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격

어제 오후 혹은 초저녁 두려운 몸으로 기다리던 성적을 확인하고 타격을 받았다. 기대했던 점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 성적을 잘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은 다른 맥락에 있는 루인이기에 [Run To 루인]에 글을 쓸 엄두도 안 났다.

농담처럼 혼자서 떠올리는 말 중에 하나는, 부산집에 가서 ‘이성애’혈연가족을 만나면 1초 반갑고 그 후론 스트레스의 연속이란 것. 얼마간의 과장은 있을지 몰라도 그건 사실에 가깝다. 대학입학하고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좋았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이성애’혈연가족과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고 부산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가려고 한 것도 집에서 떠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하나.

예전에 코끼리와 벼룩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스스로 자기 한계를 설정해서 더 이상 뛰어오르지 못하는 몸 아픈 이야기. 그건 루인의 이야기였다. 자기 한계를 설정하기도 전에 이미 결정 되어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Run To 루인]에 오는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려나. 혹은 오프라인으로만 아는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려나. 어제 친구와 얘기를 나눴을 때, 친구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예상 밖의 상황.

어릴 때부터 ‘이성애’혈연가족과 생활하며 가장 많이들은 말은 “니가?”였다. 후후. “너 같은 게 할 수 있겠니?”의 줄임말. 푸훗. 무얼 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의 반응. 주변의 누군가의 칭찬이 없으면 잘한다는 얘길 들을 일도 없었다. 고등학생 때, 그나마 수학이 재미있어서 덤으로 수학 성적이 좋았는데, 그것도 수학담당이었던 담임이 자기보다 잘한다는 허풍 섞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래, 그나마 수학은 잘 하는구나”란 얘길 들을 수 있었다. (이런 풍경은 한국의 무슨 일이든 외국에서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외국에서 “인정”해야만 그제야 좋아하고 “진짜”로 믿는 모습.)

뭐, 이런 경험들이 별일 아닐 거라고 믿었다. 어느 날 가슴 아픈 깨달음을 겪기 전 까지는. 어느 날 깨달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는 구나, 다른 사람의 말을 공치사로 듣는구나, 하고. 누군가 루인의 어떤 점을 칭찬해주면 그걸 그냥 아는 사이니까 해주는 말이구나, 했다. 낯선 사람이 말하면 그냥 인사치레구나, 했고. 이 깨달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이건 단순히 자존감 없는 취약함의 자기 불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조차도 믿지 못하고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었다. 그것이 아팠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선물에 너무 좋으면서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려워한 이유기도 했다.

자학이라면 하루 종일 할 수 있지만 자기자랑이라곤 평생 못할 것 같았던 루인이 자뻑 모드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이런 깨달음 속에서 다른 식으로 방향을 모색해보려는 노력이었다. 하지만 어제 기대했던 성적이 아님을 확인하고 취약한 기반이 무너지는 걸 느끼면서 다시금 되짚고 있다.

사실 그 성적, 기대했던 정도는 아니지만 예상했던 정도이긴 했다. 아니, 예상보다는 잘 나온 것일까. 어쩌면 그동안 경거망동했던 것에 대한 질책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타격에 어찌할지 몰라 우울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런 모색을 했다. 루인이 한참 부족한 건 루인이 더 잘 안다. 그럼에도 루인의 능력보다 더 많은 걸 기대했던 건, 루인은 최고의 칭찬에 안주하는 타입이 아니라 그것에 자극받아 더 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만할까봐 살짝 낮춰주는 선생님들이 있는데, 그럴 경우 루인은 좀 휘청거리는 편이다. 그럼에도 오만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몸을 타고 돌았다.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도 한참 부족하면서도 오만함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자중모드? 아니다. 더 신나게 놀면 된다. 아직 부족한 지점을 지적 받은 것뿐이다.

결국 가지 않았다.

아, 그러니까, 금요일 여이연 강좌는 가지 않았다. 으흐흑. 이런 거 빠지는 거 무지무지 싫어함에도 결국, 빠지고 말았다. 돈도 돈이지만 강좌를 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무지무지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반쯤 안 갈 작정(반쯤은 갈 작정)으로 친구를 잠깐 만났다. 전해줄 것이 있어 잠깐 만난 것. 그러며 친구와 잠깐 얘기를 나눈다는 것이 저녁까지 같이 먹는 덕분에 시간은 7시를 훌쩍 넘긴 상태. 후후. 재미있는 건, 친구와 얘기를 나누며 얘기에 집중하는 동안에 알러지성 비염이 진정되었다는 사실. 결국 심리적인 요인도 작동한다는 의미다. 친구와의 얘기가 조금은 진지하고 심각한 내용이었고 그래서 말 속에 빠져있다 보니 비염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 비염이 진정되었네, 라고 깨닫는 순간 다시 비염이 스멀스멀 코를 간질였다는-_-;;;;

친구와 얘기를 나누다 가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래서 후회하느냐면 그렇지는 않다. 만약 비염이 없어서 강좌에 갈 작정이었다 해도 계속해서 친구와 얘기를 나눴을 거다. 그 만큼 중간에 자르고 나서기 어려운 얘기기도 했고 루인에겐 가장 소중한 친구이어서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은 그 얘기가 강좌를 통한 변태의 쾌락보다 더 쾌락적이었다는 얘기(루인의 쾌락은 깔깔 웃는 유머의 의미가 아님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 그러고 보면 1000년대에 만난 사람 중에 아직도 친구로 지내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네.

알러지성 비염: 의미 발생의 간극

“개”가 아님을 열심히 증명하고 있는 중.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어릴 땐 없었다고 기억하는데, 십 대 후반부터 알러지성 비염을 앓곤 했다. 겨울에도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지나가는 루인이지만 여름이면 어김없이 알러지성 비염에 몇 번은 종일 훌쩍거리며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작년엔 별 일 없었다고 기억하는데, 올해는 유난히 자주 비염이 도지고 있다. 후후. 아, 그렇다고 냉방병이 원인은 아니다. 에어컨 없는 집에서 살았고 지금도 에어컨은 쓰지 않고 있으니까. 여름 특유의 어떤 미세먼지에 더 예민한가 보다.

그래서 사람들이 감기냐고 물을 때 마다 말하고 있다. “인간임을 증명하고 있어요.”라던가 “개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어요.”라고. 속담에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란 말을 빗댄 것. 하지만 왜 여기서 개가 등장하는 걸까?

친밀한 의미로? 오랫동안 인간들과 함께 살아왔으니까? 단순히 그렇게 말하기엔 “개”를 비하하는 의미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인간우월주의의 반영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를 포함하는 속담은 많고 그 속담들은 하나같이 “개”를 비하/열등의 의미로 불러들인다. “개만도 못하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등등.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란 말은 왜 나왔을까? 때론 그것의 의미가 지금에 와선 혹은 특정 누군가에겐 작동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의 의미를, 지금의 루인은 이해할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저 그런 속담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이것은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어의 모든 뉘앙스를 알 수 있는 건 아니란 의미이며 언어의 의미 발생은 개인의 경험 맥락에 따라 다르게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속담으로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지만 결국 속담이란 것도 언젠간 사라질 것이고 새로운 속담이 등장할 것이란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인터넷용어인 “안구에 쓰나미”란 말은 끔찍하다. 비록 쓰나미가 곧장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 사태를 의미하진 않는다 해도 그때의 사건 이후로 쓰나미란 말이 널리 퍼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로인한 피해자들의 고통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이렇게 가볍게 소비할 수 있다는 점이 당황스럽고 때로 무섭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은유로 만드는 것의 폭력을 고민하게 한다. 일테면 “내 마음은 호수요”란 표현처럼 은유가 성립하기 위해선 어떤 현상을 고정적이고 변할 수 없는 대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다른 해석을 배제하고 단일한 의미부여만 한다는 점에서 타인(의 고통)을 박제한다. 박제하는 순간 타인의 고통은 지워지고 박제하는 사람의 의도에 맞게 재구성하며 그리하여 그 말 속엔 더 이상 그 존재는 없다. 오직 “나”의 심정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가 될 뿐이다. 비둘기는 평화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이런 비유법이 오히려 비둘기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알러지성 비염에 몸이 맹~하다. 으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