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 혹은 ‘진부’한 이야기

01. 레즈비어니즘과 페미니즘은 연대할 수 있는가, 란 질문이 문득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전까진 감각하지 못하다가 월요일부터 시작한 책과 놀다가 떠올랐다. 구체적으로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는데, 일테면 “여성과 인권”이라는 말이나 “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이란 말처럼 다가왔다. “여성과 인권”은 ‘여성’은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이란 말은 ‘여성’운동은 시민운동이 아니란 의미다. 딱 이런 의미란 건 아닌데 이런 말을 들은 것처럼 불편하게 다가왔다. 기다리면 언젠간 불편함의 의미가 다가오겠지.
불편함의 의미를 알아간다는 건, 승려들의 화두 같다고 느낀다. 잠시도 놓지 않고 몇 년씩 고민해도 알 수 없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 화두처럼 불편함의 의미를 알아 가는 과정도 그렇기에.

02. 케이트 본슈타인Kate Bornstein의 [젠더 무법자Gender Outlaw]를 읽다가 밑줄 그은 문장:
그들(이성애 ‘남성’-루인 주)은 “레즈비언들은 파트너와 어떻게 (성행위를) 하나” 알고 싶어 한다. 그것은 정말 슬픈 질문이다. 그것은 여성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M_ +.. | -.. | 살짝 의역했다. 책에선 “그들”이 이성애 ‘남성’이지만 꼭 ‘남성’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질문은 성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음에도 ‘답변’에선 “관계”로 번역한 건, 이 문장이 들어있는 챕터의 전체적인 맥락이 소통과 언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지점이 이성애 성기 중심주의지만 동시에 그것은 권력과 소통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문득, 검색어가 두려워 진다-_-;;)_M#]

03. 언제쯤 이반, queer란 키워드를 두고서도 트랜스를 별도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쓸 수 있을까.

[청연]: 정체성들의 갈등

아침 9시, 첫 회와 접했다. 할인카드해서 2,000원을 기대했으나 올랐는지 2,500원. 가격 만족도는 충분하니 일찍 나온 보람은? 있다. 누군가에게 권할 만 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침 9시의 영화를 접하기 위해선 전날부터 김밥을 사는 등의 준비를 해야하는(보통 7시에 일어나지만 아침을 먹고 설거지까지 다 하고 나서려면 2시간 정도 걸리니까) 루인에게, 그런 준비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했다.

※스포일러가 있어요. 뭐, 영화 자체의 줄거리야 뻔하지만.
영화를 시작하는 장면이 상당히 재미있다. 일본군들이 마을에 들어오고 강제 동원된 것으로 여겨지는 마을 사람들이 맞이하고 있다. 어른들은 욕설을 하거나 못마땅하고 화난 표정들이지만 아이들은 “와~”하는 함성을 지른다. 박수 소리도 함성 소리도 아이들의 것. 그 이유가 재밌다. 아이들에게 일본군인은 침략자이기에 앞서 하늘을 날 수 있는 닌자들이다. 이 설명과 함께 일본군은 닌자 복장으로 바뀐다. 그러면서 빤한 코미디도 나온다. 역사의 내용이 누구의 입장으로 쓰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침략을 정당화 혹은 합리화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라고 해서 반드시 피해자화되는 건 아니란 의미다. 일본에 합병되었다고 조선 사람들 대다수가 죽을상을 하며 부정적으로만 지낸 것이 아니었다. 영화는 이런 지점에서 출발한다고 느꼈다. 친일 아니면 반일, 매국노 아니면 민족주의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서 벗어나려는 고민이 출발점이다.

그렇기에 [청연]을 친일 혹은 친일처럼 비방하는 글들은 황당할 따름이다. 영화 어디에도 친일 혹은 반일 하는 식의 도식이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 말미 즈음에 박경원(장진영 분)이 일장기를 드는 장면이 나오긴 하는데 일장기만 들면 친일? 아니면 박경원의 연인처럼 나오는 한지혁(김주혁 분)이 “조선이 네게 해 준 게 뭐 있어”란 말 때문에? (앞 뒤 맥락 다 잘라버리고 “박경원이 일장기 흔들었대”라고만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_-;;)

영화 속 박경원의 갈등은 민족과 젠더, 계급이 교직하는 지점인데, 그래서 조선인이든 일본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하늘에선 그런 게 없기 때문에 비행을 좋아한다는 말은 아프다. 박경원을 돕는 기베(유민 분)와의 가장 큰 차이는 식민 지배국의 기베와는 달리 피식민지의 박경원은 민족이란 또 하나의 갈등을 격어야 한다는 점이다. 조선인 내부에선 계급 차이를 겪는다. 박경원은 민족차별(인종차별)과 성차별, 계급차이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갈등하고, 영화는 이런 갈등이 시대와 어떤 식으로 협상하는지 그 과정을 말하고자 한다. 박경원이 고국(박경원에게 일본은 고국이 아니란 의미다)으로 돌아가기 위한 장거리 비행을 위해 후원회를 개최하는데 이때 조선인들이 외면했다는 점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살아서 자신의 야망을 위해 노력하는 ‘여성'(인 박경원)은 민족의 구성원에 포함되는가, 같은 민족이라고 말하면서도 도움이 필요할 때 외면한다면 민족이란 정체성은 어떤 의미인가, 친일 아니면 반일이란 식으로 갈등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는가 등등. 친일이다 아니다, 침략이 정당하다 아니다, 와는 별개로, 공부하려는 박경원을 ‘여자’란 이유로 가족들은 반대하거나 외면하는데 반해 일본에선 가능했다면 조선과 일본의 의미는 조선에서도 일본에서도 제약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등장인물 대다수가 단순한 도식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연대와 갈등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젠더와 젠더 역전이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다.

영화에서 가장 멋진 장면은, 박경원의 비행학교 선생인 도쿠다와 박경원의 관계. 흔히 많은 영화에서 이성관계를 끊임없이 연애관계로 몰아가는데 반해 이 둘의 관계는 동료관계로 나타난다. 박경원의 마지막 비행을 앞두고 도쿠다는 관제탑에서 박경원과의 연락담당을 자청하는데 이 장면은 박경원을 젠더사회에서의 ‘여성’, 즉 연애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비행사라는 정체성으로 박경원과 관계 맺고 있음을 말한다. 기베와 박경원의 관계도 멋진데, ‘여성’이란 젠더 정체성과 비행사란 정체성으로 맺어지고 있다. 후원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여성’이란 점은 (의도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성’연대”로 읽을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기베와 박경원의 관계, 도쿠다와 박경원의 관계, 한지혁과 박경원의 관계 등 박경원을 둘러싼 관계들은 절대적인 정체성은 없으며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으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인이란 민족 정체성은 박경원에게 다른 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이지 절대적이고 최우선시 해야 할 정체성이 아니다. 조선인/한국인이란 민족 정체성을 어떤 경우에나 최우선시 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발언은 파쇼일 따름이다. 개인의 다양한 맥락과 정체성을 제거하고 하나의 단일 정체성으로 환원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은 없다. [청연]은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이 어떻게 갈등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루인이 우는 거야 특별할 것 없으니 역시나 영화를 보면서 여러 번 울었다. 특히, 가장 많이 울었던 부분: 박경원의 학교 후배인 강세기(김태현 분)가 비행대회 당일 아침, 연습 중에 비행기 폭발 사고로 병원에 실려 간다. 기베로 인해 대회에 출장할 수 없던 박경원은 강세기의 사고로 대신 출장한다. (엠파스 영화 소개는, 기베로 인해 박경원이 출장하지 못하게 된다는 내용까지인데 바로 그 다음 장면들이다-_-;;) 문제는 박경원의 주력 종목이 아니기에 위험할 수도 있는 종목이었다. 이 종목에서 난기류에 휩쓸리며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대회 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한다. 뭐, 시나리오야 뻔하다. 이 장면에 운 이유는 몸이 아팠기 때문이다. 박경원이 대회에 나갈 수 있었던 이유와 기록을 경신하며 1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강세기의 죽음이라는 고통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 장면을 접하며 불행, 질투, 집착, 상처 등의 고통 속에서 쓴 글이 다른 어떤 글 보다 빼어났던 몸의 흔적이 되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일종의 위로였다.

#이와 관련해서 마르코스가 “당국이 체포하려고 하면 저항하지 말고 도망쳐 주장을 전파하라”란 말은 참 몸에 든다.

#글이 정리가 안 된 채 난잡하다. 디빅이 나와서 다시 접한다면-_-;; 그땐 좀더 정리할 수 있을까.

시간, 나이 그리고 새로운 계획(?)

시간 약속에 강박적이면서도 시간 개념이 없는 편이라 새해니 송년이니 하는데 무감한 편이다. 지난 크리스마스 땐 종일 라디오를 들었으면서도 당일이 크리스마스이브인지 인식하지 못했고 2005년의 마지막 날이나 새해 첫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냥 어느 순간, “아, 지나갔구나”, 할 따름이다. 그런 루인이기에 새해 계획 같은 거 없다. 시간을 나눠서 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루인에게 시간은 지나가는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 60진법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움직이는 것이다. 루인에게만은 나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도 그래서다. 루인을 느낄 때, 나이는 부재중이며, 루인끼리만 놀 땐 아무 의미를 발생하지 않는다(이건 다분히 노력의 산물이다). 이런 이유로 다른 누군가가 루인의 나이를 묻거나/상기시키거나 사회가 규정하는 나이에 따른 역할을 요구할 때면(“니 나이가 지금 몇 살인데 아직도 그렇게 사니”라던가 “얼른 결혼해야지”와 같은)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니 루인에게 새해란 말은 의미 없는 단어일 따름이다. 덕분에 “어떻게 새해 인사도 안 하냐”고 욕도 많이 들었다. 오래 살겠다-_-;;

그럼에도 계획을 하나 세웠다. 새해 1년의 계획이 아니라 장기 계획이다. 이쯤 되면 뭔가 거창하거나 대단히 힘든 일일 것 같은데, 맞다. 엄청 거창한 계획이다. 인터넷 사용 시간 줄이기. 크크크 -_-;;; 계산하니까, 저녁에 일이 없는 일상적인 일과에선 하루에 5시간에서 많을 땐 7시간까지 나스타샤와 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터넷 시간을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내 놓은 실질적인 방안은, 블로그엔 하루에 글 한 편만 쓰기. 믿을지 모르겠지만, 블로그에 글 한 편 올리는데 최소한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린다. (일과와 관련한 ‘간단’한 글은 좀 덜 걸린다.) 더 걸리는 날도 많다(어제 쓴 [왕의 남자]와 관련한 글처럼, 안 되는 몸 쥐어짜면서 뭔가 깨작거리며 애쓰는 경우). 이런 상황에서 글 한 편 이상 올린다는 건…;;;;

그러니 앞으로의 계획 혹은 목표는 블로그에 하루에 글 한 편만 쓰기. (하루 한 편이면서 꾸준하게 매일 쓰기란 의미를 같이 가진다.) 뭐, 이런 글을 쓰면서도 지금이 세 번째 글인가;;; 뭐, 모아서 쓴 글을 나눈 것이긴 하지만.

#루인에게 제목은 글의 압축이라기 보단, 나중에 찾기 쉽게 하려는 핵심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