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

아침, 별 기대 없이 성적을 확인했다가, 아픔을 느꼈다. 저릿하게 아파오는 느낌. (못 쳤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적은 루인의 성적을 아는 사람은 쉽게 떠올릴 법한 그 성적;;;) 어제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고 그래서 기말논문을 읽는 도중에 루인에게 전화를 한 것임을 알았다.

저릿한 아픔. 이런 저릿함 속에서 루인의 묘한 욕망을 느꼈다. 행여나 성적이 뜰까봐 전전긍긍했지만, 성적이 뜨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오히려 안도했지만 받고 싶은 것은 학점이 아니라 비평이라는 것을. 물론 아직 더 무섭게 기다리는 성적이 하나 남아있긴 하지만, 무슨 학점인가 보다는 그 글을 어떻게 읽으셨는가 하는 세세한 비평이 궁금했다. 성적이 모든 걸 설명하진 않기 때문이다. 학점 보다는, 신랄하더라도 논평이 더 간절한 상황이다. 그러며 이런 욕망이 석사 1학기를 감안하고 평가를 받기 보다는 한 명의 언어생산자로서 평가 받고 싶은 것임을 깨달았다. 석사 1학기치고는 어땠다, 가 아니라 그런 기준 없는 평가를 받고 싶었다.

조금은 친한(혹은 루인만 친한 척 하는;;;;) 선생님은 평론을 겸하고 있는데, 그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다가,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비판적으로 쓰는 걸 엄청나게 싫어한다며, 여러 작가들 중 한 명으로 비판해도 곧 바로 연락이 오거나 한다고 얘길 했다. 그 말을 들으며 그 작가가 우스웠고 부러웠다. 비판도, 작품에 애정과 관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 물론 작품을 외롭지 않게 하는 비판이 가장 좋지만, 기본적으로 비판을 통해 소통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냐?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읽는지 그래서 어떤 지점이 문제이고 논쟁할 수 있는 지점인지 알아가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믿기에, 부러웠다. 그런 비평을 들은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 친구만, 루인을 페미니즘으로 인도(!)한 친구만이 가끔 루인의 글에 어떤 평을 해주는 정도.

어제, 낮, 갑자기 전화가 왔다. 지도교수로 점한 선생님이었고 어디 있느냐고, 잠깐 사무실로 왔으면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문제는 글을 통한 커밍아웃이었고, 그래서 선생님은 얼마간의 당황과 갈등 속에서 결국 루인을 부른 것이다. (평소의 발언을 통해서 짐작했고 관심이 트랜스와 이반queer임을 알고 계셨지만 그것이 루인의 정체성이라곤 짐작 않으셨던 것이다.) 그러며 자신이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그 이유는, 만약 루인이 그래도 선생님께 논문지도를 받는다면, 서로의 정치적 위치를 알아야지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며 과거의 알던 학생 중에 정말 두 명의 “동성애자”가 있었고 그로 인해 얼마간의 상처도 있었다는 얘길 했다. 한 명은 너무 똑똑해서 일부러 외국으로 유학 보냈는데 결국, 연락이 안 된다는 얘기. 다른 한 명은 지금은 유명한 퀴어queer이론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말. 선생님은 첫 번째 학생과의 관계에서 많은 상처를 받으신 것 같았다. “왜 드물게 똑똑한 학생들은 동성애거나 트랜스냐”는 말 속에 그런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표했다. 첫 번째 학생은, 한국에서 “동성애자”로 사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선생님이 일부러 외국으로 유학을 보냈지만 6개월 뒤에 찾아가 봤을 때, 자신과의 갈등 속에서 기숙사의 어두운 방에서 꼼짝도 않고 지내더라는 얘기. 그러곤 난 후 결국 연락이 끊겼다는 얘기. 기존의 ‘이성애’-젠더가 요구하는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이 생존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를 다시 고민하게 했다.

선생님은 그러셨다. 논문은 잘 썼다고, 운영위원 선생님들에게 말해서 코스과정 생략하고 바로 석사논문 준비해도 되겠다고(처음엔 그렇게 하자고 하셨다가 그런 예외는 힘들겠다며 다시 수정하셨다). 학제에서 요구하는 글쓰기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고. 다만 개인의 경험이 좀 많이 들어가 있으니 그것을 줄이고 파편적 글쓰기 형식을 좀 고민할 필요는 있다고.

이 말들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했다. 어떤 사람은 칭찬으로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제 석사 1학기인 루인으로선 칭찬이기 보다는 그 만큼 기존의 방식에 익숙해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물론 기말논문은, 형식에 있어선 기존의 논문방식을 그대로 따른 면이 없지 않다. 나름대로 서론이 있고 본론이 있고. (사실 결론은 없다;;; 결론을 가장한 문단이 하나 있을 따름이다;;;;;;; 크크크) 내용 구성 방식에서도 중간논문은 완전히 모자이크식 글쓰기였고(서론-본론-결론의 형식을 갖춘 것이 아니라, 본론을 파편처럼 나눠버렸고 그래서 아이디어 나열처럼 구성했다) 기말엔 루인의 경험을 상당히 섞었다. 이성과 논리를 맹신하는 학제의 방식에서 개인의 경험은 적을수록 좋고 여성학과에선 개인의 경험에 기반을 둔 글쓰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 간극에서 선생님은 조율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셨다. 이른바 “대중적인 글”과 “학술적인 글” 사이의 구별이 없는 글을 지향하는 루인으로선 학제에서 요구하는 전형적인 방식에 당혹스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1학기가 끝난 무식한(!!!!!!!!!!!!!!!!!!!) 루인에게 그냥 논문 준비를 하자니요.

이런 얘기 속에서 석사 논문 제목이나 그런 관련 얘기들도 나눴다. 암만해도 제목에서 트랜스를 드러내면 취직하거나 이후 일거리를 맡기 어려울 테니 협상을 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이건, 행여나 ‘이성애’혈연가족들이 논문을 보자고 할 때를 감안해야 하니(읽을 거라곤 몸앓지 않는다.. 흐흐) 수긍할 수 있는 지점이지만 사실 아예 드러낼까 하는 몸앓이도 하고 있다. 풋. 그러며 나중에야 깨달은 사실

[#M_ 이번 기말 논문 두 편의 제목 및 목차.. | 얼핏 봐선 트랜스/젠더임을 알 수 없다;;;;.. |

젠더정치학을 모색하며
Ⅰ. 젠더와의 (불편한) 만남
Ⅱ. 섹스와 젠더의 관계
ⅰ. 기존의 ‘젠더’정치학
ⅱ. 생물학/해부학은 운명이 아니라고?
ⅲ. 젠더 자체를 질문하기
Ⅲ. 젠더를 둘러싼 트랜스와 페미니즘의 관계: 젠더 정치학gender politics과 효과로서의 젠더 정치학gendered politics
ⅰ. (페미니즘과) 트랜스의 불편한 관계
ⅱ. 젠더란 무엇인가
①규범으로서의 젠더 혹은 젠더 규범
②“잘못된 몸”이라고?
③ 젠더란 무엇인가
Ⅳ. ‘젠더 없는’ 젠더 정치학
ⅰ. 언어 정치학: 누구의 언어로 상상할 것인가.
ⅱ. 젠더 권리를 통한 연대
#참고문헌

경계그물(border-webs)에서 노는 사이보그‘들’
0.
1. 인공?: 사이보그-키이라-괴물-트랜스
2. 경계공간에서 놀기
3. 젠더경계그물에서 말하기: 고백‘할 수 없는’ 이산자
(다시) 0. 경계그물에서 말하는 괴물-언어
#참고문헌

#후기
_M#]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나왔을 때,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오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생님은 루인의 논문을 다 읽지 않은 상황에서 전화를 했었고(그 만큼 글을 통한 커밍아웃에 충격을 받으셨나 보다) 트랜스는 곧 수술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루인의 글은 바로 그 지점을 비판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느꼈을 당혹스러움과 루인이 느낀 곤혹스러움. 그 간격을 읽으려 애쓰다 어지러웠고 우울해지기도 했다.

성적을 확인하다, 이런 기억들이 겹쳐 아픔을 느꼈다. 앞으로, 잘 할 수 있겠지? 훗. 잘해야지, 뭐.

트랜스아메리카

[트랜스아메리카], 2006.06.25. 영화. 어둠의 경로;;;;;;;;;;;;;;;;;;;;;;;;;;;

오랜만에 토요일은 玄牝에서 종일을 보냈고 일요일은 5시 즈음 사무실에서 玄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둠의 경로를 뒤적였다. 요즘은 어떤 영화가 나오나, 하고. 영파라치 이후 어둠의 경로는 포기한데다 최근 일정이 어둠의 경로와 접속할 여건도 아니었기에 그냥 재미삼아 뒤적였다. 그러다 거슬린 제목, [트랜스아메리카]. 설마 했다. 설마 트랜스/젠더, 트랜스/섹슈얼을 다루는 영화일라고. 그냥 미국을 횡단하는 여행영화겠지, 하며 지나갔다. 그런데 몇 번이고 계속 거슬렸다. 자꾸 걸렸다. 그래서 제목을 검색하니… 으하하하하, 성전환 수술을 앞둔 트랜스를 그린 영화였다.

처음엔 그냥 대충 어떤 내용인지만 확인하고 말 의도였지만, 계속 봤다. 그러며, 인상적인 혹은 몸 아픈 몇 장면.

영화 시작하는 초반에 의사와 상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성전환수술을 앞두고 (추측하건데 정신과) 의사의 ‘허가’를 받기 위한 마지막 상담. 의사는 여러 가지를 말하고 묻는다. 어떤 수술을 받았느냐고 물으며 “진짜” 같다고 성형수술을 상당히 잘 했다고 말한다. 그러며 기분이 어떠냐고 주인공 브리(펠리시티 허프먼)는 행복하다고 했다가, 다시, 수술을 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정정한다. mtf인 브리에게 지금의 외부성기를 어떻게 느끼느냐고 묻자 역겹다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 하냐고 묻자 부모는 죽었다고 대답했던가. 이 장면들을 읽으며 트랜스들이 어떻게 의료체계에 포섭되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복잡함을 느꼈다. 지금도 행복하다고 했다가 수술을 못 받을까봐 수술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정정하는 장면, 페니스를 역겹다고 말하는 장면, 모두 기존의 의료체계가 요구하는 정답들이다. 사실 브리가 자신의 페니스를 역겨워하는지 안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역겨워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의사 앞에서 후자의 대답은 결코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답은 정해져 있다. 한 ftm은 페니스구성수술과는 별도로 질제거수술은 받고 싶지 않아 하는 트랜스들의 욕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의사에게 물었지만, 의사는 그런 ftm 트랜스는 없다고 말했다. 의료체계에서 수술을 통한 트랜스 몸의 구성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사에게 있다. 바로 이 지점이 기분 더럽게 다가오기도 하고 그런 의료체계에서 어떻게 협상적인 언어를 쓸 것인가를 갈등하는 브리의 모습이 아프기도 했다. 자신의 외부성기의 모습과 젠더 정체성은 별다른 관련이 없음에도 의료체계에선 외부성기=젠더 정체성으로 간주한다는 점, 지금의 법체계에서 트랜스는 모두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으로 한정한다는 점에서 며칠 전의 대법판례와 기사들이 떠올랐다.

이 영화의 이야기 구성은 18년 전, ‘레즈비언’ 관계로 성관계를 가졌다가 존재를 몰랐던, 감옥에 갇혀있는 아들에게서 전화가 오고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어떻게 관계를 맺어 가느냐에 있다. 토비는 친아빠를 찾아가고 브리는 이 여행이 끝나면 수술을 받을 예정이다. 물론 아들인 토비는 영화의 후반부까지 브리가 친”아빠”인지 모른다. 그저 “예수쟁이”로 알 뿐이다. 이 여행 중에 겪는 일들을 통해 관계가 조금씩 변해간다. 영화 중 재미있는 하지만 아픈 에피소드들.

히치하이커가 있어서 차를 태워주는데, 잠깐 차에서 내려 쉬는 사이에 히치하이커가 차를 훔쳐간다. 그때 브리가 외친 말: “내 수술비! 내 호르몬!” 결코 웃을 수 없는 장면. 차가 아까운 것이 아니라(애시 당초 목적지에 도착하면 팔아버릴 예정이었다) 차에 둔 호르몬이 브리에겐 더 절박했다. 그 불안함, 절망, 좌절.

하지만 이 장면에 앞서 나오는 장면, 여행 중에 묵을 곳이 필요해 소개로 들른 곳이 트랜스들의 모임이 있는 집이었다. 브리는 상당히 불편해하고 토비는 그냥저냥 지낸다. 그 집을 나와 토비와 브리의 대화: 브리는 “가짜고 인공인 여자들”이라고 ‘혐오’하는 것 같은 발언을 하고 토비는 “다들 착해 보이는데 왜 그러느냐”고 반응한다. 브리의 반응이 와 닿았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랬겠지만, 일단은 자신이 트랜스임에도 그것을 토비에게 들키지 않고 싶을 때, 브리는 더욱더 부정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트랜스는 역겨워”라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트랜스임을 들키지 않으려는 전략. 트랜스들을 옹호 혹은 지지했다가 자신의 트랜스 정체성을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트랜스는 다른 정체성보다 좀더 복잡하다. 트랜스일 때, 이 영화에서처럼 mtf(male-to-female)일 때, 사실 mtf란 표현은 문제적인데 단 한 번 자신을 “남성”으로 느낀 적 없을 때 의심 받는 것의 느낌:”여성”임에도 “남성”으로 의심받는 것을 폭력으로 느끼기에 더 적극적으로 트랜스혐오 발화를 할 수도 있다. 혹은 “남성”으로 느끼다가 젠더 정체성의 변화로 “여성”으로 느낄 때, “여성”이 아니라고 의심 받을까봐 더 적극적으로 트랜스혐오 발화를 할 수도 있다. 이런 복잡한 지점에서 트랜스”여성”은 “가짜고 인공”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런 발화는 자기혐오와 겹쳐서일 수도 있다. 자신의 트랜스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트랜스임에는 께름칙함을 느끼는 반응.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재미있는 건 토비의 반응이었다. 자신과 무관한 일일 땐 얼마든지 “관대”할 수 있지만, 이후 브리가 트랜스임이 드러났을 때 토비는 완전히 다르게 반응한다.

물론 토비는 거짓말해서 기분 나쁘다고 하지만, 솔직히 루인은 그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웠다. 친밀함을 느꼈던 사람이 “변태freak”일 때, 그 사실을 접할 때 가려둔 또 다른 감정이 드러난다. 그래서 루인은 브리가 트랜스임을 알고 보인 토비의 반응은 단순히 거짓말을 해서(혹은 처음부터 트랜스임을 밝히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트랜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반응은 토비가 브리에게 성적으로 매혹되었을 때, 바로 그때 토비가 찾으려고 하는 “아빠”가 브리임을 알았을 때, 엄청난 혐오와 폭력적인 행동을 통해 다시 한 번 드러난다. 물론 이를 단순히 트랜스혐오라고 읽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숨겼다는 점, 적어도 자신의 “아빠”만은 트랜스일리가 없다는 믿음, 이런 세련된 혐오(“내 가족, 내 주변 사람만 아니면 다 괜찮아”라는 식의 쿨한 반응), ‘이성’으로 사랑한 사람이 “아빠”라는 사실의 ‘혼란’ 등등의 복잡함 속에서 이런 폭력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떻게 끝나느냐고? 미국산의 대부분이 그렇듯, 해피엔딩이다. 단 그 해피엔딩은 어느 누군가의 ‘희생’이나 포기가 아니라 각자의 길을 가면서도 그 길에서 소통하는 방식으로의 해피엔딩. 브리는 토비의 반응에도 성전환수술을 하고 토비는 포르노그래피 배우가 되고 둘 사이에 존재하는 어느 정도의 간극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둘이 다시 만났을 때, 서로를 용서하는 끔찍한 방식(용서라니, 누가 누굴 용서해?)이 아닌 서로의 방식에서 소통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이 좋았다.

#아아, 검색로봇에 어떤 말이 걸릴지 가히 두렵다-_-;;

양들의 침묵 혹은 트랜스혐오

기사링크: “大法의 성전환자 호적정정 요건

[양들의 침묵]을 즐기셨나요? 위에 링크한 기사는 읽으셨나요? 뭐, 영화는 안 봤어도 그만이죠. 하지만 그 영화를 이미 즐겼다면, 이 글이 더 재밌다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에요. 그런데, 그 영화를 이미 즐기셨다면 어떻게 즐기셨나요? 어떤 사람은 재밌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무서운 영화는 못 본다면서 안 봤다고 하더라고요. 루인은, 재작년엔가 작년엔가 즐겼더래요. 이 영화를 즐기고픈 계기가 있었거든요.

사람마다 이 영화를 다양하게 해석하겠지만, 루인이 들은 인상적인 해석 3가지(모두 한 사람에게서 전해들은 얘기들이다): 하나, 한 선생님은 이 영화를 엘렉트라 컴플렉스로 읽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자신의 욕망이 조디 포스터를 통해 드러난 경우랄까. 특히나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의 손가락이 스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이 그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자극했다고.; 둘, 한 레즈비언은 이 영화를 레즈비언 영화라고 했다. 조디 포스터와 그 동료 사이의 관계가 그려져 있는. 사실 조디 포스터는 레즈비언들이 좋아하는 배우기도. 관련 다큐멘터리가 있을 정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런 장면을 찾을 수 있다.; 셋. 한 사람은 지식 윤리학에 대한 영화라고 했다. 지식 윤리학이라고 적으니 쓸데없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아무튼 그 사람은 이렇게 표현했다. 지식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쟁할 수 있는데, 안소니 홉킨스는 자신의 지식을 때로 아주 끔찍하게 사용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좋게만 평가 받거나 홉킨스의 천재성을 칭찬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많은 논쟁거리를 던져준다는 것.

이런 얘기를 듣고서야 그 영화를 즐기고 싶었다. 그전까진 그저 공포영화 정도 이겠거니 했다. 딱히 공포영화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즐기지도 않으니 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흥미로운 해석이 나올 수 있다면, 한 번 쯤 즐겨도 좋지 않을까 했다(이 문장 자체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이미 두어 달 전 즈음부터 이와 관련해서 글을 쓰고 싶었지만 미루고 있달까;;). 그래서 즐겼고, 루인에게 이 영화는 어떤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그래서 한 동안 저 영화로 다른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주변에 이 영화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대중영화나 흥행영화는 안 본다는 이유로 안 본 사람에서 무서운 영화는 안 본다는 사람, 명절날 텔레비젼에서 방영한-무수한 가위질이 가해졌을 편집으로 봤다는 사람까지. 어찌나 이야기 하고 싶었던지 퀴어 세미나를 할 때, 텍스트로 사용하고 싶었지만, 이 역시 성공하진 않았다.

그럼 루인은 이 영화를 어떻게 읽었냐고? 간단하게 요약하면 트랜스 혐오 영화로 읽었다. 미국 영화에선 세 가지 해선 안 될 코드가 있다고 들었다. 아동학대긍정, ‘동성애’혐오, 인종차별발언이라고. (하지만 최근 개봉했던 [노스 컨츄리]엔 ‘게이’혐오 발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동성애’혐오는 하지 않을지 몰라도, 트랜스들을 향한 엄청난 혐오를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트랜스를 어떤 식으로 인식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영화는 그래서 정말로 소름끼치는 ‘공포’영화였다.

이 영화를 즐겼다면, 기억하시는지? 범인(고든 혹은 빌)이 트랜스란 사실을. 이건 비밀이 아니다. 영화 중반 즈음부터 단서로 얘기하고 있다. 트랜스가 벌인 살인사건이라고. 트라우마지만 끊임없이 얘기하고 싶었던 이 영화를 한 동안 잊고 있다가 갑자기 떠오른 이유는 위에 링크한 기사를 읽고서다.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신체 외형도 원하는 성에 어울려야 한다.

범법 기록이 없고, 범죄 이용 가능성이 적다는 판단이 정신과 치료로 입증돼야 한다.

란 구절이 나온다. 이 두 구절 모두 신랄하게 비판할 지점이지만(사실 이 기사의 내용 모두가 신랄하게 비판할 지점들이다) 유난히 이 두 구절에서 그 영화가 떠오른 이유는, 범인으로 등장하는 트랜스가 범행을 하는 동기로 “여성”으로서의 신체외형에 어울리지 않고 범법 기록이 있어서 혹은 성격 상 그럴 가능성이 있어서 수술을 거부당했기 때문으로 나온다. 그래서 그런 범죄를 저지른다. 수술이 안 되니 직접 자신을 수술하겠다는 것이다. 성전환 수술을 하는 모든 병원에서 고든(범인)이 성전환 수술을 신청했을 때 거부했다. 신체외형이 “여성”처럼 안 생겼고(도대체 “여성처럼” 생긴 외형은 어떤 외형이야? 그런 것이 있기는 해?) 성격이 난폭하다는 이유에서였다. MTF든 FTM이든 성격이 난폭해선 안 될 이유는 뭐지? 트랜스가 아닌 이들은 성격이 안 난폭해? 혹은 범법기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MTF에게만 적용하는 일이라면 이건 철저하게 ‘이성애’-젠더구조에서 “여성”에게 강요하는 어떤 이미지를 부여한 것일 뿐이지.

트랜스란 존재는 그 자체로 기존의 ‘이성애’-젠더 구조에서 “여성” 혹은 “남성”은 어떨 것이란 환상과 규범/강제가 뒤엉키면서 폭발하는 공간이다. 법적 조건, 의학적 조건 같은 것들은 그 조건에 맞는, 트랜스가 아닌 “여성”/”남성”이 실제로 있기나 한지는 묻지 않으면서 그런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 [일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중에서, “여성” 혹은 “남성”이란 명사를 들었을 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시나요? 만약 어떤 이미지가 있지만 그 이미지를 가지고 사람 많은 곳으로 나가서 그 이미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람이 몇 이나 되는지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겠죠. 혹, 그런 명사를 들었을 때 아무 이미지가 안 떠오른다 해도 생활 속에서 무심결에 “여자가…”, “남자가…”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는지요.] 영화 [양들의 침묵]은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성찰 없이 트랜스 혐오를 곧 바로 표현하고 있다. 더구나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는 미국에서도 트랜스들의 운동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던 시기였다. 한국에선 이제야 트랜스 운동이 시작하고 있는 단계다.

사실, 대법원이 법적성별정정을 승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몸이 복잡했다.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성별정정과 관련한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지하지만 반대한다는 루인의 입장처럼, 법/국가를 통한 해결에 반대하는 루인으로선 복잡했다. 좋아하려니 위에 링크한 기사처럼, 법/국가와 의료/국가를 통해 트랜스의 범주가 상당히 좁아지고 그렇다고 성별정정이 필요한 ‘현실’에서 반대할 수도 없는 ‘딜레마’. 성별정정관련 법제화를 반대하는 이유는 법제화를 통해 트랜스 내부의 엄청나게 다양한 범주를 모두 포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정 누군가는 트랜스가 ‘될 수’ 있고 합법적인 몸이 되지만 다른 누군가는 더욱더 “불법의 몸”이 될 수밖에 없다(“불법”이고 때로 “가짜”로 지목될 사람 중엔 루인도 포함한다). 이럴 때 법제화를 지지해야 할까. 지지할 수는 있을까? 현재의 법제화를 트랜스운동단체와 민노당이 같이 작업하고 있지만 법제화 과정에서 타협과 삭제/배제의 과정을 미리 염두에 두고 작업한다는 걸 느끼고 있는 지점에서 이 “역사적인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라 모든 운동단체에서 법제화 작업은 배제와 삭제를 염두에 두고 작업한다.)

엉뚱한 결론 같겠지만, 때로 한국에 트랜스운동단체 3개 정도에 연구자가 10명 정도만 있어도 좋겠다는 욕심을 품곤 한다. 많이도 말고 그 정도만 있어도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품는다. 행여나 그런 분은 없겠지만 이곳에 오는 분 중에, 루인이 하는 트랜스로서의 말들이 모든 트랜스를 대표한다거나 유일한 목소리로 여기는 분이 있을까? 트랜스로서 루인의 언어들과 글/말들은 단지 무수하게 많은 트랜스들 중의 하나일 뿐이며, 그것도 수술을 거부한 트랜스들의 목소리 중의 하나일 뿐이다. 수술 혹은 호르몬 투여 중에 있는 트랜스라면 전혀 다른 얘기를 할 것이다. 아, [양들의 침묵]을 다시 즐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