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 논평

지난 주 여이연 여름강좌 “성별문제 그 이후”를 들으며 강의를 하신 선생님에게 두 편의 기말논문과 후기를 덧붙여 “트랜스/젠더 선언문 1/2″이란 제목을 붙인 편집본을 드렸었다.

4번째 강의가 끝나고 간단한 자기 소개시간을 가졌다. 보통은 강의를 시작하는 날 자기소개 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이번 강의는 첫날 그 시간을 생략했고 4번째 강의가 끝나고 토론 시간에 자기소개를 할 시간이 생겼다.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마주쳤다. 그 순간 결정했다. 사실, 강의 이틀째인가 사흘째인가부터 갈등했다. 그러니까, 이미 고민하고 공부하고 있는 분들의 논평을 듣고 싶었다. 논의 맥락을 몰라도 평을 할 수 있지만 논의의 맥락을 아는 사람은 또 다른 평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련 고민과 공부를 하는 사람이 너무도 적다는 점에서 갈망했다. 신랄한 비난을 듣더라도 좋으니 어떤 논평을 듣고 그를 통해 더 자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 바라는 건 성적/점수가 아니라 논평이니까. 이런 고민과 갈등 속에서도 많이 망설였다. 글이 많이 부족한 것도 그렇지만 단지 강사와 수강생이란 관계일 뿐인데, 단지 관심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부탁하는 건, 무례이고 한창 바쁠 수도 있는데 이런 부탁하는 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탁하고 싶음과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몸. 그 갈등 사이에서 그날 강의가 끝나고 나오는데, 마주쳤고, 부탁했다.

지금은 바쁘시다고 했고, 그래서 당장 논평을 하긴 어렵다고 하셨다. 그래도 괜찮냐고 하시 길래 그렇다 했고, 망설이시면서도 받아 주셨다. 사실 그 사람의 글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논평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기 어렵다. 괜찮은 내용일 거라는 모종의 기대, 자극을 받을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지루할 수도 있고 엉뚱한 소리만 한 글일 수도 있는 경우를 모두 감안해야하는 상황에서 그런 약속을 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너무 고맙고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한 달 안에 메일을 주시면 다행이라고 예상했고 그래서 부탁한 일 없다는 듯이 기다리기로 했다. 그것이 몸편하니까. 언제 메일이 올까, 안절부절 못하고 기다리면 정말 아무것도 못하니까.

그런데 어제 오전 메일을 확인하는데 낯선 이름의 메일이 있었다. 그냥 지나갔다가 나중에 확인하니 선생님 친구인데 다친 손으로 인해 메일을 쓸 수 없으니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면 전화를 주신다고. 으핫! 번호를 보내고 핸드폰과 조금도 떨어지지 않은 채 지내다 저녁이 되었고 낯선 번호가 떴다. 순간, 왔구나, 했다.

지난 금요일, 그러니까 “성별문제 그 이후” 마지막 강의를 안 간 것이 문제였다. 선생님은 바빴고 그래서 언제 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었는데, 그날 밤, 집에 가는 길에 버스에서 읽기 시작했다가 다 읽으셨다고, 그래서 금요일에 (루인이 항상 일찍 갔으니 그날도 일찍 오면 강의 시작 전까지 해서) 논평을 해주려고 했다는 말과 함께, 너무도 소중한 논평을 들었다.

(20분이 넘는 시간을 통화한 내용을)거칠게 요약하면
1. 읽다가 버스를 세 번이나 내릴 곳을 지나쳤다. 기뻤다.
2. 인용한 저자들과 루인 사이의 긴장이 없다.

부끄럽지만 2번과 관련한 논평을 듣고서야 “아!” 하고 깨닫는 것이 있었다. 글의 무엇이 문제인지 조금씩 보였고 그래서 기쁨이 밀려왔고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몸은 기쁨 그리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현재의 위치를 조금은 더듬을 수 있음.

그것이 아플 줄이야

스스로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믿고 있었나보다. 그래서 아프다고 무겁다고 느끼고 있다.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지식자랑 하는 것과 그것을 통해 변태하고 자신의 위치를 이동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여러 번 느꼈고, 그것과 관련해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럼에도 기말 논문을 쓰며 글의 흐름과 ‘논리’적인 설득력이 있다면, 사람들이 수긍할 것이며 자신의 위치를 바꿀 것이라고 믿었나보다.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아닌 척 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란 말은 그렇게 변했나보다.

한 선생님의 혐오 아닌 듯 혐오인 듯한 발화에 아무렇지 않다고 느꼈다. 분명 당시엔 그랬다. 그래서 곧 만나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나보다. 그것이 지금까지 몸을 무겁게 하고 있다. 다시 연락하기가 망설여지고 있다. 글을 통해서 말하고 있던, 비판하고 있던 바로 그 지점으로 선생님은 말을 했었다.

글을 쓴다는 건 무엇일까. 글쓰기 자체를 회의하진 않는다. 목소리를 찾는 유일한 길이기도 한 글을 어떻게 회의할까. 다만 다시 한 번, 지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과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이동하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의 차이를 실감하고 있다. 매 순간 아프게 겪는 일이다.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선 트랜스나 이반queer를 말하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질문하지는 않는 방식들. 물론 그 선생님은 지식으로 동원하진 않았다. 아픈 건 글로 소통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는 것이고, 더 아픈 건 글로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몸이 무겁다.

타격

어제 오후 혹은 초저녁 두려운 몸으로 기다리던 성적을 확인하고 타격을 받았다. 기대했던 점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 성적을 잘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은 다른 맥락에 있는 루인이기에 [Run To 루인]에 글을 쓸 엄두도 안 났다.

농담처럼 혼자서 떠올리는 말 중에 하나는, 부산집에 가서 ‘이성애’혈연가족을 만나면 1초 반갑고 그 후론 스트레스의 연속이란 것. 얼마간의 과장은 있을지 몰라도 그건 사실에 가깝다. 대학입학하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좋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이성애’혈연가족과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고 부산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가려고 한 것도 집에서 떠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

예전에 코끼리와 벼룩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스스로 자기 한계를 설정해서 더 이상 뛰어오르지 못하는 몸 아픈 이야기. 그건 루인의 이야기였다. 자기 한계를 설정하기도 전에 이미 결정 되어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Run To 루인]에 오는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려나. 혹은 오프라인으로만 아는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려나. 어제 친구와 얘기를 나눴을 때,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예상 밖의 상황.

어릴 때부터 ‘이성애’혈연가족과 생활하며 가장 많이들은 말은 “니가?”였다. 후후. “너 같은 게 할 수 있겠니?”의 줄임말. 푸훗. 무얼 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의 반응. 주변의 누군가의 칭찬이 없으면 잘한다는 얘길 들을 일도 없었다. 고등학생 때, 그나마 수학이 재미있어서 덤으로 수학 성적이 좋았는데, 그것도 수학담당이었던 담임이 자기보다 잘한다는 허풍 섞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래, 그나마 수학은 잘 하는구나”란 얘길 들을 수 있었다. (이런 풍경은 한국의 무슨 일이든 외국에서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국에서 “인정”해야만 그제야 좋아하고 “진짜”로 믿는 모습.)

뭐, 이런 경험들이 별일 아닐 거라고 믿었다. 어느 날 가슴 아픈 깨달음을 겪기 전 까지는. 어느 날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는 구나, 다른 사람의 말을 공치사로 듣는구나, 하고. 누군가 루인의 어떤 점을 칭찬해주면 그걸 그냥 아는 사이니까 해주는 말이구나, 했다. 낯선 사람이 말하면 그냥 인사치레구나, 했고. 이 깨달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이건 단순히 자존감 없는 취약함의 자기 불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조차도 믿지 못하고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었다. 그것이 아팠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선물에 너무 좋으면서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려워한 이유기도 했다.

자학이라면 하루 종일 할 수 있지만 자기자랑이라곤 평생 못할 것 같았던 루인이 자뻑 모드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이런 깨달음 속에서 다른 식으로 방향을 모색해보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어제 기대했던 성적이 아님을 확인하고 취약한 기반이 무너지는 걸 느끼면서 다시금 되짚고 있다.

사실 그 성적, 기대했던 정도는 아니지만 예상했던 정도이긴 했다. 아니, 예상보다는 잘 나온 것일까. 어쩌면 그동안 경거망동했던 것에 대한 질책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타격에 어찌할지 몰라 우울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런 모색을 했다. 루인이 한참 부족한 건 루인이 더 잘 안다. 그럼에도 루인의 능력보다 더 많은 걸 기대했던 건, 루인은 최고의 칭찬에 안주하는 타입이 아니라 그것에 자극받아 더 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만할까봐 살짝 낮춰주는 선생님들이 있는데, 그럴 경우 루인은 좀 휘청거리는 편이다. 그럼에도 오만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몸을 타고 돌았다.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도 한참 부족하면서도 오만함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자중모드? 아니다. 더 신나게 놀면 된다. 아직 부족한 지점을 지적 받은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