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살벌한 연인: 맥락, 불필요한 죄의식 걷어 치우기

2006.04.19.21:15, 아트레온 2관 F-7 [달콤, 살벌한 연인]
기본적으로 스포일러는 없지만, 영화를 즐기는데 방해를 줄 수 있는 해석일 수는 있어요. 말하나 마나.

#1
그렇지만 상부의 군인들만 욕할 수는 없는 게 대중을 대신하여 기자들이 그 ‘이유’라는 걸 묻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 모두는 ‘이유’에 중독 돼 있다. 이유가 공급되면 안심이 되고 이유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김영하, “복무염증과 애인변심” 씨네21 539호(2006)

문득 [올드보이]가 떠올랐다. 작년인가, 아무런 흥미도 없었던 그 영화를 접한 건, 세미나 텍스트로 사용한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결국 세미나 텍스트로 하진 않았다. 물론 이 영화가 아니라 다른 영화를 떠올릴 수도 있다. 어떤 영화든 상관없는데, 루인이 기억하는 한국 영화의 상당수가 기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라는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그 이유를 밝히는 순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왜 살인을 했는지, 왜 버림 받았는지, 주인공의 불행 혹은 성격은 어린 시절의 어떤 고난으로 인한 것인지, 등등 이유/기원을 축으로 전개한다. [달콤, 살벌한 연인]은 이런 기원을 축으로 하는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는 이미나(이미자)가 왜 “살인”을 했는가, 각각의 “살인”을 한 동기는 무엇인가엔 별다른 관심을 안 가진다. 첫 번째 “살인”만이 지나가는 말로, ‘아내’폭력 피해경험자로서 정당방위로 남편을 살해했다는 내용이 나올 뿐이다. 영화 전체적인 흐름이 살인의 동기를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으로 “살인”을 하는지 맥락을 좇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여기서 출발한다.

#2
결혼 한지 6개월 만에 이혼을 선택하면 “참을성이 없다”며 욕한다. 하지만 10년 넘게 혹은 20년 넘게 살다가 이혼 소송을 내면 “지금까지 잘 살았으면서 이제 와서 이혼하는 이유가 뭐냐?(애인이라도 생겼냐?)”라고 반응한다. ‘아내’폭력 가해 남편의 경우 대개 결혼 3개월부터 폭력을 시작하지만, 폭력을 시작하는 초기든 10년을 넘었든 항상, “아내”/’여성’에게 참고 “지혜롭게 해결”할 것을 요구한다. 병원에 실려 가거나 언론이 보도할 정도가 되면 “왜 진작 이혼하지 않고 참고 지냈냐”고 ‘여성’을 비난한다. 정당방위로 방어하다 “남편”을 죽이면 고의에 의한 살해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폭력 가해 남편을 살해한 기사가 인터넷에 뜨면, 리플 중 상당수는 여전히 “어떻게 남편을 죽일 수 있느냐”, “이거 무서워서 결혼 하겠냐”라는 식의 피해경험’여성’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인터넷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라 경찰서나 검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피해경험’여성’은 언제나 자신이 가해자라도 되는 것 마냥, 고개를 숙이고 반성하는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남편”이 칼을 들고 죽인다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피하다 “남편”이 죽기라도 하면, “꼭 죽여야 했냐”, “고의로 죽인 것은 아니냐”란 소리를 경찰서와 재판소에서도 듣기 때문에 당당하게 정당방위였음을 주장했다간 갖은 비난이 빗발칠 것을 감수해야 한다. 정당방위였어도 “백배 사죄하는 심정”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표정으로 있어야 한다. 이런 “반성의 기미”가 없으면 “선처”나 “장상참작”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 영화는 바로 이 지점을 뒤집고 있다. 이미나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함을 알고 있기에 비록 “살인”으로 괴롭다 해도 “잘못”했다며 “반성”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한국 영화에서 이런 캐릭터가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불필요하지만 ‘이성애’-젠더의 가부장제 사회가 강요하는 “죄의식”을 걷어 치웠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꽤나 몸에 든다.

#3
물론 중간 중간에 꽤나 불편한 장면들이 나온다. 감독이 젠더 감수성이 있었다면 이 영화는 더 재밌는, 어쩌면 루인에게 에로틱한 자극을 줄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코미디 장르라는 형식답게 재밌다. 하지만, 2006년의 한국의 ‘주류’ 문화를 모르는 사람에겐 웃음 포인트가 다를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일테면 네이버나 싸이가 나오는데 이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른다면 받아들이는 감정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텍스트 해석은 텍스트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맥락 및 해석자의 맥락과 연동한다는 의미이다.)

마무리도 잘 했다고 느꼈다. 구질구질한 청승이 아니라 영화의 전체적인 색깔로 잘 마무리했다.

‘정상’가족이라는 배제의 폭력

수업 예습에세이로 4월 4일에 쓴 글. 일종의 리뷰와 같은 성격이지요.
이재경씨의 논문은 여기로라고 하고 싶지만 알아서 찾으세요. 자꾸 깨지네요. 힛.
5월 2일까지 네 편의 소논문을 써야하는 상황이라 좋으면서도 조급한 몸인 상태.
어제 즐긴 영화 리뷰는 내일로. 흑흑.

1. 이재경 <한국 가족은 ‘위기’인가?: ‘건강가정’ 담론에 대한 비판>
― ‘정상’가족이라는 배제의 폭력

[#M_ 읽기.. | 접기.. |
몇 년 전, 수업 시간에 “가족”에 대해 배우면서 독신은 가족이 아니라 가구란 얘길 듣고 당황했다. 비록 자취란 형식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가족으로 부르고 있었기에 독신 혹은 혼자 사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 가구라고 표현한다는 말은 기존의 가족개념을 어떤 식으로 구성하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이후, 이른바 “건강가족법”이란 것이 생긴다는 얘길 들었을 땐, 경악했다. ‘건강’가족이라고? 그렇다면 루인은 “병든” 가족이란 얘기야? 비록, 기존의 이성애혈연가족주의에서 겪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이 분위기를 겪으며 가족제도를 비판하고 독신‘가족’으로 살고 있지만 동시에 트랜스/이반(정체성)으로서 가족 구성권은 쟁취할 권리이기도 하다. 이런 루인의 경험에서 ‘건강가족(법)’이란 의미는 뭘까.

(학부 시절 수학을 전공하며) 모든 정의(定義, definition)는 승인과 배제 그리고 고착시키려는 욕망의 표현이라고 느꼈다. 정의한다는 건, 경계를 만들고 그리하여 사회에서 ‘승인’하려는 범주와 그렇지 않은 ‘비정상’적인 범주를 나누는 행위이며 법제화는 이런 욕망을 명문화 한 것이라고 의심한다. “건강가정기본법”이라는 것 역시 이런 정의/법제화의 구조에서 그렇게 벗어나 있지 않다. ‘건강가정’/‘건강가족’이라는 표현 속에 이미 어떤 특정한 형태의 가족구성만을 ‘정상’적인 형태로 간주하고 그렇지 않은 구성은 ‘건강’하지 않은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때, 어떤 형태를 ‘건강’하다고 말할 것인가와 이렇게 정의(배제)할 수 있는 권력은 누가 가지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누가 무슨 권력으로, 그리고 왜 무슨 이유로 특정 가족 형태만을 ‘건강’하다고 명명하고 이를 통해 그런 가족구성에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다른 ‘가족’ 형태를 배제하려는 이유는 뭘까. 이런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해서 지속하는 걸까.
‘현실’적으로 별로 존재하지 않지만 “당연”히 절대 다수라고 착각하는 이성애혈연가족 외에도 무수한 가족 구성이 존재한다. “가족해체”를 우려하는 언설들은 이렇게 이데올로기/판타지로서의 가족형태와는 다른 구성을 가족이 아니라 ‘결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결손가정문제”, “편부모 가정에서의 비행청소년 문제”등과 같은 인식들은, 한부모 가족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겐 문제가 있을 거란 주변의 시선-정상가족이데올로기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임에도(즉, 이른바 “건강가족”이 문제의 원인임에도) 해결방안으로 제시하는 오류에서 생기는 “문제”며 인식이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결혼하고 살기 위해선 맞벌이가 필수이고 이로 인해 때로 “주말부부”나 “기러기 가족”이 생기는 건 ‘필연’이지만 “건강가족(법)”은 이런 경제적이고 계급적인 문제를 무시하는, 가족이 모여 살수 있는 특정 계층만을 감안하며 동시에 그 계층적 특성을 ‘보편적 기준’으로 제시하는 셈이다.
혼자 사는 독신가족은 가족이 아니라 가구라고 표현해야 한다는 언설은, 잠깐 혼자 떨어져 살고 있을 뿐 결국 “돌아갈” ‘진짜’ 가족은 따로 있으며 혼자 사는 사람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건강가족법”은 그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동성 간의 결혼은 인정할 수 없다”고 법으로 선언하고, 트랜스는 사실 상 결혼 자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며, “장애인이 왜 결혼하려고 하느냐”고 말하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사람은 가족을 구성해야 한다는 건강가정 기본법의 법조항 제8조1항(주1)의 인식은 모든 사람이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주2)할 뿐 아니라 이런 질문 자체를 은폐/배제하(려)는 논리다. ‘이성애’ 비‘장애’인의 경험만을 반영하며 현재의 “가족 문제”의 원인을 해결로 제시하려고 할 때, “가족 해체”는 더 심해질 뿐이다.

주1: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여야 한다”가 그 내용이다.
주2: “모든 국민은 가족을 구성해야 한다”는 모든 사람은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성립할 수 있다고 느낀다._M#]

분노의 사진/흉터/부치 미스티끄

제 8회 서울여성영화제
2006.04.14.14:00 아트레온 4관 F-7, [분노의 사진/흉터/부치 미스티끄]

세 편의 영화를 같이 즐길 경우 생기는 문제는, 특히 루인 같은 인간일 경우 한 편의 영화에 열광해서 다른 작품의 내용을 잊어버린다는 것.

#[분노의 사진]
시각 이미지는 문자보다 그 효과가 더 빠른 편이라고 평가한다. 이런 평가는 특정 누군가의 경험만을 반영하는데 루인에게 이미지를 통한 효과는 문자만큼이나 혹은 문자보다 더 느리다. 아무튼 사진작가의 사진과 다큐멘터리는 이런 시각 효과를 이용한 흑인 ‘레즈비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

나레이션 중에 “어떤 사람은 사진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 내용을 본다”와 비슷한 내용의 말을 했다. 이 말이 와 닿았다. 어떤 사람에겐 신기한 볼거리거나 “문화적 충격”일 테지만 어떤 사람에겐 그 사람이 처한 맥락이 떠오를 것이다.

#[흉터]
인상적이었던 만큼이나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벌써 정리하기엔 아직 언어가 빈약하다.

#[부치 미스티끄]
이 다큐멘터리를 즐기다 바로 앞의 두 편을 거의 놓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광이란 말로 요약 가능.

젠더 혹은 ‘이성애’ 관계 바깥에 있는 이들이 ‘이성애’-젠더 구조에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욕망과 ‘이성애’-젠더 구조가 요구하는 모습 사이에서 협상하는 것.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레즈비언’ 관계가 혐오범죄로부터 그나마 안전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부치”라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른바 ‘남성’스러운 모습을 선호하고 ‘여성’다운 모습을 싫어한다는 이미지. 거칠고 힘이 센 모습. 물론 이런 이미지/환상은 다른 모습을 지우는 폭력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인터뷰를 한 사람 중 한 명이 했던 말 “부치는 죽지 않는다. 다양해질 뿐이다.”라는 말에 열광했다. 아아, 너무 좋아!

또 다른 접근은 부치-‘레즈비언’과 트랜스와의 관계. 루인은 이 다큐를 즐기며 부치와 FTM(female to male)의 밀접한 관계를 느낌과 동시에 트랜스가 어떻게 이반queer이론의 범위 내에서만 묶이는지를 느꼈다. 부치와 트랜스’남성’의 경험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인터뷰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트랜스이론을 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갔다는 얘기에서처럼, 둘의 관계는 밀접하다. 혹자는 둘 사이에 있어, 과거를 재현하는 방식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 만큼이나 감독은 트랜스를 외면하고 있다. 읽기에 따라선 드랙 킹이나 트랜스로 읽을 지점들도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선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감독이 전제하고 있는 ‘레즈비언’은 어떤 ‘정체성’일까. 자신을 부치-‘여성’으로 말하는 사람은 부치라고 한 걸까? 그렇다면 ‘남성’으로 환원하지만 자신을 부치-‘여성’으로 말하는 사람은?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는 내내 이 지점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있다. 물론 내용을 전유하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트랜스와 트랜스이론이 기존의 다른 모순을 설명하는데 명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전유할 수 있다. 루인 역시 최근, 몇 명의 페미니스트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며 트랜스 이론으로 전유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작가들은 트랜스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지만 루인은 많은 아이디어와 가능성을 느꼈기에 맥락을 설명하며 모색의 방향을 욕망했다. 하지만, 마냥 전유하는 건, 문제가 있다. 앎의 배타적 경계를 세우는 것도 문제지만 탈맥락적으로 전유해서 마치 자신의 의견인양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니까.

뭐, 어쨌거나 다큐멘터리는 전체적으로 좋았다. 특히나 화장실 문제는 너무너무 열광. 이건 [메종 드 히미코]에서도 느낀 부분. 언젠가 한 편의 글로 쓰고 싶은 문제이기도 한데, 도대체 화장실에 갈 땐 어느 화장실에 가야할까? 치마를 입은 날은 ‘여자’화장실에, 바지를 입은 날은 ‘남자’화장실에 가야할까? 어릴 때부터 습관처럼 가던 곳에 가지만 언제나 불편하다. 그래서 종종 상상한다. 굳이 화장실을 젠더로 나눠야 할까? 다큐멘터리에선 부치 화장실을 따로 만들자고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커밍아웃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커밍아웃을 한 경우라면 혹은 했든 안 했든 상관하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여전히 배제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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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영화제가 끝났다. 아쉬움과 함께 많은 자극으로 에로틱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