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훅스

지난 수요일 세미나를 위한 예습? 논평? 뭐 그런 성격으로 쓴 글. 벨 훅스bell hooks의 [Feminist Theory] 중 “Black Feminism – Shaping Feminist Theory”을 읽고 쓴 글. 그냥 심심하시면 읽으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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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 hooks Feminist Theory(1984/2000)
“Black Feminism – Shaping Feminist Theory”

영어 읽기 세미나
2006.07.12. 루인 논평

이제는 다소 진부할 수도 있는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땐 너무도 신선했고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이건, 기말논문에도 썼지만, 생애사적 맥락 때문이다. 2004년 여성학을 처음 배우며 학부 수업을 매개로 한 텍스트나 여성학 지식과 루인의 맥락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극, 괴리, 갈등을 모색하는 와중에, 벨 훅스를 읽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렇게 2005년부터 놀기 시작했던가.

기말논문을 쓰면서 인용과 참고문헌의 지도를 짜며 루인의 위치를 더듬을 때, 두 명이 가장 컸는데, 정희진 선생님과 벨 훅스였다. 지금의 루인에게 이 둘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만 사실 가장 큰 벽(한계)으로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이론 사이에 일정한 선을 그으려고 하면서도 항상 주류 페미니즘의 한계를 비판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비판과 비난이 분명 다름에도 망설임은, 벨 훅스의 지적처럼 페미니즘을 특정 모습으로 고착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동반한다.

벨 훅스의 글이 아닌 어딘가에서 “고통은 측정할 수 없고 비교할 수도 없다”(p.4)란 문장을 읽고 수긍했었다. 지금도 한 편으론 수긍한다. 문제는 이런 인식이 여러 경계그물(border-webs)이 얽혀 있는 위치를 단선적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고통이 때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는 기반에 있으면서도(벨 훅스 논의로는 흑인 “여성”의 노동/착취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백인 중산층 “여성”의 안락과 우울, 루인 식으로는 젠더를 전유하여 ‘효과로서의 젠더’gendered만을 말하면서 그것을 젠더 정치학으로 말하며 트랜스/젠더, 젠더퀴어들을 배제하고 공포로서 혐오하는 것) 이것을 말하지 않고 덮어버린다는 점이다.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중요 출발점인 베티 프리단의 표현으로 중산층의 “안락”에서 오는 우울, 연봉 3억인 파트너를 둔 사람의 빈곤(감)이 연봉 7~800만원인 비혼자의 빈곤(감)보다 클 수도 있지만, 이것을 “우리는 똑같이 빈곤하다”는 식으로 말하며 ‘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또한 연봉 700~800만원인 (모든) 사람은 빈곤(감)을 느낄 것이라는 가정 자체가 이미 계급차별적인 인식이며 오히려 연봉 2,000~3,000만원인 사람이 더 심한 빈곤을 느낄 수도 있다. 벨 훅스의 비판은 이렇게 얽혀 있는 그물들을 정치하게 보자는 것이며 “고통을 측정할 수 없다”는 말이 ‘배부른’ 얘기란 의미는 아니다.

벨 훅스가 집요하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신이 사용하는 페미니즘은 어떤 위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언어인가이다.(주 1) 이런 맥락에서 우머니즘womanism을 비판하는데 그것의 의의와는 별도로 페미니즘을 고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이유에서다. 벨 훅스는 기본적으로 모든 언어를 고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맥락에 따라 유동적인 것으로 해석하기에 페미니즘 역시 어떤 맥락으로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이 중산층 백인 중심의 언어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이며 벨 훅스의 배경/위치-미국 남부의 인종분리 지역에서 자랐고 하층계급의 흑인이란 위치에선 페미니즘을 ‘다르게’ 경험했다. 바로 이 지점이 벨 훅스 논의의 또 다른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이 한계로 작동하기도 하는데, 가끔씩 흑인“여성”을 단일하게 간주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흑인“여성” 내부의 경계들-계급, 종교, 젠더gender, ‘장애’/비‘장애’, 성적 지향성 등을 별로 다루지 않거나 별도로 다룬다는 점에서 문제를 드러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벨 훅스 자신이 이런 위치로서의 말하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젠더 정치학을 모색하며 가장 어려웠던 것은 기존의 언어에 몸을 맞출 것인가, 자신의 경험맥락으로 언어를 재구성/탈구성할 것인가 하는 갈등에서의 분열이었다. 남이 하는 말/해석을 믿을 것인가 자기 몸의 욕망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자기 몸의 욕망은 언제나 병적인 것, 일탈, 정신병으로 간주하는 사회제도에 있기 때문에)이기도 한 이 지점은 벨 훅스의 문제제기, 당신이 말하는 그 언어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에서 출발할 때 비로소 고정적이지 않은, 경계그물에서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언어로 재구성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이 백인 혹은 중산층 중심이었다면 그건 유색인(주 2) 혹은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무식”해서 혹은 “계몽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참여하지만 ‘특별히 끼워준 것’(다른 맥락에서 이런 느낌을 자주 받는다)이거나 사용하는 언어가 백인 중산층 중심으로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려고 해도 배제하거나 배타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에서 벨 훅스는 지식으로 알 것이 아니라 변태할 것을 요구한다. 지식으로서 인종차별주의를 알고 계급차별주의를 알고 이성애주의를 알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바꾸는 사람은 드물다. 버틀러를 안다고, 트랜스젠더도 있고 동성애도 있고 수염을 기르는 “여성”도 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시스-‘이성애’ 경험을 중심으로 말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만날 때마다 불편함을 느낀다(다른 경계그물에 있을 때의 루인 역시 이런 지식자랑에서 자유롭지 않다). “여러 분 주변엔 없겠지만 동성애 문제도 있죠”란 발화들, 글을 쓸 땐 젠더퀴어들의 얘기를 쉽게 하지만 만나는 사람은 모두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판단하는 젠더환원주의의 경험들은, 변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이 장을 읽으며, 이런 얘기들을 하면 재밌겠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배웠던 여성학 혹은 페미니즘의 언어가 반드시 자신의 맥락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때, 분명 막혔던 호흡을 열어주는 쾌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불편함을 느낀다면, 바로 그 불편함이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주 1. 첫 번째 책인 Ain’t I A Woman에 훅스는, 주변의 친구들이 어떻게 인종차별적이고 백인우월적인 페미니스트란 명명을 자신에게 사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인종차별주의자면서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명명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는 인종차별주의자는 페미니스트일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신이 의미하는 페미니즘/페미니스트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주 2. 유색인이란 표현은 백인을 투명한 위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백인을 제국주의 권력관계의 한 지점으로 상대화하는 행위다(체리 모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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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누가 루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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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듣고 있는 여이연 여름 강좌의 하나는 “처음 만나는 정신분석2”. 어제의 주제는 강박증. 그리고 흥미로운 얘기는 연애.

“연애는 어렸을 때 부모와의 관계를 반복함으로써 그 관계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행위”라는 얘기였다. 일테면, 양육자(이른바 “정상”가족이란 강박에선 부모를 의미하지만 꼭 부모와의 관계에서만 지내는 것은 아니니까) 중 바람 피는 사람이 있을 때, 대체로 “나는 절대로 바람 피는 사람과는 만나지 않을 거야”라는 다짐을 하지만 결혼할 때 보면 바람둥이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결국 바람 필 걸 알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상처였던 관계를 다시 반복 하되 상대방이 바람 피지 않게 하여 어릴 때의 상처를 치유 받고자 함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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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했던 말. 왜 연애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누가 루인 따위를 좋아하겠느냐”고 답했었다. 루인의 의도는 그랬다. 별 보잘 것 없는 루인을(이건 자학이 아니라 나름 냉정한 평가. 후후.) 누가 좋아하겠느냐란 의미와 루인은 누굴 좋아해도 먼저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와 별 관심이 없다는 의미들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들은 얘기.

한 사람이 해준 말. 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상당한 소외를 느꼈다고 했다. “연애 안 할 거니 좋아하지도 마!”란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란다. 몰랐지만 그런 의미도 숨어있었음을, 그때 알았다.

이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지만, 현재 목표는 석사논문을 쓸 때까지는 연애를 하지 않을 예정. 물론 이렇게 말하고서 내일 이곳에 결혼 발표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세상 일 어떻게 돌아갈지 쉽게 단언할 수 없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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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밥 먹는 걸 싫어하거나 우울해 하고 그래서 혼자서는 절대 밥을 먹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해하지 못하는 루인을 느낀다. 예전에 한 사람과 길에서 나눴던 얘기.

지인: 어디 가요?
루인: 밥 먹으러 가요.
지인: 혼자서요?
루인: 루인이랑 먹어요.

이 대화의 결론은? 어쩌면 그렇게 혼자 밥 먹는 일을 당연하게 말할 수 있느냐는 지인의 부러움. 하지만 이건 부럽고 안 부럽고의 문제가 아니라 강박적으로 혼자 먹는 건 우울한, 외톨이인, 뭐 이런 식으로 간주하는 시선의 문제일 뿐이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혼자 밥 먹는 거, 즐거운 일이다.

영화 볼 때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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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다한 얘기가 있는데 잊었거나 잊고 싶어 하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억누르고 있다.

캐리비안의 해적

2006.07.09.(일) 아트레온 20:20, 2관 3층 D-17 :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
(+ 어둠의 경로: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

은유나 비유는 기본적으로 약속에 바탕하고 있다. 평화와 아무런 상관없는 비둘기지만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고 한때 빨간색은 “빨갱이” 곧 친북이나 북한을 상징했다. 이런 상징은 실재의 존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비유나 은유의 대상으로 자리하는 순간 고정적이고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때 “배신감”을 느끼거나 당황한다.

유머도 마찬가지라서 공통의 합의 없인 웃기 힘들다. 외국 영화에서 나타나는 코미디를 한국에선 왜 웃는지 알 수 없는 경우는 그래서다. [노스 컨츄리]란 영화는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을 다루고 있는 영화지만 그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직장 상사를 비웃으며 “호모”라고 ‘동성애’ 혐오/공포발화를 유머랍시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루인은 이 영화에 좋은 감정을 가지기 힘들다. 트랜스 영화인데 채식을 (계급의 맥락과 상관없이)비난하거나 이반/퀴어queer영화인데 트랜스혐오를 드러내거나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영화들을 좋은 감정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도 마찬가지다.

[캐리비안의 해적]을 보겠다고 한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반지의 제왕]을 보다 좋아하게 된 올랜도 블룸가 나온다는 이유 하나에서였다. 그리고 [캐리비안의 해적]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조니 뎁이 아니라 올랜도 블룸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참 재미없다. 1편에서의 블룸은 너무 ‘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망자의 함]을 보기 위해 본 [블랙펄의 저주]는 딱히 누군가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더라도 재미있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그저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는다는 기분으로 예매했을 따름.

영화를 보며, 느낀 점은, 아시아 혹은 제 3세계를 야만, 원시, 미개로 그리는 것에의 불편함, 불쾌함과 ‘엉성한’ 스토리의 지루함이었다.

#이제부터 스포일러 가득할 듯.

부족들이 나오는 장면은 “미지의 아시아(혹은 아프리카) 종족”에 대한 서구제국주의 시선의 전형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식인 풍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없어도 되지만 그나마 가장 재밌게 하려고 만든 장면이며 보는 내내 불편했던 장면이다. 이런 시선은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오는 보너스장면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영화는 영국-동인도회사와 해적 간의 다툼을 인도/아시아에서 치루는, 인도/아시아를 대리전쟁터로 여기고 있으며 좀 오버해서(과도하게 오버해서) 해석하면 식민지제국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혐의를 드러낸다(이런 느낌은 이와 관련한 해석의 맥락이 있어서이다).

‘플라잉 더치맨’의 데비 존스의 모습과 그 배는,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에, 특히 데비 존스가 배에서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순간적으로 다른 영화를 보고 있나 싶을 정도로 진부. 뭐, 이를 재현한 기술력을 칭찬하자면 그럴 수 있겠지만, 특수 분장이나 CG를 공부하지 않고 있는 입장에서 그런 기술력을 ‘당연시’하는 루인으로선 기술력이 얼마나 뛰어나냐가 아니라 기발함 혹은 이야기 전개를 더 중시하는 편이다. (전개가 엉성하더라도 기발함에 더 비중을 두는 편이기도 하고.) 이럴 때, 이 영화, 좀 지루했다. 올랜도 블룸 보다는 조니 뎁이 더 매력적으로 나오고 집시 캐릭터(이름이;;;;;;;;;;;;;;)가 괜찮았다.

어쩌면 단지 루인의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지루했을 지도 모른다. 이른바 (한국형)블록버스터라고 불리는 영화 중에 재미있다고 느낀 영화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청연]도 블록버스터라고 할 때, 비교하자면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쟁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