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루인에게 쓰는 편지

어째서 커밍아웃의 즐거움보다 그 두려움을 먼저 배운 것일까, 하는 몸앓이를 하곤 한다. 그것이 루인만의 특수한 상황일 가능성이 더 크겠지만.

루인이 접한 책이나 글 중엔, 커밍아웃의 즐거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커밍아웃을 한 이후 겪은 아웃팅이나, 주변의 부정적인 반응 혹은 주변의 혐오증으로 인해 커밍아웃을 못하고 숨기고 산다는 얘기들이 많다. 특정 누군가에게만 커밍아웃을 했는데, 하지도 않은 혹은 하기 싫었던 사람들도 알고는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봤다는 사례. 회사나 단체에서 일하는데 커밍아웃 이후 쫓겨났다는 사례. 가끔씩은 아웃팅을 협박하며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신문에 나기도 한다(이런 기사의 리플은 한 호흡 멈추고 읽는다). 커밍아웃을 고민하기 전부터 루인이 먼저 접한 정보는 커밍아웃 이후의 부정적인 사례들이 대다수였다.

그런 루인은 무엇이 가장 두려웠을까. 루인에게 가장 힘들었던 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커밍아웃보다는 루인에게 하는 커밍아웃이었다. 루인에겐 자신에게 하는 커밍아웃이 가장 힘들었다. 왜? 예전에 한채윤씨가 “동성애는 서구에서 수입된 거라고 하지만 정말 수입된 건,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혐오증이다”라고 하셔서 무릎을 치며 좋아했던 흔적이 몸에 있다. 적어도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좋아하는 대상이 ‘동성’이든 ‘이성’이든 그 어느 쪽도 아니든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좋아하는 감정으로 느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런 과거를 해석하는 일에 용기가 필요했고 잊혀져서 발굴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10대들에게 이반이 “유행”이라는 식의 기사를 접하곤 하는데, “유행”이기 전에도 이런 감성은 풍성했다. 수입되었다면 수입된 건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애혐오증”이다.

루인이 접한 글에서 아웃팅의 두려움이나 커밍아웃 이후의 부정적인 사례들이 많은 것은 이것과 관련 있을까. 하지만 커밍아웃 이후 무조건 부정적인 일만 있는 것은 아닌데.

이건 루인이 주로 지내는 공간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러니 루인의 이성애혈연가족들과 그 친족들은 [Run To 루인]을 모른다. 알리고 싶지도 않고(동거란 주제만으로 얼굴 표정을 바꾸며 경악하는 모습을 접한 적이 있다). 하지만 [Run To 루인]을 알면서 루인을 아는 사람에게라면 커밍아웃한 것이 오히려 ‘자유’롭고 훨씬 편하다. 적어도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서 거짓말을 할 필요 없고, 남의 이야기처럼 말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남의 사례인양 말하는 것만큼 불편하고 괴로운 일도 없다. 스스로를 기만한 느낌이랄까. 루인의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들과 섹슈얼리티와 관련해서 얘기하며 남의 이야기인양 말하고 나면, 루인에 대한 불쾌함으로 며칠이고 앓는다.

[Run To 루인]을 통해 커밍아웃을 한 후 가장 좋았던 건,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없어진 점이다. 모든 말하기는 협상하는 말하기이기에, 닿은 사람 모두에게 커밍아웃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소통하거나 공유하고자 한다면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 현재의 감정이다. 이반queer나 비’이성애’, 트랜스와 관련해서 글을 쓸 때, 커밍아웃을 한 상태에서 쓰는 것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것은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자기 삶을 남의 이야기처럼 쓴다는 것의 괴리, 글을 통해 들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 끊임없는 자기 검열 등에서 어느 정도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점은 커밍아웃만의 즐거움일 것이다. 아웃팅이 두렵다면 커밍아웃하는 것이 오히려 힘이 된다.

커밍아웃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커밍아웃을 해서 힘들었다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즐겁다는 얘기를 더 많이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커밍아웃을 하겠다, 안 하겠다가 아니라 커밍아웃 자체가 공포가 되지 않길 바라니까. 그래서 커밍아웃이 (얼마간의) 두려움 속에서도 좀더 즐겁고 좋은 일로 여겨질 수 있으면 좋겠다.

트랜스와 이반(퀴어), [왕의 남자] 2부

1부는 여기지만, 별 내용 없음.

예전에, 비록 90년대 들어 트랜스 이론이 “뜨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반queer이론의 범주 내에서만 존재 가능하단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비록 트랜스가 유행 담론처럼 인구에 회자되지만 이반담론의 틀 내에서 얘기될 때만 그렇지 이반담론과 거리를 둘 땐 외면당한다는 얘기였다. 루인은 조금은 다른 맥락에서 이 말이 와 닿았다.

작년 봄 이후, 비’이성애’자로 커밍아웃을 하고 나면, 대체적인 반응은, 무반응이다. 그럴 수밖에 없음이 루인이 커밍아웃한 공간은 “정치적으로 올바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태도에 강박이 있는 곳이라, 어떤 소수자/약자의 정치학에도 대체로 무반응으로 반응했다. 단 한 분만, 커밍아웃을 걱정해주었다. 문제는 이런 반응들이 아니다.

커밍아웃을 했을 때, 루인은 비’이성애’자라고 했었다. 대체로 비’이성애’자가 뭔지를 묻는 경우는 없었고, 이반(혹은 퀴어)과 어떻게 다를 수도 있는지 고민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커밍아웃 이후, 사람들은 ‘동성애’ 얘기만 나오면 루인을 (몰래) 쳐다보거나, ‘동성애’에 관해선 루인의 말이 ‘진짜’인 것처럼 반응하거나, 과도하게 섹슈얼리티로(여기선 성적 지향/선호) 주제를 좁히는 경향이 있음을 느꼈다. 몰래 쳐다보는 건 양호한 편이고, ‘동성애’자란 말을 하며 루인을 노골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루인 역시 비’이성애’자란 단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비’이성애’와 이반을 구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일한 것으로 사용하지도 않았다. 비’이성애’는 관계 맺는 방식의 정치학으로 이반은 성정체성의 정치학으로 미묘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건, 스스로도 정리하고 싶어 쓴 글 이후였다.

이반이란 단어를 쓸 때 마다 모호함을 느끼는데, 루인에게 변태집단으로서의 이반은 소위 말하는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트랜스)를 모두 포함하는 의미“였”다. 비록 주류 담론에선 초기의 이런 의미와는 달리 ‘동성애’만을 한정하는 의미로 쓴다곤 하지만,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기에 개의치 않았다.

이런 사용이, 비록 ‘안전’했을지는 몰라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음을 깨닫기까지,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길수도 있는 시간이 걸렸다. 아니, 아주 불편한 방법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단지 동성애자’로 루인을 간주했다. 비’이성애’든 이반이든, 커밍아웃을 곧 ‘동성애’로 간주하는 것이 때로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까. 이 경험은 비록 모든 집단에선 아니지만 어떤 집단에선 ‘동성애’가 주류화되어 있음을 느끼게 했다.

‘양성애’자의 경우, ‘동성애’ 집단과 ‘이성애’ 집단 모두에서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들도 성적 소수자와 관련한 얘기가 나오면 ‘동성애’만을 주제로 얘기했다. 그렇지 않은 성적 정체성은 어디에서도 부재했다. “단지 동성애가 가장 가시적이니까 동성애를 대표로 해서 말했다”는 식의 언설도 마찬가지 내용이다. 비록 더 가시화되어 있다고 해서 대표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경험의 맥락이 너무도 다른데 성적 소수자를 주제로 ‘동성애’만 말하고 다 말했다고 (착각)하는 건, 폭력의 재생산이다.

그럼 처음부터 “자세하게”/”구체적”으로 커밍아웃하지 않았냐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자세하게” 혹은 “구체적”으로 커밍아웃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은 곧 ‘동성애’자다란 인식이 폭력이다. “동성애자까지는 괜찮은데 양성애자는 정말 아니다(역겹다)”란 언설을 접한 적이 있는 경험 속에서, “왜 용기 있게 자세하게” 말하지 않느냐는 식의 반응은 권력 과시이다.

이것이, [Run To 루인]에서 트랜스란 키워드를 새로 만든 이유이다. [왕의 남자]를 트랜스로 읽은 이유도 이 지점이 교차한다. 루인에게 공길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었다. 때론 크로스 드레서(cross dresser: 이성복장착용자란 번역어가 있긴 하지만 ‘이성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음역音譯 만큼이나 안 좋은 표현이다)일 수도 있겠지만, 젠더(이성애)구조에서 언어가 없을 뿐, ‘남성’/’여성’ 어느 쪽도 아니면서 모두인 성정체성을 가진 인물로 다가왔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애시 당초, ‘이성애’라고도 ‘동성애’라고도 ‘양성애’라고도 규정지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성애 영화다”, “퀴어 영화다”, 란 식의 언설들이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청연]이 “여류”비행사 영화라고?

라디오 듣다가 처음 알았다. [청연]이 (최초의) 여류비행사 영화라는 ‘사실’을.

최초의 ‘남성’비행사란 말은 없어도 최초의 ‘여성’비행사란 말은 있다. 최초의 비행사란 말은 있는데, 최초의 비행사=최초의 ‘남성’비행사란 뜻으로 ‘남성’이 인간을 대표한다는 의미다.

뭐, 이런 인식까지 바란 건 아니다. 하지만, 여류비행사라니!!! 지금도 종종 접할 수 있는데, 여류작가란 말이 있다. 박완서선생님도 7, 80년대엔 “소녀적 감수성을 간직한 여류작가”란 평을 들었다(근데 “소녀적 감수성”은 뭐야?). 여류작가, 여류비행사 등등, 여류라는 말은 ‘여성’이 취미삼아, 풍류삼아, 놀이삼아 한다는 의미다. 즉, ‘남성’이 하면 전문적이고 진지한 것이지만 ‘여성’이 하면 취미일 뿐, “진짜”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어머니”되기, 가사 노동 등등)는 뜻이다.

(“금남의 벽을 깬, 최초의 남성”과 같은 말은 있어도 남류작가란 말은 더더욱 없다. HWP에선 고쳐야 할 글자로 나온다.)

여류비행사라니. 영화 어디에도 박경원이 취미로, 심심풀이로 비행을 하지 않는다. 버럭, 화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