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하해요

교보문고에 들렸어요. 수업 교재로 읽을 책들이 몇 권 있었거든요. Muse를 들었어요. 문득 듣고 싶다고 느꼈어요. 그렇게 기념하고 싶었어요. 루인에게 Muse는 너무 각별하거든요. 오고 가는 길에 Muse는 달콤했어요.

요즘 기억의 재구성을 느끼고 있어요. 현재의 상황이 과거의 기억을 어떤 식으로 다르게 해석하는지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어요. 사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스스로에게 해명하는 과정이죠. 과거엔 지금처럼 해석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기억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죠.

당신의 기억은 루인에게 일종의 봉인이기도 했어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관련이 있죠. 그렇다면 루인에게 당신은 분열하지 않은 몸으로 다가왔지만 한때 분열로 다가오기도 했어요.

레즈비언이란 말을 몰랐어요. 그래서 당신을 좋아하는 자신을 “남성”이라고 간주했죠. 하지만 치마를 입는 루인도 그때 같이 있던 모습이에요. 그랬어요. 이런 둘의 모습을 조금도 분열하는 것으로 느끼지 않았죠. 이런 모습을 분열로 느낀 건 최근의 일이에요. 트랜스란 정체성을 설명하며, 이런 루인의 과거를 해명하며 당신을 좋아한/여전히 그리워하는 현재를 설명하기 어려웠어요. 그땐 레즈비언이란 말을 몰랐지만 지금은 아는데, 왜 그랬을까요. 그땐 당신을 ‘이성애’로 좋아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당신을 레즈비언 관계로 재구성하고 있어요. 재미있지 않나요? 현재의 몸이 과거의 흔적을 재구성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느끼는 것.

오랫동안 당신을 기억해왔지만 어차피 환상인 걸 알아요. 먼 거리를 두고 있기에 지속 가능한 환상. 그래서 이렇게 글을 써요. 당신, 가시같은 당신. 목에 걸린 가시 같은 당신. 작년에야 알았어요. 축하해요.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마요.

문화적-의료적 구성으로서의 젠더/섹슈얼리티

#수업 교제로 읽고 쪽글 혹은 논평이랍시고 쓴 허접한 글.
심심하면 한 번 읽으시라고;;;;;;;;;;;;;

[#M_ 읽기.. | 귀찮으니 접기ㅋ.. |
문화적-의료적 구성으로서의 젠더/섹슈얼리티
-Leonore Tiefer “Social Constructionism and the Study of Human Sexuality”

2006.09.21. 루인

의학에서 동성애를 쓰는 글은 명백하다. 의사들은 저널이나 교과서를 통해, 수술을 하면 [간성인]아이들은 정상이 되고 행복해지며 이성애자가 될 거라고 부모들에게 말하라고 충고한다.
―Peter Hegarty in conversation with Cheryl Chase(2000:126)

1960년 중반, 지금은 유명하지만 당시엔 지금만큼은 아니던 존 머니John Money는 포경수술을 하던 중 잘못하여 페니스가 타 버린 아이와 만난다. 그 전부터 몇 차례 성전환 수술을 한 경력이 있던 머니는 생후 8개월일 때 페니스를 잃은 그 (남자)아이의 부모에게 여자아이로 성전환 수술을 하면 된다는 “희망”을 준다. 신생아 때 성전환 수술을 해서 어릴 때부터 전환한 성으로 길러지면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논리였다. 사실 그 아이는 머니의 논리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부모들에게도 그런 제안은 “희망”이었는데, 페니스가 없는 남성이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의학계의 기록상으로 ‘성전환’ 수술을 한 아이는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아이의 사례는 존 머니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다 주었다. 3살 이전에 성전환 수술을 하고 계속해서 호르몬을 맞으며 전환한 성에 맞춰 길러지면 완벽하게 그 성으로 살아간다는 존 머니의 논리는 성(sex? gender? sexuality?)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는 말과 함께 상당한 설득력을 얻었다. 그리하여 존 머니가 제시한 이론과 규범은 오늘날까지도 간성과 트랜스젠더에게 하나의 원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행복하게 살았을까. 어느 나이까지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아이가 행복하게 살았다는 존 머니의 보고와는 달리 그 아이는 끊임없이 자신의 젠더정체성과 갈등했고 심리 상담 및 정신과 상담을 받았고 결국은 “태어났을 때의 성”으로 다시 성전환 수술을 했다.

이 사례는 무엇을 의미할까. 성은 타고난다는 의미일까, 그래서 젠더라는 문화적 구성이 문제거나 ‘잘못’이란 의미일까. 아니면 단순히 문화적 구성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일까.

섹슈얼리티와 젠더는 시대나 문화적인 맥락과 상관없이 고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맥락에 따라, 개인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진부한’ 말을 반복하지만 종종 이런 식의 기술과 미묘한 갈등을 느낀다. 이 갈등은 보편적인 어떤 의미가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런 기술을 단순한 구성주의로 해석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경험들을 배제하는 경향으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Tiefer(1990)의 글을 읽으며 가장 ‘좋았던’ 구절은 “인간 섹슈얼리티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선, 경험적, 상호 관계적, 의학적 방법들을 경쟁관계로 두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이다.

사회구성주의를 논하거나 젠더를 얘기하며 간과하기 쉬운 지점은 호르몬이나 유전자와 같이 이른바 생물학 ․ 의학적 ‘본질’이라고 말하는 부분의 영향이다. 하지만 호르몬 투여를 시작한 많은 트랜스젠더들은 피부나 외모뿐 아니라 성욕에, 성격까지 변한다고 말한다. ftm은 남성호르몬이라 불리는 테스토스테론을 투여한 이후 성적 욕망이 더 많아진다고 증언하고 화가 날 때, 그 전에는 잘 참았는데 호르몬을 투여한 이후 욱하는 성격이 생겼다고 말한다. mtf들은 성욕이 감소하며 종종 무력감을 느낀다고 증언한다. 이 글을 시작하며 적은 아이의 사례와 이런 증언들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많은 간성 아이들은 태어나서 여성이란 젠더로 할당 받는데 그 이유는 여성의 성기를 만든 기술이 남성의 성기를 만드는 기술보다, 현재로선 더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불완전한” 페니스로 살아가면 불행할 테지만 여아로 살아가면 행복할 거란 의사들-의사 개개인을 매개하는 의학을 통한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젠더gendered 해석이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염색체가 XY인 여성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럼 의사들의 해석처럼 간성들은 의사가 할당한 젠더에 행복할까. 의사들은 성기 변형 수술을 하면 “정상적이고 행복한 이성애자”가 될 거라고 단언하지만(그래서 부모들의 동성애공포를 부추기며 수술을 강행하지만) 많은 간성들은 자신을 ‘동성애자’로 인식한다.

섹스는 쉽게 생물학적 본질이라고 얘기하지만 섹스 역시 의료체계에 따른 해석이다. 이 말은 단순히 간성만 혹은 트랜스젠더만이 의료해석에 따른 외과적 젠더를 구성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외과적 젠더/섹스로 ‘태어난다’는 의미이며 이 젠더 (재)배치gender (re)assignment과정에서 문화적 해석이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의학적 방법들은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객관적 과학이 아닌 문화적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래서 의학적 방법은 경험적 방법이나 문화적 해석과 경쟁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구성적인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이런 해석들의 경합에도 불구하고 해석에 ‘따른’ 몸 혹은 해석과 ‘다른’ 몸 이려고 하는 욕망은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동성애는 질병이다”(각주 1), “트랜스젠더는 정신병이다”라는 언설들이 의학에서 여전하고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무엇을 질병으로 ‘발명’할 것이냐는 해석과 정치적 투쟁의 과정이다. 정치적 해석의 경합 과정에서 과거엔 일상이 지금은 질병이 되기도 하고 성적 지향성이 병리적 행동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분위기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동성애자, 퀴어, 트랜스젠더라고 명명하며 등장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호르몬이 몸을 구성하는 중요한 지점일 때, 그것을 본질주의로 말하지 않으면서도 호르몬이 몸에 끼치는 영향은 어떤 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호르몬이나 유전자가 젠더정체성이나 섹슈얼리티에 완벽하게 무관하다고 단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성애-양성체계를 강화하지 않으면서도, “남자는 원래 그래”, “여자는 원래 그래”라는 식의 언설들이 가지는 ‘본질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상호 영향들을 말할 수는 없을까. 이것이 지금의 고민이기도 하다.

각주 1) 1973는 DSM 목록에서 빠졌지만 1980년대 초, GID(gender identity disorder)를 통해 동성애는 다시 정신병의 목록에 오른다. GID는 원래 트랜스젠더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이성애를 정상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맥락에서 동성애는 GID로 진단된다.

#참고문헌
루빈, 헨리 S, 2004, “(성전환자) 남성처럼 글 읽기”, 톰 디그비 엮음 <남성 페미니스트> 김고연주 ․ 이장원 옮김, 서울: 또 하나의 문화
루인, 2006, “젠더를 둘러싼 경합들(gender dysphoria):트랜스/젠더 정치학을 모색하며” 출판 예정
콜라핀토, 존, 2002, <타고난 성, 만들어진 성>, 이은선 옮김, 서울: 바다출판사
Hegarty, Peter in conversation with Cheryl Chase, 2000, “Intersex Activism, Feminism and Psychology: Opening a Dialogue on Theory, Research and Clinic Practice”, Feminism & Psychology Vol.10(1)
Tiefer, Leonore, 1990, “Social Constructionism and the Study of Human Sexuality” Edward Stein edt. Forms Of Desire, New York and London: Routledge
Valentine, David & Riki Anne Wilchins, 1997, “One Percent on the Burn Chart: Gender, Genitals, and Hermaphrodites with Attitude”, Social Text No.52/53, Nos 3 and 4, Fall/Winter_M#]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발생하는 언어들: 언어에 내재한 권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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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그래서 반복해서 말해야만 하는 사례 하나. 학부 시절, 중간에 휴학을 한 덕분에 9학기를 다녔었다. 그래서 몇 학기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농담처럼 했던 말, 4학년 3학기에요. 그럼 다들 웃었고 재미있어 했다. 이런 얘기를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했다. 그리고 분위기는 변했다. 그 친구는 2년제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언제나 4년제 대학 혹은 학벌과 그 위계를 아쉬워했다. 자기도 4년제이고 싶어 했고 종종 농담처럼 자신은 대졸이 아니라 고졸이라고 말했다(농담처럼 얘기했지만 농담이 아니다).

그 친구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몰랐을 사실 중 하나는 “대학교”란 말은 4년제에만 붙일 수 있고 2년제엔 “대학”이란 말만 붙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대학”이냐 “○○대학교”냐, 로 곧 몇 년제인지 알 수 있다고. 학벌은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하는 곳에 산재하고 있다. 명절마다 부산에 내려가는데 가기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학벌-공부를 잘 한다는 어떤 권력/권위를 느끼기 때문이다. 루인은 그런 것이 없다고, 서울에 다닌다는 것이 곧 공부를 잘 한다거나, 뭔가 대단한 건 아니라고 속으로 중얼거리지만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는 사촌이나 그 사촌의 부모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처음엔 그냥 그런 말이 짜증이었지만 이내 깨달았다. 그렇지 않다고 중얼거릴 수 있는 것이 바로 학벌이며 특권의 증거라는 것. 루인은 토익, 토플 공부를 한 번도 안 했지만 이 역시 학벌이라는 특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루인은 루인이 다닌 학부가 대단하다고 느끼지 않지만, 과거의 어떤 풍문을 안쓰럽게 붙잡고 있다고 느끼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어떤 서열 같은 것이 있을 때, 그리고 서울에 소재하고 있을 때, 결국 토익/토플을 공부하지 않아도 루인의 영어 실력은 바로 그런 학벌에 의해 충분히 보증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토익/토플 공부를 안 한다고, 안 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종종 그 사람의 특권 과시이다. 학벌이, 그 사람의 토익/토플 성적이 몇 점이든 상관없이 그 모든 걸 담보해주기 때문이다.

(얼마 전 신촌에 나갔다가 연고전을 알리는 파란 색 현수막을 봤다. 또 다시 학벌/특권 과시인가? 아니면 “정상성” 과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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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혹은 이제 군대에 입대할 사람들이, 군대 경험이나 군 입대를 낭비로 얘기하는 것이 “그들”에겐 푸념일 수 있고 정말 “낭비”일 수 있지만 듣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선 그것은 자신의 권력 과시일 수도 있다고 느낀다(물론 “그”가 누구냐에 따라 이건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문제가 쉽게 건드리기 힘든 성역이기도 할 때, 대한민국 헌법이 “남성”만을 “국민”으로 간주할 때, 예비역의 군대 관련 발화들은 종종 특권 투정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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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누군가가 자신이 아들이었다면 과외도 받았을 테고 고등학생 시절부터 유학을 했을 테고, 등등의 얘기를 했었다. 비단 그 “누군가”의 그 이야기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어려움’을 들을 때마다(특히 여성학 수업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복잡한 위치에 빠진다. 그 말의 맥락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루인에게 그 말은 특권 투정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런 말들을 할 수 있는 젠더적인 특권들-즉 트랜스젠더가 아니기에 가질 수 있는 어떤 특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가 가지는 어린 시절의 경험과 트랜스젠더가 아니기에 가지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다르고, “남성”(혹은 “여성”)으로 간주되지만 자신은 “여성”(혹은 “남성”)이라고 말하는 트랜스젠더들에게 트랜스젠더가 아닌 이들과 공유할 수 없는 하지만 때론(꼭 그렇지는 않고,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공유하고 싶은 어떤 경험들이 부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말들이 특권처럼 다가온다. 그런 얘기들에서 애시 당초 배제되는 상황에서 그 말의 맥락은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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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겐 고통이나 ‘어려움’이 그것 자체에서 배제된 이들에겐 특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트랜스젠더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불편함을 말하는 목소리들은 종종 예비역 병장들의 군대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