

아침에는 괜찮았지만 오후에는 더운 날 겨울 운동화를 신고(그 만큼 싫어한다는 얘기), 수업 들으러 갔다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인근 가게를 둘러봤다. 하지만 스트레스는 예상 이상이었다.

루인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매장에 갔을 때 가장 짜증나는 건 들어가자마자 옆에 붙어선 선택하는데 간섭하는 것이다. 이게 잘 나간다, 이게 예쁘다, 이게 요즘 인기 상품이다, 어쩌고저쩌고. 단순히 옆에 서 있는 것도 싫지만 이런 식으로 개입하면 짜증이 확, 밀려오기 때문. 문제는 그렇게 추천한 상품이 몸에 들면 괜찮은데 그것도 아니기 때문. 대체로 루인이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이거나 별로 안 좋아하는 스타일인 경우가 많다. (맞다. 루인의 ‘스타일’은 유행과는 가장 무관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루인만의 어떤 스타일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것에 무관심하게 루인이 좋아하는 것만 고집한다는, 패션이 꽝이라는 얘기. 크크.) 딱히 선호하는 스타일이나 제품을 예상하고 사러 간다기 보다는 그냥 둘러보다가 루인을 부르는 이와 만나길 좋아한다.

하지만 정말 짜증나고 쇼핑을 두렵게 하는 건, 이 신발은 “남성용”이고 이 신발은 “여성용”이라는 식으로 규정하며 제품을 구경하고 선택할 가능성 자체를 차단한다는 점. 루인이 몸에 들어서 구경하거나 살펴보고 있으면 혹은 살펴볼라치면 곧 바로 그건 루인에게 ‘부적절’하다고 ‘경고’하는 언설들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살펴보면 분위기는 묘하게 흐르고 더 이상 그곳에 있고 싶지 않은 식으로 변한다. 루인은 이런 경험이 너무 많아서 누구나 겪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군. 예전에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과 샌들을 사러 갔는데, 이후 해준 말이, 제품 선정에서의 “남성/여성” 구분의 명확함을 그때야 느꼈다는 것. 매장 점원(혹은 주인)은 루인의 취향이나 선택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재차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매장에 직접 가서 무언가를 산다는 건, 이렇게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의심의 시간이기 때문에, 인터넷 주문을 더욱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도 이런 경험을 반복했다. 딱히 예쁜 건 없었지만 그래도 그냥 무난한 신발을 구경할라치면, ‘댁이?’하는 식의 말투 혹은 분위기로 대해서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며 포기할까 하고 다른 골목으로 들어갔을 때,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곳에서, 문득, 손짓하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창 너머 신발을 구경하다가, 아아….

그랬다. 신발이 이렇게 예쁠 수도 있구나를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무언가 장식이 있다거나 딱히 어떤 식의 디자인이 많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깔끔한 디자인에 전체적으로 검은색이고 붉은 색이 조금 들어갔는데, 이렇게 말로만 적으면 결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매력이 있었다. 지체 없이 루인의 신발 사이즈를 요구했고 주인은 창고로 신발을 찾으러 갔다. 설레며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은 빈손으로 돌아왔고, 말하길, 사이즈가 250까지만 나오는 신발이라며, 그제야 조근 조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발 사이즈의 한계를 보면 알겠지만 애시 당초 ‘제한’적으로 나온 신발이다. 주인은, 그 신발은 루인이 선택할 수 없는 혹은 무슨 생각으로 이 신발을 고르느냐는 투로 말한 것이 아니라 사이즈가 그렇게 나왔다고 말했다.

그 예쁜 신발을 살 수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그 가게를 그냥 나오기도 아쉬웠다. 그 가게 주인의 태도가 그랬다. 그 주변의 가게 어디를 가도 접한 적이 없는 그런 태도. 그래서 그 가게에 진열한 다른 신발을 고르는데, 한참을 봐도 안 보이더니, 포기할까 하는 순간,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흑흑흑. 물론 처음 손짓한 신발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너무 몸에 들었다.

다행히 사이즈도 있었다. 그것도 마지막 제품! (사실 이런 경우가 많은데 앨범을 살 때면, 종종, 그것이 마지막 남은 앨범인 경우가 빈번하다. 후후.) 헤헤헤. 괜히 기분이 좋아서 설레는 기분으로 학교로 돌아왔다. 몇 년 만에 산 운동화가 몸에 든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운동화가 이렇게 예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즐겁다. 사실은 무지무지 설레는 몸이다. 신발이 예뻐서 반할 수도 있다니! =_=

[#M_ #10.14. 추가 | 헤헤헤 |

루인은 디카가 없는 관계로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찾은 사진.
_M#]

목소리를 들으며 경험을 다시 경험하고 언어를 품는다

추석이 끝나고 玄牝으로 돌아와서 글을 쓰며, 그래도 이제는 매일 같이 글을 쓸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달리 여유가 생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Run To 루인]에 새로운 글을 쓸 여유가 없으랴 했다.

사무실에 같이 있는 사람은 알지만 월요일과 화요일, 사무실에 있는 내내 컴퓨터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이니 [Run To 루인]과 만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글을 쓸 수 없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글을 쓸 수 없었던 건, 순전히 미뤘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그 과정이 지난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책을 한 권 낼지도 모른다. 물론 루인 혼자서 쓰는 책은 아니고 참여하며 활동 중인 모임에서 내는 책이다. 그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 일을 지난 이틀 동안 했다.

사실 그 일들은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130여 분 길이의 녹음 파일을 푸는 것은, 따지고 보면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 못 할 일이 아니다. (물론 어제, 화요일은 수업과 회의가 있어서 오후에만 조금 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시간은 지난했고 한 20분 했겠지 하고 확인하면 고작 3분이 흘러있었다. 녹취를 푸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듣는 과정이 어려운 일이다.

이런 과정은 비단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지난 8월 말에도 경험한 일이다. 이런 시간을 이틀 간 보낸 셈이다. 그러며 남는 건 우울과 상처뿐이다.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상처 받는 일이다. 특히나 자신과 비슷한 맥락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자신의 과거를 다시 경험하는 일이고, 그 목소리가 전해주는 경험을 동시에 경험하는 일이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는 것 같은 경험으로 받은 상처가 언어를 모색하는 힘이다. 과거를 다시 경험하면서 앎이라는 과정에 들어가고 언어를 모색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녹취를 풀 때마다, 이런 느낌을 가진다.

이른바 현장과 이론, 운동과 학문이라는 식의 이분법, 그것을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다. “현장의 경험들”이 “이론”이고 “이론”이 “현장의 언어”이다. 경험을 언어화하는 작업, 그러니까 문장으로 풀어낼 수 있는 작업이 곧 이론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느낀다. 그러니 이론은 그렇게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그저, 절박하게 언어를 찾는 몸앓이일 뿐.

루인의 경험상으론 대학이라는 학제에서 멀리 있을수록 더 많은 언어를 가지고 있더라. 이 말은 이론이라는 것이 단지 대학물을 먹어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고 이른바 세련되었다고 말하는 표현은 사실 권력과 권위를 획득하기 위한 치장인 경우가 많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그저 루인은 책과 노는 것이 더 좋아서 대학원에 왔을 뿐, 대학원이 유일하게 언어를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어서가 아니다.

혼자서 우울해 하며 웅크리고 있다. 그냥 그럴 뿐이다. 이런 과정들이 행복이란 걸 안다. 만신창이로 만드는 말들이 하나하나 소중한 경험이고 불안에 떠는 순간이 언어를 품는 과정이다. (문득 진주를 품는 조개가 떠오른다.)

우울해서 행복하다.

목소리 듣기

인터뷰한 내용을 풀 때면, 더 쉽게 우울증에 빠진다. 그 목소리와 루인의 목소리가 겹쳐지기도 하고, 때로 어떤 목소리는 앞으로 루인이 겪을 문제이기도 하고, 어떤 목소리는 루인의 경험이기도 하고. 어떤 목소리는 해석과정에서 경합하기도 하고.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이렇게 우울증에 빠지면서 상처 받아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