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사태를 채식주의 페미니즘으로 읽기 위한 단초

07. 정작 낙농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들이 “생산”한 우유를 마시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수유 시기에만 생산할 수 있는 우유를 일년 내내 생산하기 위해 각종 호르몬을 주사하기 때문이다. 양계장에선 하루에도 몇 번씩 알을 낳게 하기 위해, 호르몬을 주사하거나 인공조명을 이용한다고 한다. 호르몬을 맞는 젖소나 닭은 모두 암컷이다.
이 글을 쓰면서 황우석 사태를 떠올렸다. ‘여성’의 난자를 대량으로 “채취”하기 위해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과 우유 혹은 달걀을 “생산”하기 위해 호르몬을 주사하는 것 사이에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젠더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식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단면이면서 육식이데올로기와 동물살해가 젠더폭력과 얼마나 밀접한지를 드러내는 단면이 아닐까.

#내일 있을 세미나 발제를 위해 쓰고 있는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내일 관련 얘기를 할 수도 있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황우석 사태를 읽는 무수히 많은 입장들 중 하나는 채식주의 페미니즘이란 얘기를 하고 싶다. 상상력이 세상을 더욱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게 하는 감각이라면 채식주의 페미니즘도 그런 상상력의 하나이다. 그 뿐이다.

[왕의 남자]: 트랜스 (1부)

다른 사람들이 동의할 거라 예상하지 않으며 납득시킬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지만, 처음부터 가장 걸렸던 부분은, [왕의 남자]는 ‘동성애’ 영화일 수도 있겠지만,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리티에 관한 영화가 아닐까, 였다. 루인에게 공길은 ‘게이 남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트랜스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이것은 이반/퀴어와 트랜스의 “불편”한 관계에서 출발한다.
(1부 끝-_-;;)

채식을 한다는 것+팁

언젠간 육식을 하겠다면 같이 밥 먹으러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날도 오겠지요.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씩은, 성정체성을 커밍아웃한 사람 앞에서 이반queer/트랜스 혐오적인 발언을 농담이나 유머랍시고 하는 것과 육식하는 자리에 같이 있는 것에 별 차이를 못 느낄 때가 있거든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물론, 루인은 같이 밥 먹고 싶을 만큼 유명인도, 대단한 사람도, 매력적인 인간도 아니니 결국 혼자 밥을 먹겠다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테고, “고립”을 자처하는 걸 수도 있겠지요(채식을 한다는 말에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란 얘기를 참 많이도 들었거든요). 혼자 밥 먹는 거야 익숙하거니와 좋아하는 일이니 문제될게 없겠죠. 어려운 건,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론, 채식주의를 얘기하는 건, 페미니즘을 얘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느껴요. 페미니즘이 옳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페미니즘 세미나를 하거나 활동 하는 건 싫다는 반응과 채식이 좋은 건 알겠지만 실천하기엔… 하며 말을 줄이는 반응은 너무 닮아 있더라고요. 아, 다른 세계관과의 만남엔 이런 머뭇거림이 따르기 마련이죠. 하지만 채식이 좋은 건지, 옳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누구랑 밥을 먹느냐가 문제이기도 할 거예요. 어떤 모임은 고기를 구워먹는 자리라도 참석하겠지만 어떤 모임은 사찰음식을 하는 곳이라도 참석하기 싫을 테니까요. 하지만 언젠간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육식을 한다면 함께 밥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날이 올 거란 예감이 들어요.

[#M_ +팁.. | -.. | 작년 어떤 자리에서, 채식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어려워 한다는 얘길 들었어요. 당황했어요. 마치 채식을 한다는 건,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굶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했거든요. 루인은 이런 고민을 별로 안 했었더래요. 뭐, 다른 이유로 단식을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아님, 처음부터 비건vegan이란 “완전” 채식을 지향했기에 그런 건 아닐까 해요. (비건이나 과식果食주의자Fruitarian야 말로 “순수”하고 “완전”한 채식주의자란 말은 당혹스러워요.) 그럴 필요가 뭐 있겠어요. 그냥 처음엔 “붉은 고기”를 안 먹고, 고기 없는 생활이 몸에 익으면 생선을 안 먹고, 하는 식으로 조금씩 바꿔 가면 되죠. 뭐, 6개월 정도 채식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기가 너무 먹고 싶으면, 먹으면 되죠. 스님이 냉면 그릇 바닥에 고기 깔고 먹는다는 “농담”도 있는데요. 그리곤 다음 날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죠. 정치학을 어떻게 이렇게 가볍게 말 할 수 있느냐고 화낼 수도 있겠지만 뭘 그렇게 어렵게 해요. 그냥 몸이 즐거울 수 있는 방향으로 가볍게 하면 되지. 채식을 한다는 건, 몸의 즐거움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서 출발하는데(어디까지나 루인의 해석) 몸이 즐겁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 말이 채식은 취향이란 의미는 아니예요. 조금씩, 조금씩 몸이 즐거운 방향으로 실천하는 거지, 억지로 해서 괴로울 필요가 없다는 얘기예요. 어차피 채식을 시작하고 관계의 정치학으로 고민한다면, 다시는 육식으로 돌아가기 힘들 거라 믿으니까요.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