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한 초콜렛, 앰 아이 블루?: 이반/퀴어 성장담

며칠 전, 낭기열라에서 나온 두 권의 소설을 읽었다. [앰 아이 블루?]는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를 엮은 단편집, [씁쓸한 초콜릿]은 일종의 성장담.

[앰 아이 블루?]는 종종 들리는 몇몇 블로그에서 호평을 읽었기에 살짝 기대를 한 것도 있지만 “동성애”관련 단편집이라는 점 때문에 기대를 좀 했었다. 이후 우연히 낭기열라 블로그를 알게 되고 그곳에서 [씁쓸한 초콜릿] 관련 얘기들을 읽으며 끌렸었다. 물론 책 내용과 관련한 글은 읽지 않았는데(루인이 텍스트와 노는데 방해 되니까), 초콜릿이라는 제목 때문에 읽고 싶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앰 아이 블루?]는 꽤나 매력적인, 지금 루인이 가지는 고민과 겹치는 내용들이 많아 재밌었는데, 예상치도 않은 문장 하나가 허를 찌르듯 다가왔다.

“시작은 늘 그래, 마이클.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먼저 알게 되더라고.”(210쪽)

루인도 그랬다. 루인보다 루인 주변의 몇 명이 먼저 알았다.

그땐 정체성을 그다지 고민하지 않던 시기였다. 그냥 별다른 고민 없이 무덤하게 살던 그때. 남들은 사귀냐고 물었고 당사자는 아니라고 말하던 그런 관계의 상대방이 루인에게 말했었다. “넌, 동성애자인거 같아”(이건 내용을 좀 많이 바꾼 표현. 그렇다고 상대방이 폭력적으로 말한 것은 아니고 다르게 표현했지만 그대로 표현하기엔 미안해서) 라고. 루인은 “아닐 껄”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지금으로선 얼추 맞는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이후 그 사람과는 안 좋은 일이 있어서 다시는 안 만나고 있지만 친구 중 한 명도 같은 얘길 했었다. “루인은 나중에 동성이랑 결혼할 것 같아” 라고. 이런 얘길 조용한 카페에서 주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얘기했었다. 그렇다고 별다른 두려움 같은 건 없었는데, 그래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땐 커밍아웃이나 아웃팅에 대한 개념도 없었지만 아웃팅이 곧 폭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에의 무관심이 곧 동성에의 관심을 의미하진 않지만 뭐 대충 틀린 것도 아니다. 루인이 루인의 정체성/섹슈얼리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전인데, 어떤 사람에겐 이런 모습들이 느껴지나 보다. 재밌는 일이다.

[씁쓸한 초콜릿]은 [앰 아이 블루?]보다 먼저 읽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루인에겐 [씁쓸한 초콜릿]이 [앰 아이 블루?]보다 더 이반queer에 관한 소설로 다가왔다. 루인은 [씁쓸한 초콜릿]을 레즈비언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이야기로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는 동성애자들의 이야기로 표명하고 있고 하나는 그런 얘기를 전혀 안 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아무튼, 두 권의 책을 읽으며 이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한 권도 읽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조만간에 교보에 가야겠다.

트랜스/트랜스젠더-하리수의 협상

이 글 역시 며칠 전 발제문으로 쓴 글의 일부. 아아, 글 한 편 써서 이렇게 여러 번 우려먹을 수 있다니 좋다-_-;;; 조금 수정한 부분도 있다.
전문은 여기로.

이와 관련해서 하리수의 의미를 얘기할 수 있다. 하리수가 등장한 초기엔 기존의 ‘여성성’을 더욱더 강화하고 있다는 점과 “여자보다 예쁜 여자”라는 반응에 불편해하며 하리수를 비판하는 분위기였다. 이후 트랜스들에게서 그럼에도 하리수가 트랜스를 가시화시켰다고 말하자 이런 비판은 줄었지만 그다지 좋은 분위기는 아니다. (루인의 느낌은 “소수자/약자에 대한 관대함”이다. 재수없어.) 루인이 느끼고 있는 하리수는 조금 다르다.

사례1. 즐겨 듣는 라디오 DJ가 하리수와의 일화를 얘기했다. 어느 날 오전, 하리수와 만났는데 목소리가 걸걸하게 나오자 그 DJ는 하리수에게 “목소리 조율이 안 됐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목소리 톤을 조정한 후 다시 얘기를 나눴다고.

사례2. 설날 우연히 TV에서 하리수와 아이비가 나오는 장면을 접했다. 사회자는 하리수에게 아이비의 노래 일부분을 해보라고 했고 하리수는 했다. 사회자는 아이비에게 하리수가 따라한 부분을 해보라고 했고, 했다. 방청객과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이비에 환호를 보냈다.

종종 트랜스들의 행동은 진짜가 아니라 “어설픈 모방”이라는 비판/비난을 듣는다. 하리수를 불편하게 여기는 반응도 이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이런 비난이나 불편함은 사실 “진짜”가 있다는 걸 전제한다. 하리수가 이성애 ‘여성성’을 “모방”하고 있다면 그건 기존의 젠더를 강화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루인에겐 협상력으로 다가온다. 기존의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개 뿐인 젠더구조에서 트랜스로서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트랜스바에서 일하는 거? 활동가가 되어서 운동을 하는 거? (하지만 홍석천은 활동가가 되면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다.) 커밍아웃은 하더라도 아무 말도 안 하는거? 비록 동화(同化, passing)하여 자신의 트랜스 정체성을 숨기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이것은 젠더 억압적인 문화에서 연예인으로 살아남기 위한 전략/협상이 아닐까.
(젠더 구조에서 트랜스에게 가장 바라는 건, “입닥치고 구석에 거슬리지 않게 찌그러져 있어”가 아닐까.)

루인은 위의 두 가지 사례를 접하며 하리수가 젠더의 균열지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트랜스‘여성’의 경우 성전환 수술을 위한 조건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이런 때의 조건은 ‘여성’처럼 행동하기다. 그렇기에 과거의 트랜스 관련 책들에 실린 사례엔, ‘남성’에서 ‘여성’으로 수술을 하고 마취에서 깨어나자 바로 바리톤이던 목소리가 소프라노로 바뀌었다는 식의 묘사가 많다(이런 사례는 의료담론에 식민지화된 결과다). 이런 맥락에서 사례1은 ‘여성’다움, ‘여성’으로 자라고 행동한다는 것은 훈육과 수행의 과정/결과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즉, 트랜스라는 “구역질나는 변태”의 “괴짜 같은” 행동이 아니라 젠더의 구성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사례2는 좀더 불편했다. 방송에서 트랜스 혐오가 드러난 경우인데, 루인에겐 그 장면이 “네가 아무리 여자인척 해도 넌 가짜야”라고 말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동시에 트랜스로서의 삶에서 겪는 슬픔과 그럼에도 나타나는 자부심도 느꼈다. 방송에서 하는 하리수의 행동을 과장되거나 “연기”라고 말한다면 그건 자신이나 다른 연예인들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인데, 이런 인식은 그 자체로 문제다. 젠더는 본질적인 것도 단순히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도 아닌 계속해서 반복하는 행동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비트랜스인 다른 연예인들이나, 트랜스를 “연기”라고 말하는 것 속에는 자신의 젠더 수행은 자연스러운 것이란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젠더가 자연스러운 것이었나.

‘차이’로 시작하는 소통/연대

지난주에 쓴 발제문의 일부. 텍스트는 로즈마리 통의 [페미니즘 사상] 중 7장 “복합문화 페미니즘과 전지구적 페미니즘”. 거칠게 요약하면, 복합문화 페미니즘은 젠더뿐만 아니라 인종이나 계급, 성적 지향 등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며, 전지구적 페미니즘은 제 1세계와 제 3세계라는 지역적 격차가 가지는 문제를 동시에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구분은, 개인의 정체성은 오직 한 가지로만 구성된다는 가정 하에서만 가능하다. 혹은 자신의 여러 정체성들이 기존의 권력과 갈등하지 않는다는 의미거나.
대한민국국적은 루인이 가진 여러 정체성들 중 하나일 뿐이기에 “붉은 악마”나 월드컵의 집단광기는 루인에게 폭력으로 작동한다. 영화 [청연]의 박경원은 민족, 젠더, 계급 등의 정체성들에 의해 끊임없이 갈등한다. 루인이든 박경원이든 대한민국국적의 정체성이 유일한 정체성이라면 그렇게 갈등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개인의 정체성을 오직 젠더만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젠더 정체성은 무수하게 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복합문화 페미니즘을 각각의 하이픈 페미니즘으로 분류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다.

7장을 읽으며 많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복합문화 페미니즘은 사회의 결속을 해친다”(411쪽)느니 “윤리적 상대주의”의 함축적인 의미는 “‘차이’에 대한 강조로 공통적인 요소들을 하나도 보지 못하게 되어 심지어 의사소통도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454쪽)는 식의 해석은 결국 누군가의 기준으로 이야기 하겠다는 욕망의 표현이다. (이런 표현을 들을 때 마다 맑스가 말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란 말을 떠올린다. 도대체 누구를 중심으로 단결하란 말인데. 미국 중산층 백인 ‘남성’ 노동자의 입장으로? 독일 노동자의 입장으로? 오리엔탈리즘을 드러내는 마르크스가 방콕 최하층 노동자의 입장으로 단결하라고 말했을 것 같지는 않다.)

차이의 정치학이 유행하면서 그렇다면 자매애는 없는 것이냐, 운동을 해야 하는데 개인들 이 하나의 소우주처럼 된다면 연대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반론 혹은 반발을 접하곤 한다. 하지만 유사성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차이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이런 차이를 말살하거나 어느 범주에도 들 수 없는 사람은 배제하겠다는 의미이다. (실제 그래왔고 그렇게 하고 있다.)

차이의 정치학에서 차이difference를 말한다는 것은 “우리는 다 다르다”가 아니라 차이를 발명하고 그것이 의미를 가지게끔 하는 ‘관심’difference-권력/해석체계를 문제시 하겠다는 의미이다(루인, 2005, 이랑 블로그에 쓴 글, “차이/관심으로 다시 시작하는 소통과 연대”). 그렇기에 차이를 말하는 순간, 그럼 연대는 불가능하고 자매애는 더 이상 없는 것이냐는 질문은 그 내용 자체를 바꾸어 연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매애의 내용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한때 페미니즘은 레즈비언을 “맘에 드는 여자를 유인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사냥꾼”으로 간주했기에 당시의 자매애는 이성애 젠더로만 구성했었다. 인종이나 계급 논의가 있기 전에 자매애는 오로지 (두 가지 뿐인) 젠더로만 구성했다. 즉, 당신이 말하는 자매애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되물으며 특정 ‘여성’만을 상상하면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명명하고 자매애를 말하는 것 자체를 문제시 하자는 것이다. 연대 역시 마찬가지다. 연대라는 것은 “우리는 모두 같다”,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해 지지한다는 의미이다. 호주제 폐지에서 이성애 ‘여성’들과 레즈비언 ‘여성’, 게이 ‘남성’들이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은 호주제가 가지는 의미가 모두에게 같았고 같은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 아니라 호주제가 (비록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라 해도) 폭력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에 찬성했기에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대를 한다면서 반드시 한 목소리, 같은 내용, 그래서 어떤 반대의견도 용납할 수 없다면 그건 연대가 아니라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횡포다.

그리하여 “복합문화”라는 다중적인 정체성을 말하는 것, “전지구적”이라는 국가/지역의 경계를 말하는 것은 연대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연대 방식에 문제제기 하며 차이를 통해 다시 소통하고 연대를 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