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라스 샌더스: LGBT인권

더글라스 샌더스 교수 초청 강연회
LGBT인권: UN과 아시아국가 법정에서의 투쟁 (LGBT Rights: Fights at the UN and in Asian courts)

일 시 : 2006년 6월 2일(금요일) PM 7:00
장 소 : 서울iSHAP센타
주 최 : 퀴어문화축제 기획단
주 관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후 원 : 아름다운 재단 공익변호사모임 [공감]

흥미로운 자리였다. 두 가지 의미로.

우선, 번역과 통역을 다시 고민한 자리였다.

영어를 잘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작년, 고려대의 생활도서관과 임지현씨가 인터뷰를 한 책을 읽다, 대학원생들이 토익이나 토플 점수는 높은데 영어논문을 읽으면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한다고 비판한 내용이 흥미롭게 다가왔었다. 영어 책 한 페이지를 읽는데 한 시간은 걸리고 단어와 문법을 잘 몰라 헤매던 당시의 루인에게 그 말은 의외였고 흥미로움이었다. 이후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체감할 기회를 가졌고 그래서 영어회화를 잘 하거나 단어를 많이 ‘안다’는 것이 곧 글을 읽고 해석(번역의 의미가 아닌)할 수 있는 의미가 아님을 느끼며, 재미있었다.

어제의 자리가 그런 자리였다. 통역하는 사람은 영어는 잘하지만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 그래서 때론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 그게 아니라고, 지적하며 다시 통역하기도 했다.

무척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어떤 지식이 독점이 아닌 순간, 더 이상 권력으로 작동할 수 없음을 생생하게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련해선 이 글을] 뭐, 그래도, 간신히 몇 개의 단어를 알아듣는 수준의 루인으로선 그 나마의 통역이라도 고마웠다.
([Run To 루인]에 올 리 없지만, 수고하셨어요.)

또 다른 흥미로움은, 지역적인 것의 전지구적인 상황이다. 영국에서의 판례가 홍콩에 영향을 미치고 짐바브웨이의 판례와 호주의 판례가 한국에 영향을 미치고, 피지의 판례와 일본의 판례가 한국에 영향을 미치고… 이런 식으로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 외국의 판례들이 한국에서 법을 제정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는 건, 운동이 특정 국가의 경계에 한정해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지역마다 맥락이 있기에 어떤 식으로 해석할 것인가의 논쟁이 발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의 트랜스/이반queer 혐오범죄가 결코 그곳에만 국한한, 한국의 트랜스/이반에겐 무관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웃겼던 건, 인권위가 이반들 관련 법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단체들의 논리적인 근거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외국에 그런 판례가 있느냐를 요구했다는 것. “인권은 보편적 당위”라는 식의 언설이 코미디가 되는 순간이다. 법제화를 위해선 그것이 “보편적 당위”라거나 설득력 있는 논리가 아니라 그저 “남”들도 그렇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다.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인권위 소개글에 보면

라고 적혀있는데, 이 말이 무색한 순간이다.

끝나고 나오는 길에, 예전에 베지투스 모임에 갔다가 만났던 분을 만났다. 대충 누군지는 떠올랐다. 그 분이 시간이 괜찮으면 게이바에 갈 건데 같이 안 가겠느냐고 물어 잠시 고민했다. 미국의 교수가 한국 ‘게이’들의 밤문화를 알고 싶어서 간다면서,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동인연 사람들도 온다고. 하지만 시간은 밤10시였고, 그 시간이면 루인으로선 심리적 통금시간이다-_-;; 흐흐. 재밌는 건, 왜 게이바는 젠더에 상관없이 가는데 레즈비언바는 특정 젠더만 갈 수 있을까, 이다. 물론 이 맥락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아, 그래서 시간이 저녁이었으면 갔을까? 글쎄다. 바든, 클럽이든 음악 소리 크고 담배 냄새나고 술 마시는 공간은 별로인 루인으로선 저녁이라도 거절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아무튼, 그렇게 어제는 흐르고 있다.

기고: 고마워요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언어]란 글을 한 매체에 기고했다. 독자투고를 받는다는 포스터(?)를 읽는 순간, 하고 싶었다. 마침 아는 사람()이 편집장으로 있어서 신뢰를 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곳에 올라온 그대로는 아니고 다시 한 번 고치고 영화 정보를 보태는 수준으로 편집해서 보냈다.

사실, 출판매체에 글을 쓴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학년 때, 학내 신문에 (원고료에 매혹하여) 글을 쓴 적도 있고, 작년에는 꽤나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는 매체에 청탁으로 글을 싣기도 했다. 루인이 유명한 사람일리는 없으니 당연히, 청탁한 사람이 루인과 아는 사람이었다-_-크크크. 하지만 후자의 경우, 결과가 꽤나 실망스러웠다. 교정 과정에서 루인이 쓰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고 하지도 않은 얘기로 각색한-교정한 사람 혹은 매체의 입맛에 맞춰 바꿔버렸기에 매우 불쾌했던 흔적이 몸에 있다. (다행히도 루인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글을 실었다.)

이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많이 수줍고 부끄러웠다. 거의 충동이라고 할 만큼 갑작스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글을 믿은 것이 아니라 편집장을 믿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까? 원고료가 탐난 것도 아니고 청탁 받은 것도 아니고 잘 쓴 글도 아니다. 그냥 출판매체 혹은 종이매체에 글을 싣고 싶었다. 단지 그 충동 하나였다.

어제 책이 나왔고 오늘 책을 챙겼다. 읽으며 교정이 거의 없는(오탈자 정도 교정했다고 들었다) 내용으로 실려 있었다. 꺄악~~ >_< 부끄러워~~-_-;; 푸훗. 대체로 만족스럽다. 하지만 무엇이 만족스럽다는 의미일까? 디자인이? 루인의 목소리가 편집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마, 후자일 테다. 일전의 기억이 상당히 안 좋게 남아 있기에 후자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몸의 흔적과는 무관하게 대체로 만족이다. 루인에게 절대적인 혹은 완전한 만족이란 없으니, 혹자의 표현처럼, 이 표현이 가장 좋은 표현인지도 모른다. 혼자서 부끄러울 뿐이다.

고마워요… 수고하셨고요^^

#판매하는 매체도 아니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매체도 아니기에 이름을 말해봐야… 크크;;;;;;;;;;;;;;; (아무도 관심 없는데 혼자서 오바하는 순간-_-;;;;;)

빨간 악몽

트랙백: 애드키드님의 “빨간 물결의 공포

적어도 2002년 5월까지는 빨간 색 옷을 종종 입는 편이었다. 파스텔 톤의 옷 보다는 선명한 색깔의 옷이 잘 어울리기 때문에, 빨간 색 옷은 선호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옷장에 한 두 벌 정도는 있는 그런 옷이었다. 딱 2002년 5월까지.

그런 경험도 있다. 당시 한 수업 시간, 컴퓨터 관련 수업이었고 별다른 재미를 못 느끼고 있는 수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수가 뜬금없이 “어이, 빨간 색”이라며 루인을 지칭했다. 빨간 색 옷이 그 교수에겐 못마땅했다. 그날 그 교수는 루인이 꽤나 불쾌할 법한 얘기와 함께 몇 번이고 “빨간 색”이라고 불렀다. 소심한 루인은 그날은 조용히 있었지만 그 날 이후, 그 수업시간이 있는 날은 챙겨서 빨간 색 옷을 입었다. 물론 교수는 질린 표정으로 그 날 이후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그렇게 지내던 그 해, 6월 어느 날 사람들이 갑자기 빨간 색 옷을 입고 왔다. 한 두 명이면 몰라도 수십 명이 넘게. 다른 사람이 뭘 입든 (루인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 이상) 무관심하지만 이렇게 집단적으로 제복 마냥 입고 온다면 거슬리지 않을 수 없다.

몰랐다. 며칠이 지나서야 우연히 안 사실-월드컵 응원복이 빨간 색이란 것. 사실 그 해 6월, 월드컵을 하는 줄도 잘 몰랐고 한국의 경기가 언제인지는 더더욱 몰랐다. 하지만 모를 수 없게 되었다.

축구를 하든 말든 응원을 하든 말든 루인으로선 상관할 바 아니다. 하면 하는 거지 무슨 상관이람. 운동은 고등학교 체력장을 끝으로 끝이었다. 체육시간엔 어지간하면 광합성을 했었다([시모츠마 이야기](한국에서의 제목은 [불량공주 모모코])에서 모모코의 행동에 엄청 공감했다, 흐흐). 운동이나 스포츠 자체에 무관심하거니와 루인의 생활방식 특성상 뭘 하든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응원전 ‘덕분’에 그럴 수 없었다.

무슨 경기였는지 모르지만 6월 어느 날, 하이퍼텍 나다에서 영화를 보고 나온 길, 거리는 한산했다. 저녁 시간이었고 그 시간이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붐빌 시간인데 그 날, 유난히 한산해서 좋았다. 이 좋음은 얼마 안 가, 엄청난 스트레스로 바뀌었다.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을 갔을까, 갑자기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음에도) 빨간 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지하철 안이 빨간 색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을 때의 끔찍함이라니. 사실 이 끔찍함은 루인의 반응-그들의 함성과 응원을 완전히 무시하고 종종짜증을 내는 루인의 반응에 주변 사람들은 삭막하고 살벌함을 느꼈을 때, 정점에 이른다. 이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다. 집단 광기에 동참하지 않을 때,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몸 깊숙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몸의 흔적이 있다. 이른바 진보라고 나대는 인터넷매체가 이른바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부르는 미군 장갑차 사건을 월드컵이 끝날 때까지 철저히 무시했음을. 그 정도면 상관없지만 이런 무시에 화가 나서 항의 메일을 보냈을 때, 그 매체는 첫 화면으로 “월드컵 땐 죽지도 맙시다”란 글귀와 함께 장례식장에서 월드컵을 응원하는 사진을 실었다. 그 사진은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이른바 “진보”든 “반미”든 “민족주의”든 뭐든, 제 편의에 따른 구분이며 정치성일 뿐임을 그때 느꼈다. “민족주의”? “반미”? 웃기는 소리다. 그 잘난 “진보”매체에게, 제 흥을 깨는 일은 뒷전이었다.

요즘 월드컵이 다가오나 보다. 오든가 말든가. 하지만 슬슬 짜증나기 시작한다. 루인의 불만은 간단한데, 왜 원치 않는 사람까지도 이런 소식을 접해야 하고, 왜 “모든 국민”이란 식으로 도매금 하느냐, 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라디오를 켜면 가장 먼저 듣는 소식은 월드컵과 축구다. 그날 경기가 있고 전날 경기라도 했으면, 라디오 뉴스의 반 이상이 관련 소식이다. 스포츠뉴스야? 밤 9시 뉴스도 마찬가지다. 계속해서 축구 소식만 전한다. 그리면서 덧붙인다. “전 국민의 …” 라고. 루인은 바로 이런 지점이 폭력이라고 느낀다. 원하지도 않는데 강제로 정보를 주입하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의 범주로 소환하는 것.

원하는 정보를 듣기 위해 원하지 않는 정보에 과다하게 노출되는 거, 이거 폭력 아냐? 도대체 이른바 스팸메일이나 스팸문자와 뭐가 달라? 월드컵이나 축구 응원은 “전 국민의”, “민족적인” 운운 하지만 그것도 웃긴다. “민족”이라고? 그 “민족”의 구성원은 누군데? 평소엔 그렇게 “반미” 운운하며 소리치다가도 월드컵 기간엔 “죽지 말자”고 말할 때, “민족”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누가 “민족구성원”이고 어떤 목적에서 “민족”으로 호출하는지.

아침에도 축구 소식을 잔뜩 들었다. 짜증. 사실 이 글만 아니었어도 잊었을 테다. 원치 않는 소식은 곧 바로 흘리기 때문이다. 라디오도 끄고 살아야 하나? 수업 준비를 하며 바쁜 일정에 루인이 접하는 세상 밖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어 듣는 라디오다. 그날그날 일기예보를 듣기 위한 라디오기도 하고. 하지만 6월 한 달, 끄고 살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해야겠다.

종종, 붉은 악마는 정말 “악마”라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