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 이반/퀴어와 그 가족들 그리고 혐오증

2006.03.05. 아침 9시 조조. 2,500원.

01. 어제 밤, 갑자기 속이 매스껍고 어지러웠다. 뭔가 잘못 먹은 것이 있나 했지만 딱히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속을 달래야지 하고, 매실차를 마셨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몸살기운이란 걸. 이런, 이런. 지난겨울, 아니 최근 몇 년 동안 (알러지성 비염을 제외하면) 감기라곤 걸린 적이 없고 4년 전에 걸린 몸살이 가장 최근에 걸린 몸살이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낮에 열어둔 창문 너머로 부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었다. 그 때문인가.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안 좋은 예감. 조조로 [브로크백 마운틴]과 놀 예정인데.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치 일주일 앓고 몸을 추스른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이불 속에서 뒹굴 루인이 아니다. 괜히 일정을 세우면 그대로 하는 “새마을 형 인간”이라고 루인 소개글에 적었겠느냐고.

02. [나의 남편 베티My Husband Betty]란 제목의 책이 있다. [내 남편은 나의 옷을 입는다My Husband Wears My Clothes]란 제목의 책도 있다. 둘 다 미국에서 출판한 영어 책이다. 당연히(!) 루인도 아직 안/못 읽었다. 도서관에 주문한 상태. 제목만 읽어도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내 남편은 게이다My Husband Is Gay]란 책도 있다.)

읽지도 않았고 번역도 안 된, 아니 결코 번역이 안 될 것만 같은 책 제목을 나열하는 이유가 뭘까.

맞벌이 부부로 아내가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가면, 퇴근해서 집에 혼자 있으면서 아내의 옷을 입는 남편들이 있다. 미국의 사례지만 한국에도 있다고 짐작한다. 몇 달 전부터, 이와 관련한 글을 쓰고 싶었다. 언젠가 이와 관련한 논문을 쓸지 책을 쓸지는 알 수 없지만 관련 글을 쓰리란 걸 안다. 그 남편의 생활을 접하며 아팠다.

이 글을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를, [브로크백 마운틴]을 이미 즐긴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직 안 봤지만 곧 볼 예정이라도 이 글을 읽었다고 해서 별 방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스포일러가 없을 것 같으니까. (추가: 조금 있음.)

일전에 카페 “빵”에서 [2006 퀴어 오디세이]를 해서 갔다가 옴니버스 영화 [동백꽃 프로젝트]의 한 편인 [동백 아가씨]를 봤다. 자살한 남편의 옛 애인을 찾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 애인은 ‘남성’이었고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이 게이인 걸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역시 이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이성애-젠더 사회에서 살면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나이 40 즈음 되어서야 자신이 레즈비언인 걸 깨닫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시기는 누구나 다르다. 이성애혈연가족주의가 완강한 사회에선 누구나 이성애결혼을 해야 하고 그렇기에 자신의 성정체성은 무시당한다. 비’이성애’자/이반queer/트랜스지만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기에 이성애혈연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이성애결혼을 하는 사례가 많다. 그 결과는 다양하다. 아내가 출장을 가면 아내의 옷을 입는 사람도 있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이반으로서의 생활도 계속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무수한 가능성들이 있다. 문제는 결혼한 상대방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반응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에니스의 아내 알마(미셸 윌리엄스 분)가 에니스와 잭의 관계를 목격한 후의 반응을 보며, 미셸 윌리엄스(알마)의 연기력에 소름끼쳤다. 홍보지에서 이 영화에 보낸 많은 수상이나 찬사가 “남우주연/조연상”에 집중해 있지만, 미셸 윌리엄스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이 장면으로 인해 이 영화는 더욱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만약 이 영화가 에니스와 잭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주변 사람들의 고통과 갈등을 그리지 않았다면 실망했을 것 같다. 게이지만 가사 노동은 “당연히” ‘여성’의 몫으로 여기는 에니스의 행동들은 에니스의 성격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들이다. 자신을 게이로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덴 이런 요소들이 동시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혼 이후, 만난 여성(이름이…;;;)이 “사랑은 재미로 하는 게 아니”다란 얘길 하지 않았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영화 초반, 둘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고 나서 하는 “난 게이가 아냐”, “나도 아냐”라는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이 말이 나올 것을 기대했다는 듯이. 이 말을 들으며(엄밀하게는 자막을 읽으며-_-;;) 일주일에 두세 번 동성과의 성관계를 가지지만 자신을 이성애자로 부르고 이반으로 불리는 걸 극도로 꺼리는 어떤 사람의 얘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에니스와 잭이 나중엔 게이일까? 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성정체성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60살에 트랜스 정체성을 깨닫고 성전환 수술을 받는 사람도 있다. 이성애자로 정체화 하면서도 동성과 연애를 하거나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도 있고 동성애자로 정체화하면서도 이성과만 연애를 하고 성관계를 맺는 사람도 있다(양성애자로 정체화 하는 것도 아니다). 에니스와 잭이 자신들의 성정체성을 어떤 식으로 명명할런 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에니스는 이반혐오증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잭은 이반혐오증으로 살해된다. (잭이 죽었다는 말을 처음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에니스와 도망치겠지, 하는 기대로. 그랬기에 혐오증살해로 죽는 장면에서 더 많이 울었다. 더 많이 무서웠다.)

에니스의 딸이 결혼한다는 말에, ‘남자’친구가 정말로 사랑하느냐고 되묻는 말에 아픔이 전해왔다. 에니스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불안했던 것이다. 그건 자신의 “거짓” 결혼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이성애를 강제하는 사회에서 비’이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의 고통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아마, 또 볼 것 같다. 꽤 전에 받아두고도 안 보고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고 몸앓는다. 어쩌면 몇 번 더 극장에서 볼지도 모른다.

※엔딩으로 두 곡이 흐른다. 가사가 어쩌면 이리도 내용과 잘 맞을까.
Willie Nelson – He Was A Friend Of Mine
Rufus Wainwright – The Maker Makes.
불이 밝게 켜진 영화관을 나서며 사운드트랙을 사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살지 안 살지는 좀더 고민하겠지만, 그 동안은 이렇게 녹음한 걸로 위로받아야지. (가사는 직접 찾으세용, 쉽게 나와요.)

음란서생: 퀴어같은…! 능청스러움의 미덕

2006.03.03. 아침 9시-조조: 2,500원

01. 아침 9시에 즐기는 영화가 좋다. 매일같이 하는 일이 있는데 9시 영화를 보면 그런 일상에 별다른 영향을 안 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루인의 심리적 통금은 저녁 5시. 이 시간 즈음 나스타샤와 놀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음란서생]도 아침 9시를 선택.

02. 스포일러 없는 감상문이 가능하랴.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며, 이 영화의 능청스러움에 박수를 보냈다. 이 영화의 미덕은 이 능청스러움에 있다고 느꼈다.

오랜 포르노그래피의 논쟁에서 루인의 잠정적인 결론은, 음란은 좋지만 폭력은 반대한다는 것. 포르노를 표현의 자유 운운하면서 무조건 옹호하는 건, 누구에게서의 표현의 자유냐는 질문(표현의 자유는 애초 아무 말이나 다 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해당 하는 것이 아니라 발화의 자유가 없거나 억압받고 있는 사람을 위한 권리이다)과 폭력을 음란으로 여기는 문화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스너프 필름처럼 ‘여성’을 죽이는 것을 음란하다며 이를 금지하는 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건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 세상에 차별/폭력이란 없다는 전제에서나 가능하다. 그래서 [음란서생]이란 제목을 접하고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지극히 진부하다. 그것도 많이 진부하다. 이 정도 음란이면 다른 영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음란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이 영화를 접하면서 가졌던 불편함은 마초 같은 ‘게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를 볼 때 느끼는 그런 불편함을 여기서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게이’영화에선 클리토리스란 단어를 듣곤 먹고 있던 음식을 토하는 장면을 통해 여성혐오를 드러낸다. 이 영화도 그런 지점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물론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이반queer영화라고 자처하지 않지만.

루인은 이 영화를 접하는 내내 세 ‘남성’의 ‘동성애’ 욕망을 느꼈다. 윤서(한석규 분)와 광헌(이범수 분), 황가(오달수 분) 사이의 사랑 이야기라고. 서로를 향한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여성’을 “거래”하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중 하나다. (그래서 읽기에 따라 상당히 폭력적인 영화다.) ‘이성애’적 상상력 혹은 그런 “지저분한 소설”은 서로를 향한 욕망을 기존의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가면이라고 해야 할까. 젠더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성애’ 결혼을 강제하는 것은 ‘남성’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장인과 사위 간의 (‘남성’ ‘동성애’적)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즉 젠더에 기반 한 이성애 구조는 ‘남성’ ‘동성애’ 욕망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다. ‘게이’ ‘남성’에 대한 혐오는 간접적인 방식이 아닌 직접적인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영화는 이렇듯, ‘남성’간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여성’을 매개하고 있음을 너무도 잘 그리고 있다. 남성들끼리 성행위를 실습(?, 연습?)하는 장면은 이를 잘 드러낸다. 욕망하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기에 금기를 지키는 척 하면서 표현하는 것이다. 후반부에, 윤서를 구한 광헌을 죽이려는 부분에서 윤서가 절실하게 광헌을 살리려는 모습은 둘(혹은 셋) 사이의 애정이 “단순한 우정” 이상임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들은 음란함이 누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며 마초적인 ‘게이’들이 표현하곤 하는 ‘여성’혐오나 굳이 ‘게이’가 아니어도 극장에서 흔하게 접하는 영화에서 쉽게 접하는 음란함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장점 중 하나는 마지막 장면이라고 느끼는데, 여기서 능청스러움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섬으로 간 윤서가 새로운 줄거리를 얘기하는데 그 내용이 S/M+게이 관계다. (이때의 S/M은 어느 정도 편견을 가지고 묘사하는 점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윤서, 광헌, 황가의 능청스러움이 재밌었다. 그러면서 영화에서의 음란은 ‘이성애’적 음란이 아니라 금기를 깨고 ‘동성애’적 욕망을 발화하는 그 찰라, 라고 느꼈다. 비’이성애’에 대한, 이반에 대한 혐오로 읽힐 수도 있을 법한 이 장면들이 별로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고 금기에서 벗어난 발화의 능청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축인 정빈(김민정 분)은 근래 들어 접한 영화 중 드물게 짠하게 다가왔다. 슬펐다. 다음엔 정빈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우선은 여기까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영화라는 점에서 볼 만한 영화다.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오늘따라 몸이 좀 산만해서 글을 쓸 상황이 아니다. 태터툴즈 클래식에서 0.961로 바꾸려다 실패했는데 그 순간 글을 쓰고 싶은 몸이 사라졌기 때문;;; 담에 다시 쓰고 싶다. 한 번 더 즐기고.

두근두근 걱정

3월의 첫 날이 노는 날(! -_-;;;)이라, 참 다행이다. 그렇지 않고 2월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3월을 시작해야 한다면, 정말… 이란 몸앓이를 했다. 어제, 아주 조금 비가 내리던 길을 걸으며.

늦잠을 잤다. 딱히 피곤할 것도 없는데 며칠 째 밤 11시만 넘어도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는 덴 지장이 없었는데 오늘은 긴장이 풀렸는지 늦잠을 잤다. 핸드폰 액정을 보니 9시를 몇 분 남겨둔 상황. 늦은 아침을 먹고 읽다 만 책을 마저 읽고, 오늘부터 삼, 사십 여일 가량 걸릴 예정의 [Queer Theory]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한동안 뭘 시작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시간을 보냈다.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일이 개강이라고 해서 수업이 있는 건 아니다. 수업은 월, 화 이틀이고 조교 출석체크도 수요일이라 목요일이 개강이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는데도, 조급함을 느끼고 있다. 2년 전, 처음으로 여성학 수업을 신청하고 개강을 기다리던 그때처럼.

페미니즘을 여성학이란 수업을 통해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딱, 2년 전이다. 물론 그 전에도 책은 조금씩 읽었지만, 잡식에 체계적이지 않은 독서습관으로 그냥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그렇게 읽다가 수업을 통해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고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여성학 과목을 신청했다. 걱정은, 수업 듣는 사람들 중 루인이 가장 무식할까봐, 였다. 성적이야 신경을 안 쓰는 편이기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어렵거나 루인 혼자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면 어떻게 하나로 수강 취소도 고려했었다. 평소 물을 잘 안 사마시지만 그날은 물을 한 통 샀고 수업이 시작되길 기다리면서 다 마셨다. 긴장하면 생기는 버릇이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대학원에까지 왔다. 그리고 지금, 2년 전의 그런 몸으로 긴장하고 있다. 작년 가을, 비록 중간에 그만두긴 했지만, 몇 주간 대학원 수업을 청강 했기에 어느 정도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고 각오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걱정과 두려움으로 긴장을 놓기가 어렵다. 결국은 어떻게 놀 것인가의 문제이지만, 좀더 팽팽한 긴장 속에서 놀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족한, 너무도 부족한 영어 실력이야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어떻게든 따라간다고 하면 되겠지만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한 걱정이 사실 더 크기도 하다.

무식한 건, 남들보다 모르는 건 이제 그다지 걱정이 아니지만―이제 좀 안다가 아니라 모르는 건 수업을 통해 배우면 되기 때문이다― “바보”가 될까봐, 걱정이다. 즉, 불편한 상황에서 침묵하지는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다.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불편한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곤 한다. 누군가가 배려해주겠지, 하는 알량한 기대를 가지고. 하지만 누구도 루인을 대신해서 말해주지 않으며 배려해주겠지 하는 기대는 착각일 뿐임을 안다. “타자성”을 침묵한다는 건, 결국 죽음과도 같은 일임을,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재단되도록 내버려 두는 일임을 안다. 알지만, 여전히 침묵한다. 바로 이것이 두렵다. 어떻게 발화를 시작할 것인가. 침묵하면 하루 종일 속상하고 화가 나서 몸이 아프지만 발화하면 때로 괜히 발화한 건 아닌가 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발화하고 후회하는 것 보다는 침묵하고 발화하지 않음을 후회하는 것이 더 아프다는 것도 이제는 조금 안다.

처음으로 발화하기가 어렵다. 어디서건 마찬가지다. 그렇게 다짐하고 발화하겠다고 준비를 하는 날은 분명 목이 쉬고 준비한 물을 금방 다 마시겠지만, 첫 시작이 중요하다. 타인의 폭력 앞에서도 헤벌쭉 웃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M_ +.. | -.. | 이때의 “바보”는 당연히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의 그런 것일 뿐, 당사자는 그 상황에서 협상 중에 있다. 발화하는 것이 좋은지 침묵하는 것이 좋은지 혹은 다른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좋은지로.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