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트랜스/퀴어 공포(혐오)가 덜하다고?

몇 해전 한 인터넷 클럽에서 읽은 글. 그 클럽의 주인은 “여성”들에 비해 “남성”들이 퀴어(나 트랜스) 공포가 더 심하고 “여성”들은 공포가 별로 없다는 글을 썼었다. 그 글에 한 “남성”이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답글을 달자, 글쓴이는 참 드물다면서 놀라고 반가운 반응을 표했다. 당시 루인은 뭐라 할 수 없게 복잡했지만 그냥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빈약한 언어는 뭐라고 할 수 없게 한다.

페미니즘 혹은 여성학 관련 모임 혹은 수업을 매개로한 어떤 자리에서 들은 말. “여성”이 “호모포비아”가 덜한 건, “같은 약자, 타자로서의 감수성 때문이다”란 말을 했었다. 고개는 주억거렸지만 글쎄… 수긍하기 힘들었다.

루인의 편견이겠지만, 그러고 보면 공포에 따른 혐오범죄의 가해자 상당수는 “남성”인 것 ‘같다’. 혹은 그렇게 재현한다. 몇몇 영화를 떠올려도 그렇고 인터넷 등 신문 기사를 통해서도 그런 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독 “남성”이 트랜스/이반queer 공포가 더하다는 의미일까?

어제, 여이연 강좌를 마치고 玄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맞은편에 앉은 커플의 반응. “여성”젠더처럼 드랙한 사람을 “여성”으로, “남성”젠더처럼 드랙한 사람을 “남성”으로 가정한다면, 멸시의 눈빛은 “여성”에게 있었고 “남성”은 그렇지 않았다. 왜 문제인지 모르는 표정이었을까, 그냥 쿨하고 싶은 표정이었을까, 선망의 표정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루인이 느낄 수 있을 만큼 드러나게 공포의 혐오를 표하진 않았다.

‘이성애’가족구조에서 자신의 젠더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성을 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엄마”이며 “아빠”에겐 가장 늦게 알린다는 말을 자주 접한다. 그렇다면 “엄마”-“여성”이 트랜스/퀴어들을 향한 혐오가 덜한 걸까. 이런 반응을 단순히 성별 혹은 양성체계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몇 주 전 PD수첩에서 방영한 “나를 정정해달라 -트랜스젠더의 성결정권”을 보면, 호적정정을 신청하기 위한 자리에 “엄마”는 절대 동의하지 않아 나타나지도 않지만 “아빠”는 도장을 가지고 나온다. 이렇게 부모 중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가는 그 사람의 성별이 아니라 일종에 친밀도 혹은 더 자주 얘기를 나눈 관계와 좀 더 관련 있다고 여긴다. 지금의 사회에선 “여성”들이 양육에 더 많은 책임을 강요받는다는 점에서 자식들과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거나 관계를 엮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 뿐이다.

루인의 경험으론 이런 공포에 따른 혐오 반응은 성별/양성에 별 상관없다고 느낀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루인의 몸속에, 몸을 아래위로 훑으면서 공포/혐오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이른바 “여성”젠더로 드랙한 이들이다. 이른바 아저씨들은 차라리 심드렁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아예 관심이 없었긴 하지만 별로 그러진 않았다.

“여성”이 “남성”보다 공포와 혐오가 더 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물리적인 폭력과 욕설로 표현하거나 눈빛과 표정으로 표현하는 등의 방식의 차이지 성별에 따라 더하고 덜하다는 식으로 구분할 순 없다. 페미니스트라고 혐오나 공포가 없는 것이 아니고(때로 더 심하고) 마초라고 더 심한 것이 아니다(미국 흑인공동체에서의 경우, 특히 힙합 음악을 듣고 있으면 혐오발화를 상당히 심하게 해서 흑인”남성”들은 혐오가 더 심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가장 절친한 친구 중에 퀴어나 트랜스가 있는 경우도 많다. 어떤 신부는 자신이 ‘동성애’자면서도 설교시간 금지 발화를 하기도 한다).

최근 일련의 경험들에, 예전에 그 클럽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성은 젠더, 이름은 트랜스: 여이연 트랜스젠더 강좌

많이 기다렸고 아쉬움이 남는다.

작년 여름 처음으로 여이연 강좌를 들으러 갔을 때, 몇 개의 강좌를 선택하며, 가장 듣고 싶었던 강좌는 “페미니즘이론 2: 젠더gender“였다. 페미니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루인의 경험을 언어로 모색하며 당시 한창 관련 논의를 찾고 있던 와중에 이 강좌를 찾았으니 너무도 기뻤다. 하지만 사람 수가 적어 폐강했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며 다른 방향을 모색했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차라리 잘 된 것일까.

그해 여름이 끝나고 가을, 혼자서 트랜스/젠더 관련 논문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미 지난 시간이었고 겪지 않은 일이기에 뭐라고 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그때 혼자서 시작한 것이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 강좌를 들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때 강좌를 듣지 않았고 그래서 언어가 더욱 절실했기에 좀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두 개의 젠더 강좌를 들었다. 지난 6월 말에 있은, “성별 문제, 그 이후”와 이번에 들은 “성은 젠더, 이름은 트랜스”. 이번 강좌를 들으며 어쩌면 작년이 아니라 이번에 들은 것이 더 좋았음을 느꼈는데 그건 1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민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 이미 두 편의 논문을 쓴 상태란 점, 그리고 마냥 새로운 이야기만 들은 건 아니란 점이다. (그리고 그 논문들을 두 분 모두에게 드렸고 코멘트를 받았거나 받을 예정이란 점은 정말 중요한 일!)

강좌를 듣는다는 건 아예 처음 듣는 걸 배우는 즐거움도 있지만 고민하고 있는 주제를 들으며 더욱더 자극 받는 즐거움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미미하나마 조금이라도 공부를 하고 있는 걸 배울 때 그 즐거움은 배가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 두 개의 강좌가 그랬다. 특히 어제로 끝난 트랜스/젠더 강좌는 아쉬움으로 가득했는데 강좌 내용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다른 강좌들이 5일인데 반해 이 강좌는 3일이란 점 때문이다. 3일이란 아쉬움. 더 많이 듣고 싶고 하루라도 더 듣고 싶은 아쉬움이 남았다.

강좌를 들으며 도움이 되었다면 아직 잘 모르는 부분에 자극을 받았다는 점이랄 수 있겠다. 강좌를 들었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느낀다. 알 수 있다고 하기 보다는 더 배우고 싶고 알고 싶은 자극을 받는 것이라고 느낀다. 지금까지 산만하게 알던 내용들을 정리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앎들 사이에 좀더 수월하게 건널 수 있는 돌을 놓는 것이랄까. 물론 지금까지 모른다고 느꼈던 지점들을 배울 수도 있지만 루인의 경우엔 대체로 이런 편이다. 아예 새로운 걸 배운다고 하기 보다는 흩어진 상태로 몸에 있는 흔적들을 모아서 엮어가는 자극을 받는 것. 이번 강좌는 그런 자극 이상을 받았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사실,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빨리 말할 수 있는 지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오랜 시간 몸에 남아 자극으로 변한다는 점,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폭풍우 치는 밤에: 퀴어와 채식이 겹치는 순간

어제 잠깐 [Run To 루인]에 들어와 댓글을 확인하다 수인님께서 [폭풍우 치는 밤에]가 채식과 관련할 수 있다는 글을 읽고 즐기고 싶은 자극이 온 몸에 돌았다. 사실 예전부터 볼까 갈등했었다. 일본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 그러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귀찮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어둠의 경로를 뒤적이니 아슬아슬하게 받을 수 있었다. (비디오가 없는 상황에서 확인하지 않고 디비디타이틀을 살 수는 없으니까.) 처음엔 끝까지 볼 계획은 아니었다. 요즘 자꾸만 늦게 자는 상황으로 피로했고 눈이 조금 아팠기 때문. 여이연 강좌도 있어서 오전을 조금만 어영부영 보내도 혼자 놀 시간이 없기 때문에 끝까지 다 즐겨야지 보다는 그냥 앞부분만 조금 즐겨야지, 정도였다. 물론 다 즐겼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만큼만 느낄 수 있다란 말, 그다지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이 애니메이션을 즐기며, 채식 혹은 음식의 정치와 이반/퀴어queer를 동시에 느꼈다. [웰컴 투 동막골]이 채식과 민족주의, 군사주의를 동시에 그리고 있다면 이 애니메이션은 채식과 퀴어를 동시에 다루고 있는 셈.

루인은 염소인 메이보다 늑대인 가브가 더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느꼈는데, 더 많은 갈등 속에 있는 캐릭터고 자신의 권력을 더 많이 성찰하려고 노력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메이는 자신의 채식이 식물에 대한 폭력임을 별로 성찰하지 않지만 가브는 자신의 육식이 메이에게 어떤 감정을 일으킬지를 계속해서 고민한다. 염소고기를 좋아하는데 친구가 염소인 상황. 힘의 논리에서 강자와 약자로 나누자면 가브가 강자일 수 있지만 더 많은 갈등과 성찰은 가브의 몫이다(이 부분이 흥미롭기도 하다). 이런 갈등은 둘이서 도망치는 장면에서 잘 나오는데, 메이가 잠든 사이 가브는 몰래 들쥐 두 마리를 잡아먹고 돌아온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메이는 불쾌함을 표한다. 자신은 어쨌든 싫다고.

이 부분은 사실 가장 큰 딜레마로 다가왔다. 염소의 채식이, 늑대의 육식이 타고난 것일 때, 그렇다면 염소와 늑대가 서로 불편하지 않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마주치고 어려운 문제다. 비슷한 채식주의자들이 아니면 같이 밥 먹으러 가길 꺼려하듯, 육식 혹은 음식을 정치학이 아닌 취향으로 간주하는 이들과 겪는 고민 혹은 갈등이 이 장면에 함축적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폭풍우 치는 밤에]는 이 이상의 성찰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가 죽을 테니 너라도 살아라는 식의 빤한 부분이 있어서 슬프지만 식상함을 느꼈달까. 흐흐.

이 애니메이션의 짜릿함은 우정으로 포장한 이 둘의 관계가 퀴어로 읽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점이 채식 혹은 음식과 겹치면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오직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처럼 여기는 염소와 늑대의 우정이 결국 집단을 떠나 도망을 선택할 때, 이 버디무비는 ‘이성애’ 사회에서 결코 사랑할 수 없기에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퀴어들을 다루는 애니메이션으로 다가왔다. 우정과 애정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다는 점에서, 특히 메이와 가브의 관계는 그 경계에서 짜릿함을 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특히, 가브와 메이가 눈 덮인 산에 올라 지쳐 죽어가기 직전의 한 장면: 가브는 배가 고파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고 메이는 자신을 잡아먹고 살아 남으라하고 가브는 자신이 늑대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장면. 이 장면에서 순간적으로 가브를 트랜스로 느꼈다. 자신의 몸에 별다른 불편함을 안 느끼지만 주변의 여건이 자신의 느낌을 갈등과 정신병으로 만들 때, 수술을 선택하기도 하는 트랜스들과 늑대라는 이유로 염소와의 우정/애정을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육식의 허기로 고통스러워 자신이 늑대로 태어났음을 원망하는 가브가 겹치며 다가왔다.

뭐, 결론은 뻔하다. 예상할 수 있는 그 내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애니메이션은 꽤나 흥미롭고 재밌게 다가온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수인님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