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칼, 자해, 왼쪽 귀 그리고 귀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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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여러 해 전, 면도칼을 목걸이 삼아 걸고 다닌 적이 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옷 속에 숨겨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면도칼의 까칠하고 차가운 느낌이 몸에 닿으면 역설적이겠지만 오히려 온 몸을 뚫고 나올 것 같은 가시 같은 날들이 조금은 무뎌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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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열 명 정도의 깡패나 “적”에게 둘러싸여 있고 손에 칼이 있으면 누군가를 위협하며 방어를 하기 마련이다. 물론 아무리 칼이 있다고 해도 혼자선 이길 수가 없다.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고 히죽, 웃으며 팔뚝을 긋고 뿜어 나오는 피를 혀끝으로 살짝 맛보는 행동. 실은 이런 행동이 더 위협적이다. 다른 사람을 공격할 수 없어 자신을 가해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상대방들은 이런 장면을 통해 더 큰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가해할 수 있다면 상대방은 더 아무렇게 가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하지만, 자해는 자아도취(자뻑)를 표현하는 한 방법이고 타인을 공격하지 못하는 내사introjection가 타인이 아닌 자신을 공격하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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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현기증과 메스꺼움을 느꼈다. 아프지는 않았다. 아니 아무런 느낌이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현기증과 메스꺼움을 느꼈다. 가게를 나선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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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인은 양쪽 귀의 청력이 다르다. 전화를 받으면 왼쪽으로 받고 음악을 한쪽 귀로만 들어야 할 상황이면 왼쪽귀로만 듣는다. 왼쪽의 청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오른쪽의 청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 아마도 대여섯 살 정도로 기억하는 나이 즈음, 오토바이에 부딪히는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다. 이성애혈연가족이 모두 있었지만 모두들 절묘하게 피해서 루인에게로 부딪혔다. 앗싸! 요즘 같으면 병원으로 간다, 보험금 받는다 하겠지만, 당시 부모님은 오토바이 운전자를 그냥 돌려보냈다. 루인만 혼났다. 제대로 안 보고 다닌다고. 크크크. 그렇게 교통사고는 잊혀질 뻔 했는데 그러질 않았다. 이후 초등학생 6학년이 끝날 때까지 그 사건의 흔적은 몸에 남아 있었다. 오른쪽 귀에 핏덩어리가 굳어서 돌처럼 들어 있었다. 이성애혈연가족들은 루인의 귀에 이런 이상한 것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사건이 나고도 7, 8년이 지나서야 병원에 갔다. 큭큭. 병원에 가서야 알았다. 핏덩어리가 굳어서 돌덩어리처럼 들어있다는 걸.

소리에 민감한 루인에게 왼쪽 귀는 너무도 소중하다. 좀더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귀이기 때문이다. 왼쪽 귀를 막으면 오른쪽 귀만으론 잘 못 듣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론 지금까지도 그때의 흔적이 남아있는 셈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원했다. 왼쪽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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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지고 싶어서, 신나려고 귀를 뚫었는데 玄牝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몸앓이를 했다. 이런 흔적들이 떠올랐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많이 어지럽다.

신나는 언어 강의

어제, 수업이 끝나고 신나는 몸으로 연대로 향했다. 입금을 하고도 갈 수 있을지 애매했는데 다행이었다. 이히히. 앞 쪽에 자리를 잡고 정희진 선생님이 오길 기다렸다. 두근두근, 긴장해서 화장실엘 몇 번이고 가고 싶었지만 참으며 기다렸다.

“거짓말=말(언어)”라는 인식에서 시작하는 강의는 시작부터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위치(시간과 공간이 교차하고 문화적 맥락이 교직하는)에 따라 언어의 내용이 달라지기에 모든 언어는 번역이며 원본이 없다는 말은 몸에 팍팍, 와 닿았다. 자신을 어떤 언어로 설명할 것이며 누구의 의미로 해석할 것인가가 루인이 고민하는 중요한 지점이기에 자신의 언어로 말 할 수 있길 바란다는 말은 상당한 “위로”였고. 선생님의 표현처럼, 고통은 그것을 설명할 언어가 없고 혼자만이 겪는 그래서 피해경험자임에도 가해자로, 원인 제공자로 느끼는 상황일 때 발생하는 것. 그래서 자신의 경험을 발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진다는 건 자원/힘이며 권력이 되기도 한다.

다른 많은 내용이 매혹이었지만, 특히 “섹시한 언어”라는 표현이 너무 좋았다. 루인이 에로틱(이라릭? 크크)한 자극을 줘, 라는 말로 변태할 수 있는 자극을 표현한다면 선생님은 “섹시한”으로 표현했다. 크크. 감정이 곧 정치이며 에로틱한 자극이야 말로 감정을 일으키는 발로이기에 루인이 좋아하는 표현들이다. 그래서 어제 강의는 정말 에로틱(이라릭? 크크: 어제 강좌 들은 분은 알 듯)했고 섹시했다.

쓰고 싶은 말은 넘치지만, 시간이 애매해서, 여기까지.
(참, 끝나고 사람들이 사인을 받기에 덤으로 루인도 받았다. 강의를 하고 피곤하실까봐 망설였는데 사람들이 여러 명 받고 있어서 그냥 그 줄에 끼어들었다. 이히히.)

정치적 올바름이란 조롱거리

“정치적 올바른”이란 말을 자주 접한다. 어떤 사람은 판단 기준으로 사용하겠지만 루인은 이 말을 조롱의 의미로 사용하는 편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안달하네”로. 물론 루인이라고 “정치적 올바른”이란 강박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지만 이 말을 너무너무 싫어한다.

기본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은 언어가 아니다. “올바름”의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이 말은 성립할 수가 없기에, “사진 촬영 금지”란 팻말 옆에서 사진 찍는 것처럼 언어가 아니라 그냥 무의미한 무엇일 뿐이다. 동시에 “정치적”이란 말과 “올바른”이란 말은 애초 양립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정치적”이란 말 자체가 이미 특정 지향을 내포하고 있는데, 어떻게 “올바를” 수가 있겠느냐고.

“정치적 올바른”의 가장 큰 문제는 그로 인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으며 말을 한다면 오직 하나의 목소리 밖에 낼 수 없다는 점이다. 모든 언어는 특정 누군가의 경험을 반영할 뿐이기에 필연적으로 다른 누군가의 경험을 배제한다. [Run To 루인]에도 몇 번 적었듯, 어떤 사람은 시각 경험이 없기에 “보다”는 말이 자신의 경험을 배제하지만, 어떤 사람은 시각이 없으면 자신이 존재하는지 조차 알 수 없기에 “보다”는 경험과 삶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인 언어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의 경험으로 언어를 구성할까?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선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님, 그 집단에서 최고의 “타자”라도 찾아서 그 사람의 경험과 말을 기준으로 삼을까? 인종, 계급, 집단, 나이, 젠더, 섹슈얼리티, 성적 지향 등등의 경계로 해서 무조건 커밍아웃하게 해선 가장 “타자”를 선정하고 그 사람의 말을 사용할까? 이런 발상 자체도 말이 안 되는 코미디지만, ‘장애’인 ‘이성애’ 흑인 남성과 비’장애’인 이반 백인 여성이 있다면 누가 더 “타자”야? “정치적 올바름”이란 말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고 실현 불가능한 판타지일 뿐이다. (앞서 말한, “올바름”의 기준이 없는 건 이래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말이 불편한 이유는, 이 말이 특권을 과시하고 싶어 안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반queer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이반인권운동을 할까? ‘장애’인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 ‘장애’인권운동을 할까? 트랜스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서 언어를 모색하고 운동을 할까?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한 행동을 하는 건 결국 그럴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거나 어떤 형태로건 기존의 제도에서 이득을 보고 있음을 과시하는 격이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르”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언제 의도를 따졌냐고(모든 “의도”는 선하기 때문에 “의도” 따위엔 흥미 없다). 받아들이는 루인으로선 짜증나고 부아가 치민다고.

그리하여 그냥 자신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한국인은 미국 흑인 작가의 작품이나 유럽의 백인 작가의 작품에 대해 비평할 수 없느냐면 그렇지도 안잖아.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위해선 비평이 불가능하지만 한국인이 미국 흑인 작가의 텍스트를 비평하는 건 다른 지역, 다른 맥락으로 살아온 경험을 통해 ‘다른’ 읽기를 할 수 있기에 비평이 가능하다. 어떤 지점에 대해 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성애’ ‘여성’으로서 읽기, ‘레즈비언’ ‘남성’으로 읽기, 트랜스 이반 ‘장애’인으로 읽기 등등. 관건은 이런 해석을 유일한 해석으로 간주하며 다른 해석을 “틀렸다”고 매도하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것. 이렇게 읽을 때에야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고 다양한 목소리가 가능하다고 몸앓는다. “정치적 올바름”은 본질주의이기에 개개인을 변할 수 없는 존재가 화석화하고 그 사람의 경험을 절대적으로 간주하여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