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누가 루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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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듣고 있는 여이연 여름 강좌의 하나는 “처음 만나는 정신분석2”. 어제의 주제는 강박증. 그리고 흥미로운 얘기는 연애.

“연애는 어렸을 때 부모와의 관계를 반복함으로써 그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행위”라는 얘기였다. 일테면, 양육자(이른바 “정상”가족이란 강박에선 부모를 의미하지만 꼭 부모와의 관계에서만 지내는 것은 아니니까) 중 바람 피는 사람이 있을 때, 대체로 “나는 절대로 바람 피는 사람과는 만나지 않을 거야”라는 다짐을 하지만 결혼할 때 보면 바람둥이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결국 바람 필 걸 알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상처였던 관계를 다시 반복 하되 상대방이 바람 피지 않게 하여 어릴 때의 상처를 치유 받고자 함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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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했던 말. 왜 연애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누가 루인 따위를 좋아하겠느냐”고 답했었다. 루인의 의도는 그랬다. 별 보잘 것 없는 루인을(이건 자학이 아니라 나름 냉정한 평가. 후후.) 누가 좋아하겠느냐란 의미와 루인은 누굴 좋아해도 먼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별 관심이 없다는 의미들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얘기.

한 사람이 해준 말. 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상당한 소외를 느꼈다고 했다. “연애 안 할 거니 좋아하지도 마!”란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란다. 몰랐지만 그런 의미도 숨어있었음을, 그때 알았다.

이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지만, 현재 목표는 석사논문을 쓸 때까지는 연애를 하지 않을 예정. 물론 이렇게 말하고서 내일 이곳에 결혼 발표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상 일 어떻게 돌아갈지 쉽게 단언할 수 없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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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밥 먹는 걸 싫어하거나 우울해 하고 그래서 혼자서는 절대 밥을 먹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해하지 못하는 루인을 느낀다. 예전에 한 사람과 길에서 나눴던 얘기.

지인: 어디 가요?
루인: 밥 먹으러 가요.
지인: 혼자서요?
루인: 루인이랑 먹어요.

이 대화의 결론은? 어쩌면 그렇게 혼자 밥 먹는 일을 당연하게 말할 수 있느냐는 지인의 부러움. 하지만 이건 부럽고 안 부럽고의 문제가 아니라 강박적으로 혼자 먹는 건 우울한, 외톨이인, 뭐 이런 식으로 간주하는 시선의 문제일 뿐이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혼자 밥 먹는 거, 즐거운 일이다.

영화 볼 때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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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다한 얘기가 있는데 잊었거나 잊고 싶어 하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억누르고 있다.

캐리비안의 해적

2006.07.09.(일) 아트레온 20:20, 2관 3층 D-17 :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
(+ 어둠의 경로: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

은유나 비유는 기본적으로 약속에 바탕하고 있다. 평화와 아무런 상관없는 비둘기지만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고 한때 빨간색은 “빨갱이” 곧 친북이나 북한을 상징했다. 이런 상징은 실재의 존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비유나 은유의 대상으로 자리하는 순간 고정적이고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때 “배신감”을 느끼거나 당황한다.

유머도 마찬가지라서 공통의 합의 없인 웃기 힘들다. 외국 영화에서 나타나는 코미디를 한국에선 왜 웃는지 알 수 없는 경우는 그래서다. [노스 컨츄리]란 영화는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을 다루고 있는 영화지만 그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직장 상사를 비웃으며 “호모”라고 ‘동성애’ 혐오/공포발화를 유머랍시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루인은 이 영화에 좋은 감정을 가지기 힘들다. 트랜스 영화인데 채식을 (계급의 맥락과 상관없이)비난하거나 이반/퀴어queer영화인데 트랜스혐오를 드러내거나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영화들을 좋은 감정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도 마찬가지다.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겠다고 한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반지의 제왕]을 보다 좋아하게 된 올랜도 블룸가 나온다는 이유 하나에서였다. 그리고 [캐리비안의 해적]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조니 뎁이 아니라 올랜도 블룸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참 재미없다. 1편에서의 블룸은 너무 ‘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망자의 함]을 보기 위해 본 [블랙펄의 저주]는 딱히 누군가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더라도 재미있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그저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는다는 기분으로 예매했을 따름.

영화를 보며, 느낀 점은, 아시아 혹은 제 3세계를 야만, 원시, 미개로 그리는 것에의 불편함, 불쾌함과 ‘엉성한’ 스토리의 지루함이었다.

#이제부터 스포일러 가득할 듯.

부족들이 나오는 장면은 “미지의 아시아(혹은 아프리카) 종족”에 대한 서구제국주의 시선의 전형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식인 풍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없어도 되지만 그나마 가장 재밌게 하려고 만든 장면이며 보는 내내 불편했던 장면이다. 이런 시선은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오는 보너스장면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영화는 영국-동인도회사와 해적 간의 다툼을 인도/아시아에서 치루는, 인도/아시아를 대리전쟁터로 여기고 있으며 좀 오버해서(과도하게 오버해서) 해석하면 식민지제국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혐의를 드러낸다(이런 느낌은 이와 관련한 해석의 맥락이 있어서이다).

‘플라잉 더치맨’의 데비 존스의 모습과 그 배는,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에, 특히 데비 존스가 배에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순간적으로 다른 영화를 보고 있나 싶을 정도로 진부. 뭐, 이를 재현한 기술력을 칭찬하자면 그럴 수 있겠지만, 특수 분장이나 CG를 공부하지 않고 있는 입장에서 그런 기술력을 ‘당연시’하는 루인으로선 기술력이 얼마나 뛰어나냐가 아니라 기발함 혹은 이야기 전개를 더 중시하는 편이다. (전개가 엉성하더라도 기발함에 더 비중을 두는 편이기도 하고.) 이럴 때, 이 영화, 좀 지루했다. 올랜도 블룸 보다는 조니 뎁이 더 매력적으로 나오고 집시 캐릭터(이름이;;;;;;;;;;;;;;)가 괜찮았다.

어쩌면 단지 루인의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지루했을 지도 모른다. 이른바 (한국형)블록버스터라고 불리는 영화 중에 재미있다고 느낀 영화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청연]도 블록버스터라고 할 때, 비교하자면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쟁점이다.

트랜스/젠더/퀴어 카테고리..

아래에 있는 “할버스탐“과 관련해서.
트랜스/젠더/섹슈얼리티/이반queer 자료창고“와도 관련해서.

나스타샤가 아픈 이후로 자료실을 무기한 연기할까 했다. 하지만 어제, 玄牝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왜 새로운 도메인으로 시작해야 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굳이 새로운 도메인에 새로운 구성으로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 그냥 이곳, [Run To 루인]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고 연속선상에서 시작하면 되지 않느냐는 깨달음.

큰 카테고리를 “트랜스/젠더/퀴어”로 하고 하위카테고리로 적당히 나누면 편하잖아. 다만, 루인으로선 두 개의 카테고리를 좋아했기에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Run To 루인]의 성격이 조금은 달라지겠지만 안 될 이유가 없잖아. [Run To 루인]의 성격이 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특정한 성격에 붙잡아 두려는 것이 더 안 좋을 수도 있는 것을. 글을 쓰는 루인이 변하고 있듯 [Run To 루인]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을.

그럼 조만간에 새로운 카테고리가 등장할 거예요.
(“조만간”이란 말을 유의하면, 역시나 귀찮아서 안 하고 있으면서 나스타샤가 아파서 못하고 있다는 핑계란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