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 페미니즘으로 느끼기: 황우석과 [웰컴 투 동막골]

#01번 글은 일전에 여기에도 공개한 적이 있고요, 02번 글은 발제문으로 쓴 글 중 일부를 고친 글이에요.
이로서 네 편의 글이 모였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완성한다기 보다는 그저 모색하는 과정에 있을 뿐이에요. 그저 그럴 뿐이죠. 흑;;
첫 번째 글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혹은 관계 맺음에 대한 고민: 채식
두 번째 글은 채식주의자로 살면 불편하지 않느냐고요?
세 번째 글은 육식하는 채식주의자

채식주의 페미니즘으로 느끼기: 황우석과 [웰컴 투 동막골]
―채식주의 페미니즘, 모색하며 4/4
-루인

▽채식주의 페미니즘 세미나를 위한 발제문의 일부를 토대로 했어요.

01. 정작 낙농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들이 “생산”한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유 시기에만 생산할 수 있는 우유를 일년 내내 생산하기 위해 각종 호르몬을 주사하기 때문이다. 양계장에선 하루에도 몇 번씩 알을 낳게 하기 위해, 호르몬을 주사하거나 인공조명을 이용한다고 한다. 호르몬을 맞는 젖소나 닭은 모두 암컷이다.
이 글을 쓰면서 황우석 사태를 떠올렸다. ‘여성’의 난자를 대량으로 “채취”하기 위해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과 우유 혹은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 사이에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젠더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식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단면이면서 육식이데올로기와 동물살해가 젠더폭력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드러내는 단면이 아닐까.

02. 이런 음식의 식민주의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잘 나타난다. <웰컴 투 동막골>은 육식의 ‘남성’연대, 채식/육식이데올로기가 식민주의와 맺는 관계, 육식과 군대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순박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채식주의자인 동막골 사람들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하는” 육식가 군인의 모습은 채식을 하면 성격이 순해진다거나 육식을 하면 성격이 포악해진다, 채식을 하면 힘을 못 쓴다거나 육식을 해야 힘을 쓸 수 있다는 언설들을 재현한다. 주중엔 감자 등으로 수프를 끓이지만 주말이면 꼭 고기를 넣은 수프를 끓이고 이 고기 수프 때문에 주말에만 남편도 같이 수프를 즐기며 만족한다는 내용의, 19세기 혹은 20세기 즈음에 쓴 외국 소설을 읽은 흔적이 몸에 있다. 한국 소설에서도 빈곤과 약함을 밥상이 “풀밭”이란 방식으로 그리고,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다는 언설들과 함께 고기반찬이 있어야만 풍성하고 괜찮은 살림을 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도 비슷한 상황인데, 멧돼지를 “무서워”하는 사람은 감자 등 채소를 주식으로 삼는 동막골 주민들이며 이런 멧돼지를 살생하는 사람들은 육식가인 군인이면서 외부인 이다. 멧돼지를 살생한 군인들은 그간의 어색하던 관계를 늦은 밤, 육식을 통해 해소하며 ‘남성’연대를 다진다.
때 묻지 않은 모습으로 지켜져야 하는 공간으로서의 동막골은 환상 속에서 그리는 고향이란 이미지와 열강 속에서도 “조용한 아침의 나라”란 이미지를 가졌던 한국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공간이다. 여일(강혜정 분)의 몸은 남북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대리 분쟁지역, 돌아가고 싶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고향, “세상 물정 모르고 순박한” 동막골을 체현하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여일의 죽음은 군인들이 뭉칠 수 있는 확실한 계기가 된다.
요즘의 부시가 일으킨 정쟁도 과거 식민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도 그 명분은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이다. “야만”스런 동양의 가부장제에서 억압 받는 이들을 “해방”하고 지켜주겠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웰컴 투 동막골>은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채식하는 동양의 약하고 순박한 이들을 육식으로 건강하고 강한 ‘우리’들이 지켜줘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육식 이데올로기는 다른 영화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영화 <쉬리>에서, 초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훈련받는 군인들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최민식이 뛰어난 군인 이방희(김윤진 분)에게 고깃덩어리를 던져주며 격려하는 모습이 나온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은 궁정에 들어가 가장 먼저 먹는 음식이 닭‘고기’인데 고기가 있어야만 푸짐한 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장면이다.

글쓰기 혹은 흔적 찾기

한 번도 루인의 채식경험 혹은 채식에 대한 주변의 반응에 정치적인 맥락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루인의 어떤 행동들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그저 파편처럼 흩어진 별개의 반응일 뿐이었다. 하지만 ‘불순’한 의도로 루인의 채식경험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흔적들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몸에 있지만 해석하지 못해 앙금처럼 가라앉아있던 흔적들을 글쓰기로 휘저으니 투명한 주체인양 착각하고 있던 과거 그리고 현재의 루인은 위치를 가지는 행위자로 변했다.

채식에 대한 글쓰기는 루인에게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아니, 채식경험에 대한 글쓰기만이 아니다. 루인의 경험을 읽는 모든 글쓰기는 이런 의미로 다가온다. 루인의 삶을 해석하고 그것을 문자로 표현하면서 과거의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흔적들이 실은 여러 가지 결로 얽혀있는 일임을.

내일 있을 세미나 발제문으로 쓴 글의 일부분

육식하는 채식주의자

#일전에 채식주의에 관한 팁을 쓴 적이 있다. 이 글은 그 짧은 글에서 시작한다. 세미나한다고 쓴 발제문과 세미나 자리에서 우연처럼 한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란 말이 겹쳐지면서 이런 글이 나왔다.
첫 번째 글은 여기
두 번째 글은 여기

육식하는 채식주의자
―채식주의 페미니즘, 모색하며 3/4
-루인
▽이 글은 채식주의 페미니즘 세미나의 발제문과 루인의 블로그, [Run To 루인]에 쓴 글을 토대로 썼어요. 채식주의 페미니즘 세미나는 이랑 세미나의 일부가 아니라 전혀 다른 모임이랍니다.

1994년 늦은 여름 혹은 가을 즈음, 처음으로 생명과의 관계를 고민하면서, 사실은 단식을 선택할까 했다. 인간중심주의, 인간이기주의에 환멸을 느꼈고 다른 생명을 죽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단지 먹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인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소나 돼지가 사람이 먹기 위해 존재한다면 사람은 호랑이가 먹기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고민은,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접하리라 추측하는, 그럼 식물은 생명이 아닌가, 하는 문제로 연결되었다. 동물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고 식물을 죽이는 것은 안 부당한가. 이런 연유로 단식을 고민했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이 죽고 싶지 않음의 ‘비루한’ 욕망으로 채식을 선택했다.
[#M_ 계속 읽기.. | 재미없으니 접기ㅋㅋ;;;.. |
이런 시작과는 달리, 오랫동안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로 정체화하지는 않았다. 시작이 비건vegan이 아니었다는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지금도 모르지만), 유제품을 먹는 건 채식이 아니라고 막연히 믿었기에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라고 부르기 보다는 편식을 한다고 말하는 편이었다. 물론 남들은 “너 채식주의자야?”라고 물었지만 그런 질문에 대답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로 부를 수 없었고(당시엔 비건, 아니 채식주의에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지만 비건이 아니면 채식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막연하게나마 믿었다) 그래서 채식을 하게 된 동기를 말할 수도 없었다. 채식의 동기를 말하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당시의 상황이 그때의 고민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있지만 상대방이 루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지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발화를 시도하기도 전에 상당한 왜곡부터 접했기에 발화하려는 의지 자체가 꺾인 상태였다. 그저 루인은 편식을 할 뿐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언젠가 이랑세미나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알기 전과 후로 삶을 얘기하듯, ‘우리’들은 페미니즘을 알기 전과 후로 삶을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며 웃었다. 루인의 채식경험 역시 페미니즘을 경계로 한다. 채식주의가 페미니즘의 한 부류/하이픈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페미니즘을 고민하면서 채식을 하나의 정치학으로 느끼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채식을 단 한 번도 정치학으로 고민하지 않았던 루인에게 다른 사람들과의 모임 자리는 루인으로 인해 불편한 자리였다. 루인만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다 편할 수 있는데 루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식사가 불편해진다고 느꼈다. 채식은 루인의 고집으로 지속하는 행위이지 정치학은 아니었다.
‘불순’하게도 채식을 정치학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루인이 루인의 경험 속에서 특화할 무언가를 찾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루인의 삶 중에서 유난히도 불편한 지점을 고민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가 채식이다. 그러니까, 채식 경험을 발견한 샘이다.
하지만 이런 ‘발견’이 잊고 있던 경험을 ‘발굴’하고 또 하나의 정치학으로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채식을 단순히 먹는 문제가 아니라 육식을 이데올로기로 명명하고 채식주의를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하는 관계의 정치학으로 명명하기 시작했다.

첫 채식주의 페미니즘 세미나를 하면서, “채식주의자면서도 육식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이때 루인은 비건을 가정했다). 채식주의자가 어떻게 육식을 하느냐고 말도 안 된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바로 이런 상상력에서 시작했으면 좋겠다.
작년 어떤 자리에서, 채식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의 경우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등의 문제로 어려워 한다는 얘길 들었다. 솔직히 당황했다. 그런데 최근 루인의 주변에도 이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접했다. 채식주의 페미니즘 세미나를 제안했을 때의 반응 역시 이랬는데, 함께 하고 싶으면서도 섣불리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지점이라고 느꼈다. 채식을 한다는 것은 곧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굶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일종의 두려움에서부터, 처음부터 너무 ‘완벽’해지려는 강박까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할 때, 처음부터 ‘완벽한’ 페미니스트는 아니었을 것이다. ‘완벽한’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있기나 한지도 모르겠지만. 아프고 불편하고 화나는 순간들을 언어화 할 수 있는 바로 그 힘으로 페미니즘에 빠져들었을 것이고 여러 실수와 잘못들을 겪으며 현재의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시작할 때부터 모든 사안에 대해 자신만의 입장을 가지고 있고 모든 일에서 폭력을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루인만 그런가-_-;;). 그런데 왜,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것엔 처음부터 ‘완벽’해 지려는 걸까. 빵도 먹으면 안 되고 가죽제품도 사용하면 안 되냐는 질문들을 접하며 어떤 강박 혹은 편견이 있음을 감지했다. 채식주의자는, 루인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우유나 버터, 계란도 안 먹고 가죽제품도 쓰지 않고 일회용품도 쓰지 않을 것이며 등등. 사실 이런 편견은 지금의 루인에게도 있다. 다른 채식주의자와 닿을 때면 항상 이런 ‘걱정’ 혹은 ‘두려움’을 느낀다. 무심하게 일회용품을 자주 사용하는 편인데, 다른 채식주의자가 이런 루인을 향해, “채식주의자가 어떻게!!!”라는 건 아닐까 하는.
페미니즘을 하면서 필요이상의 검열에 시달리곤 한다. “페미니스트가 어떻게 무단횡단을 하느냐”, “페미니스트가 화장을 한다고?”, “페미니스트가 …” 등등. 이런 도덕교과서 같은 강박이 실은 젠더사회와 가부장제의 요구였음을 진작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비슷한 편견들은 수두룩하다. 트랜스젠더는 예쁘고 여자보다 더 여자 같아야 ‘진짜’고, 게이는 패션감각이 뛰어나고 멋지거나 “계집애 같은 남자”고, 레즈비언은 “선머슴”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가죽바지를 입고 다니고 등등. 이런 편견들과 채식주의에 접근하기 전의 강박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고기” 먹는 채식주의자란 상상력은 이런 편견 혹은 강박에서 좀더 자유로워지자는 의미이다. 동시에 채식주의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분류의 위계질서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과식果食주의자fruitarian 혹은 비건vegan이야 말로 ‘진짜’ ‘순수’한 채식주의자라는 식의 분류는 허위의식일 뿐이다. 채식을 6개월 했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10년 했으면 대단하다고 반응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루인에게 이런 상상력이 중요한 건, 채식주의자는 육식을 안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럴 때 육식하는 채식주의자란 상상력이 가능하다). 좀더 즐겁고 신나는 몸이 되기 위해 채식을 고민하자는 것이지 온갖 규범과 억지에 짓눌려 마지못해 하자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을 하는 것도 그렇다. 페미니즘을 하면서 쾌락 없는 고통뿐이고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것일 뿐이라면 도대체 왜 하겠느냐고.
그래서 채식을 고민한다면 편하게 시작했으면 한다. 처음부터 비건일 필요가 있겠으며, 소중한 사람의 흔적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는 가죽제품을 버려야 하는 것처럼 여길 필요가 무엇 있느냐고. (그 황당한 채식의 위계서열 방식으로 표현하면) 처음엔 “붉은 고기” 정도 안 먹고 익숙해지면 조금씩 자신의 몸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해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고기”가 너무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스님이 냉면 그릇 바닥에 고기 숨겨놓고 먹는다는 “농담”도 있는데. 좀더 가볍고 즐겁게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정치학을 어떻게 이렇게 가볍게 말 할 수 있느냐고 반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뭘 그렇게 딱딱하고 어렵게 하느냐고 되묻고 싶다. 몸이 즐겁자고 하는 실천이며 다른 존재들과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행동들인데, 괴롭게 할 필요가 무엇 있겠느냐는 말이다. 고민이 체화되는 찰라, 몸은 원하는 욕망을 드러낼 테니까.

…실은, 가볍고 즐겁게 하자는 말들, 지금껏 적은 말들 모두 루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