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종 드 히미코, 망종

어제, 두 편의 영화를 즐겼다. 오후 3시의 [메종 드 히미코]와 저녁 6시의 [망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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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 드 히미코]는 두 번째다. 극장에서 언제 내릴지 모르고 DVD를 언제 출시할지 모르니, 꼭 다시 즐기고 싶었다. 여전히 좋다. 언젠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연결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다시금 품는다. “메종 드 히미코”란 공간은 “자기만의 방”과 닮아 있다.

다시 즐기며 새로 발견한 사실 두 가지:
“메종 드 히미코”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 아래에 불꽃을 터뜨리는 꼬마 4명이 나오는 장면에서 루비와 다른 한 명이 물을 뿌리면서 나오는데, 이때 꼬마들이 외치는 말 중에 하나가 “호모의 역습이다”. 이 말에 큭큭 웃었는데, 감독은 알고 이 말을 쓴 건지 궁금했다. 1979년에 재니스 레이먼드는 [성전환 제국]이란 대표적인 트랜스 혐오 문학을 출판했다. 이 책에 대해 대략 10년이 지나 샌디 스톤은 [“제국”의 역습]이란 글을 썼다. 재니스 레이먼드와 의료담론에서 나타나는 트랜스 혐오를 비판하는 글이다. 꼬마들이 외친 “호모의 역습이다”(물론 이때의 의미는 조롱/혐오이다)는 이 말을 다시 한 번 전유했다고 느꼈다. 그렇게 트랜스/이반혐오를 드러내면 결국 “역습”을 가한다는 의미로. 물론 감독은 이럴 의도가 없었겠지만 어차피 텍스트는 해석하는 사람의 몫.
또 하나는, 그 꼬마들 중 한 명이 하루히코에게 반해서 “메종 드 히미코”에 찾아가는데, 그때 꼬마가 입고 있는 상의에 적힌 글자. 옷에 그려져 있는 캐릭터와 관련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옷엔 “TRANS”라고 적혀 있다. 트랜스라니. 후후후. 우연이라고 하기엔 의미심장할 따름이다.

그나저나 이 영화, 그냥 이렇게 조용히 지나갈 영화가 아니다. 오다기리 조 한 명에 집중하고 말거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만든 이누도 잇신 감독의 영화라는 식으로 지나가고 말 영화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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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종]을 ‘즐겼다.’ 영화관을 나서선 비상금처럼 가지고 있던 돈으로 이것저것 소비했다. 귀걸이를 두 개 사고, 책을 두 권 사고, 마녀 연필을 두 자루 사고 핸드폰 장식을 사고. 숨 막히는 느낌.

그런데 왜 마지막 장면에서 치마를 입었을까. 이 영화에서 최순희는 단 한 번 치마를 입고 카메라는 단 한 번 움직이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다. 근데 그 치마가 H라인의 보폭을 제한하고 다소 불편한 옷이라는 것(영화 포스터에 나오는 그 옷).

아직은 이 영화 평을 쓸 시기가 아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고 안 쓸 가능성이 더 크지만, 아프다.

모든 말하기/글쓰기는 협상하는 언어다: 트랜스와 나혜석

몇 년 전만 해도 트랜스는 전혀 가시적인 존재가 아니었고 그래서 트랜스란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 것은커녕, 자신의 정체성을 명명할 언어조차 알기 힘들었다. (그래서 하리수는 언제나 복잡한 위치에 존재한다.) 지금도 커밍아웃은 곧 ‘동성애’를 의미하기에 트랜스 정체성이 그렇게 가시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여전히 트랜스는 의료담론/의료제도에서 정신병 질환으로 분류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루인은 정신병자이기도 하고 루인이 쓰는 모든 글은 “미친 인간의 헛소리”기도 하다.

미국에선 트랜스 정체성을 정신병 범주로 둘 것이냐 삭제할 것이냐로 트랜스 커뮤니티 내부에서 많은 논쟁이 있다고 한다(한국에선 없는 것이 아니라 가시화가 안 되어서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뿐이다). DSM에 정신병으로 분류되어 있고 그래서 트랜스란 커밍아웃은 의료담론에선 “나 정신병자요”라고 선언하는 것과 동의어인 셈이다. 물론 트랜스들이 자신을 정신병자로 여기냐면 그렇진 않다. 정체성의 갈등 시기와 자기에게 하는 커밍아웃의 어려움, ‘자기혐오’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미쳤다”고 여기진 않는다. 그렇다면 정신병 목록에서 삭제하는 방향으로 투쟁을 할 법한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계급 문제 때문이다. 트랜스가 정신병 목록에 올라 있으면 수술을 할 때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혜택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병 목록에서도 빼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을 수 있게 하면 안 되냐고 말하고 싶지만 이렇게는 안 되나 보다. 미국에 사는 트랜스들이 이런 사실을 몰라서 이런 투쟁을 안 하는 건 아닐 테니까.) 수술비가 아무리 비싸도 상관없을 정도의 돈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의료보험 혜택은 계급/계층적인 문제와 연동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신이 “미쳤다”고 여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원하는 트랜스라면 자신을 “정신병 환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건 협상 전략이다. 루인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수술에 대한 욕망이 강하지 않지만 어느 날 이런 욕망이 강해서 수술을 원한다면, 이성애-젠더 구조의 의료담론과 의료체계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나는 정신병자요”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건 자신을 “정신병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제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협상의 언어이다. (직장 상사에게 싫어도 웃는 얼굴을 하는 사람,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 모두 이런 협상하는 말하기/글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며칠 전, 수업 시간에 나혜석의 “이혼고백장”을 텍스트로 토론을 하며, 이 글에서 나타나는 나혜석의 “보수적인 측면”으로 인한 “모순”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루인은 모순이 아니라 협상이라는 얘기 정도를 했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나혜석은 이혼을 하고 나서(하기 직전인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 “이혼고백장”이란 글을 썼다. 어떤 경로로 결혼을 했고 어떤 연유로 이혼을 했는가를 적은 글이다. 당시엔 “사생활의 폭로” 혹은 기존 사회의 모순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큰 이슈가 되었나 보다. 뭐, 지금도 이런 글쓰기는 쉽지 않다. 문제는 이 글에서 나타나는 유교적 ‘여성’관이다. 이전의 글에서는 찾기 힘들었던 유교적 “전통”에 따른 ‘여성’관을 “내면화”한 모습이 이 글에는 나타난다. 신혼여행으로 죽은 남자친구를 성묘하러 갔던 나혜석이 이혼하지 않기 위해 남편에게 매달리는 모습도 나온다. 이건 모순일까? “전통적 유교관의 내면화”일까?

루인은 미국에서 트랜스들이 벌이고 있는 정신병 목록의 논쟁을 떠올렸다. 당시의 나혜석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런 언어를 차용한 것일 뿐이라고 느낀다.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소문 이후 나혜석의 위치가 이전과는 달라졌고 더 이상 이전처럼 발화할 수 없었기에 이전과 같은 언어를 사용해선 글을 출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출간도 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일까. 나혜석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고 느낀다. 그래서 유교에서 바라는 “전통적 여성관”을 차용한 것은 아닐 런지. 트랜스들이 수술을 받기 위해선 자신을 “정신병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듯이.

그래서 슬펐다. 이런 슬픈 몸으로 정희진 선생님 강좌를 들으러 갔었고 그래서 더 열광하며 즐거웠다.

스윙걸즈: 실망과는 다른 만족감

피곤했다. 저녁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약속한 분이 사주는 것이었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아무리 즐거운 사람이라도 헤어진 후엔 피곤함을 느낀다. 그런 피곤함이었다. 그래서 그냥 玄牝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루인이 가려고 한 극장에선 마지막 상영이었기에 보기로 했다. 표를 끊고 상영까지 한 시간도 더 남았다.

극장으로 들어가, 쉴 수 있는 의자에 앉아 책을 읽을까 어쩔까 조금 망설였다. 책상처럼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책을 폈지만 피곤함에 책이 잘 읽힐지는 자신 없었다. 프랑스 작가의 작품이었다. 영어 번역본과 한국어 번역본을 모두 펼치고 읽다가 신경질이 나서 한국어 번역본을 덮었다. 번역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영어 번역본은 잘 한 걸까? 그럼에도 영어 번역본을 선택한 건, 영어일 때 더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한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나게 글을 읽다 보니 어느새 입장 시간이 다가왔다.

[스윙걸즈] 2006.03.29(수). 21시 40분.
※스포일러 없음!

이 영화에 엄청난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극장에서 접하는 홍보용 필름이 너무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팜플릿을 챙겨 읽으면서도 너무너무 기대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늦은 시간에 영화관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 기대였다. 그리고 기대는 너무 높았다. 그래서 실망했다.

그랬다. 실망스러웠다. 솔직히 홍보용 필름에서 보여주는 내용이 영화 스토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야기만 따지만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기대가 너무 컸다는 것이 중요하다. 실망은 기대가 있을 때 생기는 법. 만약 별다른 정보 없이 별다른 기대 없이 이 영화를 즐겼다면 너무너무 만족스럽다는 얘기를 했겠지.

이런 묘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재밌었고, 묘한 만족감과 깔깔 웃는 와중에 피곤함은 싹 가셨다. 스윙걸즈 밴드의 유일한 ‘남성’인 나카무라의 등장이 좀 짜증나고 거슬렸지만(불편한 지점이 있다) 그래도 좋았다. 음악은 유쾌하고 영화는 (연기의 어색함이 종종 거슬렸지만) 즐거웠다. 말도 안 되는 만화적 구성도 재밌었다. 아니다. 이런 말들은 단지 불필요한 부연설명일 뿐이다.

또 즐기고 싶다.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