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읽기

이 사진을 접한 순간, 이런 재미있는 사진이! 라고 느꼈다. 적어도 이 사진에 대한 설명을 읽기 전까지는. 그냥 사진만 볼 때, 무엇이 떠오르나요?

이 사진은 “2006 칸 국제광고제”의 인쇄광고를 애드키드님이 찍어서 올린 것. 주제는 어린이 전용 두통약 광고란다. 그럼 이 아이들은 어떤 상황에서 발생한 두통일까?

처음엔 이 사진이 문 밖에 있는 애가 고백하는 사진으로 읽었다. 문지방에 서 있는 아이는 별로 내키지 않아서 머리가 아프다고 할까, 뭐 그런 상황. 그런데 설명글을 읽으니 그게 아니라 파티에 같은 옷을 입고 와서 머리가 아픈 것이란다. 그렇다면 커밍아웃하지 않은 커플인데 커플룩을 입은 격이 되어 커플임이 들키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머리가 아픈가? 후후후

여러모로 재미있는 사진이다.

천하장사 마돈나: 환상에 기대어

일전에도 이 영화와 관련한 글을 적었지만, 그때도 지금도, 이 영화에 대한 느낌은 “참 착한 영화구나”이다. 정말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트랜스젠더 영화. 종종 퀴어영화로 부르는 사람이 있지만 이 영화가 퀴어영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트랜스젠더 혹은 퀴어가 나오면 퀴어영화인가?

어제 밤에야 비로소 이 영화를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던 한 지점을 깨달았다. 그건, 영화 제목이 나오는 바로 그 장면에서였다.

이 영화의 제목은 영화 시작 즈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끝날 즈음에 나온다. 주인공 동구가 천하장사가 되고 난 후, 그래서 장학금 500만원을 모은 후 영화 제목이 나오고 수술한 동구가 노래하는 장면이 나온다. 왜 이 장면이 걸렸을까.

지금의 몸이 아닌 다른 몸이 되길 바라는 욕망이 있는 트랜스젠더들에게 (모든 트랜스젠더가 그렇진 않지만) 자고 일어나면 몸이 완벽하게 변해있는 환상이 있다. 모든 트랜스젠더라고 말하지 않고 루인으로만 한정하면, 잠이 들 때마다 잠에서 깨면 몸이 변해있길 바라는 욕망을 품는다. 물론 매일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욕망은 언제나 몸을 타고 돈다. 정말로 영화나 소설 혹은 동화에나 나올 법한 환상적인 이야기. 어린애들이나 믿을 법한 이런 이야기 혹은 환상.

이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몸이 변해있는 것처럼 영화 제목을 기점으로 동구는 변해있다. 호르몬 투여 과정, 수술 과정은 모두 빠져있고 그 시간 동안 겪는 고통이나 갈등, 경합들 모두 빠져있다. 하나의 장면을 기점으로 겪는 몸의 변화.

바로 이 지점이 영화를 편하게 볼 수 있게 하는 지점이면서 혹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다. 정말 이걸 바라기 때문에. 어느 날 자고 일어나면 변해있는 자신을 만나는 일. 그 과정을 갈등하고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런 변화에 혹하지 않긴 힘들다. 그런 만큼 화도 나지만….

글쓰기와 변태하기, 자기글 비판하기

글을 기획하고 개요를 짜고 초고를 손글씨로 완성해서 워드파일로 작성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뭔가를 쓴다는 건 자신의 위치를 다시 모색하는 일이고 어렴풋이 몸에서 떠도는 목소리들을 문자로 담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중얼거린 말이 떠오른다: “내가 나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아닌 척 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을 통해 커밍아웃을 할 상황이었던 그때, 이 문장이 몸에서 떠올랐다. 모든 글쓰기가 “나 아닌 척 하지 않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불편함에 어찌할 줄 몰랐다. 루인이 쓰는 모든 글이 결국엔 불만으로 아쉬움이 가득한 글이지만, 그 글은 유난히 그랬다. “나 아닌 척 하지 않기 위해” 글을 써야 할 텐데 “나 아닌 척” 글을 썼다는 느낌. 글이 루인을 완전히 설명할 순 없지만, 언제나 그 상황에 따른 일부분만을 말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 글은 완성과 동시에 루인을 배반했다.

아니다. 배반한 건 그 글이 아니라 루인이다. 글을 완성하고 청탁자에게 메일로 보낸 직후, 그 글의 내용과 다른 루인으로 변한 것. 이럴 때의 상황이 참 재미있다. 글은, 그 글을 쓸 당시의 자신일 뿐, 일 년 전에 쓴 글을 지금의 그 사람인양 비판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비단 글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도 비판은 그것을 행했던 당시의 그 사람을 비판하는 것이고 그 행동을 비판하는 것이지 그 행동을 한 그 사람의 전 생애, 그래서 향후 미래까지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은 그래서 엄청나게 끔찍한 소리며 본질주의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내일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그 글과 루인의 관계가 그랬다. 변하는 게 좋은 것이긴 한데, 청탁 받아 메일로 보낸 직후에 변하면, 그래서 인쇄되어 나오기도 전에 변하면 어쩌란 말이냐;;; 차라리 인쇄한 글을 읽다가 변하는 게 낫지. 흑흑.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쇄소 앞에서 기다렸다가 몽땅 회수하고 싶다, 루인의 글이 있는 부분만 찢어버리고 싶다는 얘길 했었다. 조만간에 그 글을 비판하는 독자투고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했다. 후후. 같은 이름으로 반론을 제시하거나 다른 이름으로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다행스럽게도 그 글을 비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 같다. 누구도 신경을 안 쓰겠지만 혼자서 불쾌하고 부끄러웠는데 다행이다. 그나저나 자기가 쓴 글을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건 꽤나 재밌는 일이다.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