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가족이라는 배제의 폭력

수업 예습에세이로 4월 4일에 쓴 글. 일종의 리뷰와 같은 성격이지요.
이재경씨의 논문은 여기로라고 하고 싶지만 알아서 찾으세요. 자꾸 깨지네요. 힛.
5월 2일까지 네 편의 소논문을 써야하는 상황이라 좋으면서도 조급한 몸인 상태.
어제 즐긴 영화 리뷰는 내일로. 흑흑.

1. 이재경 <한국 가족은 ‘위기’인가?: ‘건강가정’ 담론에 대한 비판>
― ‘정상’가족이라는 배제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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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수업 시간에 “가족”에 대해 배우면서 독신은 가족이 아니라 가구란 얘길 듣고 당황했다. 비록 자취란 형식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가족으로 부르고 있었기에 독신 혹은 혼자 사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 가구라고 표현한다는 말은 기존의 가족개념을 어떤 식으로 구성하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이후, 이른바 “건강가족법”이란 것이 생긴다는 얘길 들었을 땐, 경악했다. ‘건강’가족이라고? 그렇다면 루인은 “병든” 가족이란 얘기야? 비록, 기존의 이성애혈연가족주의에서 겪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이 분위기를 겪으며 가족제도를 비판하고 독신‘가족’으로 살고 있지만 동시에 트랜스/이반(정체성)으로서 가족 구성권은 쟁취할 권리이기도 하다. 이런 루인의 경험에서 ‘건강가족(법)’이란 의미는 뭘까.

(학부 시절 수학을 전공하며) 모든 정의(定義, definition)는 승인과 배제 그리고 고착시키려는 욕망의 표현이라고 느꼈다. 정의한다는 건, 경계를 만들고 그리하여 사회에서 ‘승인’하려는 범주와 그렇지 않은 ‘비정상’적인 범주를 나누는 행위이며 법제화는 이런 욕망을 명문화 한 것이라고 의심한다. “건강가정기본법”이라는 것 역시 이런 정의/법제화의 구조에서 그렇게 벗어나 있지 않다. ‘건강가정’/‘건강가족’이라는 표현 속에 이미 어떤 특정한 형태의 가족구성만을 ‘정상’적인 형태로 간주하고 그렇지 않은 구성은 ‘건강’하지 않은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때, 어떤 형태를 ‘건강’하다고 말할 것인가와 이렇게 정의(배제)할 수 있는 권력은 누가 가지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누가 무슨 권력으로, 그리고 왜 무슨 이유로 특정 가족 형태만을 ‘건강’하다고 명명하고 이를 통해 그런 가족구성에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가족’ 형태를 배제하려는 이유는 뭘까. 이런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해서 지속하는 걸까.
‘현실’적으로 별로 존재하지 않지만 “당연”히 절대 다수라고 착각하는 이성애혈연가족 외에도 무수한 가족 구성이 존재한다. “가족해체”를 우려하는 언설들은 이렇게 이데올로기/판타지로서의 가족형태와는 다른 구성을 가족이 아니라 ‘결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결손가정문제”, “편부모 가정에서의 비행청소년 문제”등과 같은 인식들은, 한부모 가족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겐 문제가 있을 거란 주변의 시선-정상가족이데올로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임에도(즉, 이른바 “건강가족”이 문제의 원인임에도) 해결방안으로 제시하는 오류에서 생기는 “문제”며 인식이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결혼하고 살기 위해선 맞벌이가 필수이고 이로 인해 때로 “주말부부”나 “기러기 가족”이 생기는 건 ‘필연’이지만 “건강가족(법)”은 이런 경제적이고 계급적인 문제를 무시하는, 가족이 모여 살수 있는 특정 계층만을 감안하며 동시에 그 계층적 특성을 ‘보편적 기준’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혼자 사는 독신가족은 가족이 아니라 가구라고 표현해야 한다는 언설은, 잠깐 혼자 떨어져 살고 있을 뿐 결국 “돌아갈” ‘진짜’ 가족은 따로 있으며 혼자 사는 사람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건강가족법”은 그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동성 간의 결혼은 인정할 수 없다”고 법으로 선언하고, 트랜스는 사실 상 결혼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며, “장애인이 왜 결혼하려고 하느냐”고 말하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사람은 가족을 구성해야 한다는 건강가정 기본법의 법조항 제8조1항(주1)의 인식은 모든 사람이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주2)할 뿐 아니라 이런 질문 자체를 은폐/배제하(려)는 논리다. ‘이성애’ 비‘장애’인의 경험만을 반영하며 현재의 “가족 문제”의 원인을 해결로 제시하려고 할 때, “가족 해체”는 더 심해질 뿐이다.

주1: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여야 한다”가 그 내용이다.
주2: “모든 국민은 가족을 구성해야 한다”는 모든 사람은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성립할 수 있다고 느낀다._M#]

분노의 사진/흉터/부치 미스티끄

제 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14.14:00 아트레온 4관 F-7, [분노의 사진/흉터/부치 미스티끄]

세 편의 영화를 같이 즐길 경우 생기는 문제는, 특히 루인 같은 인간일 경우 한 편의 영화에 열광해서 다른 작품의 내용을 잊어버린다는 것.

#[분노의 사진]
시각 이미지는 문자보다 그 효과가 더 빠른 편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평가는 특정 누군가의 경험만을 반영하는데 루인에게 이미지를 통한 효과는 문자만큼이나 혹은 문자보다 더 느리다. 아무튼 사진작가의 사진과 다큐멘터리는 이런 시각 효과를 이용한 흑인 ‘레즈비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나레이션 중에 “어떤 사람은 사진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 내용을 본다”와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다. 이 말이 와 닿았다. 어떤 사람에겐 신기한 볼거리거나 “문화적 충격”일 테지만 어떤 사람에겐 그 사람이 처한 맥락이 떠오를 것이다.

#[흉터]
인상적이었던 만큼이나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벌써 정리하기엔 아직 언어가 빈약하다.

#[부치 미스티끄]
이 다큐멘터리를 즐기다 바로 앞의 두 편을 거의 놓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광이란 말로 요약 가능.

젠더 혹은 ‘이성애’ 관계 바깥에 있는 이들이 ‘이성애’-젠더 구조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욕망과 ‘이성애’-젠더 구조가 요구하는 모습 사이에서 협상하는 것.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레즈비언’ 관계가 혐오범죄로부터 그나마 안전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부치”라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른바 ‘남성’스러운 모습을 선호하고 ‘여성’다운 모습을 싫어한다는 이미지. 거칠고 힘이 센 모습. 물론 이런 이미지/환상은 다른 모습을 지우는 폭력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인터뷰를 한 사람 중 한 명이 했던 말 “부치는 죽지 않는다. 다양해질 뿐이다.”라는 말에 열광했다. 아아, 너무 좋아!

또 다른 접근은 부치-‘레즈비언’과 트랜스와의 관계. 루인은 이 다큐를 즐기며 부치와 FTM(female to male)의 밀접한 관계를 느낌과 동시에 트랜스가 어떻게 이반queer이론의 범위 내에서만 묶이는지를 느꼈다. 부치와 트랜스’남성’의 경험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인터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트랜스이론을 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갔다는 얘기에서처럼, 둘의 관계는 밀접하다. 혹자는 둘 사이에 있어, 과거를 재현하는 방식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만큼이나 감독은 트랜스를 외면하고 있다. 읽기에 따라선 드랙 킹이나 트랜스로 읽을 지점들도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선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감독이 전제하고 있는 ‘레즈비언’은 어떤 ‘정체성’일까. 자신을 부치-‘여성’으로 말하는 사람은 부치라고 한 걸까? 그렇다면 ‘남성’으로 환원하지만 자신을 부치-‘여성’으로 말하는 사람은?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는 내내 이 지점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있다. 물론 내용을 전유하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트랜스와 트랜스이론이 기존의 다른 모순을 설명하는데 명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전유할 수 있다. 루인 역시 최근, 몇 명의 페미니스트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트랜스 이론으로 전유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작가들은 트랜스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지만 루인은 많은 아이디어와 가능성을 느꼈기에 맥락을 설명하며 모색의 방향을 욕망했다. 하지만, 마냥 전유하는 건, 문제가 있다. 앎의 배타적 경계를 세우는 것도 문제지만 탈맥락적으로 전유해서 마치 자신의 의견인양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니까.

뭐, 어쨌거나 다큐멘터리는 전체적으로 좋았다. 특히나 화장실 문제는 너무너무 열광. 이건 [메종 드 히미코]에서도 느낀 부분. 언젠가 한 편의 글로 쓰고 싶은 문제이기도 한데, 도대체 화장실에 갈 땐 어느 화장실에 가야할까? 치마를 입은 날은 ‘여자’화장실에, 바지를 입은 날은 ‘남자’화장실에 가야할까? 어릴 때부터 습관처럼 가던 곳에 가지만 언제나 불편하다. 그래서 종종 상상한다. 굳이 화장실을 젠더로 나눠야 할까? 다큐멘터리에선 부치 화장실을 따로 만들자고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커밍아웃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커밍아웃을 한 경우라면 혹은 했든 안 했든 상관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여전히 배제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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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영화제가 끝났다. 아쉬움과 함께 많은 자극으로 에로틱했던 시간이었다.

침묵에 대한 의문

제 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13.10:30 아트레온1관 2층W-7, [침묵에 대한 의문]

지난번에 쓴 [침묵에 대한 의문]의 후기는 여기서 참고.

너무 좋아서 다시 찾았다. 그리고 다시 열광했다. 이렇게 유쾌하다니.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묘한 ‘상처’가 생겼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일행에게 말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고. 같이 온 사람은 뭔가 열심히 설명했지만, 루인 앞을 지나가며 말했다. “배운 사람들이나 좋아하는 영화”라고. 이 말을 듣고 순간, 분개하고 ‘상처’로 다가왔지만 뭔가 들킨 것만 같은 느낌도 들었다.

영화는 언어를 질문하고 있고 침묵의 의미에 대해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하다보면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는데도 서로 다른 나라 말을 사용하고 있는 느낌이 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 지점을 말하고 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기에 사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별로 손해 볼 것 없다. 이때 저항자는 상대가 이해할 때까지 열심히 말해야 할까? 이 영화는 “아하하하하하”하며 소리 내어 웃으며 법정을 비웃는다(판사는 법정모독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이 유쾌한 지점이다.

그런데 루인 앞을 지나간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말했을까. “모른다는 것”, “배운 사람이나 좋아”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 영화가 페미니즘/여성학 혹은 이른바 “타자”로 불리는 이반queer/트랜스처럼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모색하며 책을 읽는 사람들이나 좋아할 영화일까. 고민 없음을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엘리트주의가 아닐까. 흔히 페미니즘과 여성학을 배운 사람들이나 알아들을 내용이라고 비판하지만, 정희진 선생님의 말처럼 페미니즘 언어를 접하며 쾌락에 빠지는 사람은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이른바 저학력 비정규직 “아줌마”들이다.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기존의 ‘이성애’ ‘남성’ 언어에 익숙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들이다. 채식(주의)자라고 루인의 위치를 밝혔을 때, “베지테리언도 여러 종류가 있지”라고 말하면서 아는 체 하는,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들보다 “베지테리언”이 무슨 말인지 몰라 “채소만 먹는 사람”으로 바꿔 말해야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관계 맺고 소통할 지를 한 번에 이해하는 식당 주인을 알고 있다. 대학 혹은 대학원 공부를 했다는 것이 “잘 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지나가듯 한 말에 분개했지만 묘하게, 들키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드러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엇이었을까. 지적 컴플렉스? 루인의 무식이 주는 열등감? 언어의 빈약함이 주는 갈증? 그 말을 듣고 내내 우울했다. 그 말을 듣고 분개하는 루인이 더 이상한 건 아닐 런지. 어쩌면 루인도 그 사람이 한 말과 비슷한 몸앓이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부정할 자신이 없다. 무엇일까.

어떤 사람의 말에 화를 낸다는 건, 상대의 폭력에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는 의미가 있는가 하면, 상대와 자신을 동일한 위치에 두는 탈맥락화의 과정 때문인 경우도 있다. 루인은 종종 말투가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라는 말을 듣고 글이 (인터넷 게시판 글쓰기의 기준에선) 길다는 얘길 듣는다. 물론 상대는 비난이나 비판하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다르다”는 느낌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한동안 열심히 해명하려고 애썼다. 이랑의 한 친구는 이와 비슷한 말을 듣고 화가 났었다고 한다. 화가 나진 않았지만 억울했고 상대가 한 말을 부정할 순 없지만 그래도 싫었다. 하지만, 나중에야 깨달았다. 글이 짧은 게 문제가 아니냐고. 루인은 시간 여유만 넉넉하다면 글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사용하는 문장이나 언어를 새로이 해석하거나 “해명”하는 작업들 때문이다. 글이든 말이든 하기 시작하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 만큼 루인에겐 기존의 언어를 그냥 사용하기엔 불편한 지점들이 너무도 많다는 의미다. 그렇기에 루인이 쓰는 글이 길어진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루인에게 글이 길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해명하려고 하는 건, 상대와 루인의 위치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루인은 지난 학기, 한 달 알바비 135,000원을 주는 학부 조교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한 달 용돈도 안 되는 비용이란 식으로 말한 것에 화가 났었다. 루인에게 이 돈은 중요한 생계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낼 필요가 있었을까. 자치하는 루인과 서울에 집이 있는 그와의 계급과 환경의 맥락이 다른데. 화를 낸다는 건, 그 사람과 루인의 위치가 같다고 가정해서다. 그런 반응은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여전히 그때그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의 말이 왜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 걸까. 무언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떤 지점이 들킨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