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걱정

3월의 첫 날이 노는 날(! -_-;;;)이라, 참 다행이다. 그렇지 않고 2월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3월을 시작해야 한다면, 정말… 이란 몸앓이를 했다. 어제, 아주 조금 비가 내리던 길을 걸으며.

늦잠을 잤다. 딱히 피곤할 것도 없는데 며칠 째 밤 11시만 넘어도 졸음이 밀려왔다.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는 덴 지장이 없었는데 오늘은 긴장이 풀렸는지 늦잠을 잤다. 핸드폰 액정을 보니 9시를 몇 분 남겨둔 상황. 늦은 아침을 먹고 읽다 만 책을 마저 읽고, 오늘부터 삼, 사십 여일 가량 걸릴 예정의 [Queer Theory]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한동안 뭘 시작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시간을 보냈다.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일이 개강이라고 해서 수업이 있는 건 아니다. 수업은 월, 화 이틀이고 조교 출석체크도 수요일이라 목요일이 개강이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는데도, 조급함을 느끼고 있다. 2년 전, 처음으로 여성학 수업을 신청하고 개강을 기다리던 그때처럼.

페미니즘을 여성학이란 수업을 통해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 딱, 2년 전이다. 물론 그 전에도 책은 조금씩 읽었지만, 잡식에 체계적이지 않은 독서습관으로 그냥 이것저것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그렇게 읽다가 수업을 통해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고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여성학 과목을 신청했다. 걱정은, 수업 듣는 사람들 중 루인이 가장 무식할까봐, 였다. 성적이야 신경을 안 쓰는 편이기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어렵거나 루인 혼자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면 어떻게 하나로 수강 취소도 고려했었다. 평소 물을 잘 안 사마시지만 그날은 물을 한 통 샀고 수업이 시작되길 기다리면서 다 마셨다. 긴장하면 생기는 버릇이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대학원에까지 왔다. 그리고 지금, 2년 전의 그런 몸으로 긴장하고 있다. 작년 가을, 비록 중간에 그만두긴 했지만, 몇 주간 대학원 수업을 청강 했기에 어느 정도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고 각오도 하고 있지만 그래도 걱정과 두려움으로 긴장을 놓기가 어렵다. 결국은 어떻게 놀 것인가의 문제이지만, 좀더 팽팽한 긴장 속에서 놀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족한, 너무도 부족한 영어 실력이야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어떻게든 따라간다고 하면 되겠지만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한 걱정이 사실 더 크기도 하다.

무식한 건, 남들보다 모르는 건 이제 그다지 걱정이 아니지만―이제 좀 안다가 아니라 모르는 건 수업을 통해 배우면 되기 때문이다― “바보”가 될까봐, 걱정이다. 즉, 불편한 상황에서 침묵하지는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다.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도 불편한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곤 한다. 누군가가 배려해주겠지, 하는 알량한 기대를 가지고. 하지만 누구도 루인을 대신해서 말해주지 않으며 배려해주겠지 하는 기대는 착각일 뿐임을 안다. “타자성”을 침묵한다는 건, 결국 죽음과도 같은 일임을,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재단되도록 내버려 두는 일임을 안다. 알지만, 여전히 침묵한다. 바로 이것이 두렵다. 어떻게 발화를 시작할 것인가. 침묵하면 하루 종일 속상하고 화가 나서 몸이 아프지만 발화하면 때로 괜히 발화한 건 아닌가 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발화하고 후회하는 것 보다는 침묵하고 발화하지 않음을 후회하는 것이 더 아프다는 것도 이제는 조금 안다.

처음으로 발화하기가 어렵다. 어디서건 마찬가지다. 그렇게 다짐하고 발화하겠다고 준비를 하는 날은 분명 목이 쉬고 준비한 물을 금방 다 마시겠지만, 첫 시작이 중요하다. 타인의 폭력 앞에서도 헤벌쭉 웃는 “바보”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M_ +.. | -.. | 이때의 “바보”는 당연히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의 그런 것일 뿐, 당사자는 그 상황에서 협상 중에 있다. 발화하는 것이 좋은지 침묵하는 것이 좋은지 혹은 다른 식으로 반응하는 것이 좋은지로._M#]

천천히 오래하기-굵고 길게

물론 한 번을 하더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오래, 지속적으로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몸앓는다. 이른바 짧고 굵게 보다는 가늘고 길게. 한때의 명성으로 전설이 되기보다는 시간이 많이 지나도 현역으로 활동하는 것.

“나도 한때 그런 일을 했어”라는 말을 싫어한다. 슬프기 때문이다. 더 이상은 하지 않는 것, 과거에의 향수인지 자기 과시인지 애매한 그런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슬프다. 누군가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예전에 날렸던 ○○이야”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들을 특히 싫어하게 된 이유는, 한국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몇 십 년 전에 쓴 작품으로 지금도 명성을 연명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작품 활동 일, 이 십년 하고 더 이상 활동 하지 않으면서도 과거의 명성으로 살아가는 조로현상. 이런 모습이 참 싫었다. 오래하지도 않았으면서 나이 들었다는 것이 과거의 명성으로 살아가도 되는 것 마냥 행동하며 나이주의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을 답답하게 느꼈다.

물론 루인도 요절에 매혹했었다. 랭보 같이 일찍 죽어서 유명한 사람들. 하지만 그런 만큼 박제된 삶은 안타까움이다. 일찍 죽은 대가로 삶은 박제되고 요절이 재능만큼이나 회자되는 건 슬픈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한 순간 타오르고 꺼지는 것 보다는 오랫동안 타올랐다면 더 좋았을 것을.

천천히 하는 것이 진보다, 란 정희진 선생님의 말을 떠올린다. 조금은 다른 의미일까. 하지만 겹친 모습으로 다가온다. 운동을 하다보면, 한 시절 열심히 활동을 하다 자신만의 이력이 생기고 노하우가 생겼을 즈음엔 지쳐서 떠나는 상황은, 떠나는 사람에게도 새로 시작하는 사람에게도 남아있는 사람에게도-모두에게 슬픈/아픈 일이다. 매체(문집) 같은 것도 그렇다. 언제 누가 활동했는지도 모르거나, 이른바 고학번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전설”같은 활동의 한 두 기록만 너덜한 표지로 남아있는 것을 접하면, 안타깝다. 좀더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지는 못했던 것일까.

오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살다보면 중간 중간에 여러 가지 상황으로 다른 길로 가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천천히 계속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것이 이랑 세미나에서 빠지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신돈]에서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에게, 월선스님(큰 스님)이 신돈에게 말하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트랜스가 그렇게 이상해요?

“당신은 이반이나 트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으면, 혐오하는 사람도 많지만 인정한다거나 그들도 사람이다, 그게 어때서, 라는 식의 답을 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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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한다니 누가 누굴 인정해? 당신이 인정하든 말든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뭘 인정해? “그들도 사람이다”라는 식의 인본주의/보편적 인권 논의는 한 사회가 누굴 사람으로 간주하는지, 사람은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지를 질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다. 즉, 트랜스의 논의 자체를 지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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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반queer이나 트랜스가 당신에게 고백을 한다면? 혹은 당신의 가족 중 누군가가 커밍아웃을 한다면? 작년 여름, 어떤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야 동성애자든 트랜스든 상관없지만 그 사람이 자신에게 고백을 하거나 가족이라면 좀 그럴 것 같다는 얘길 직접 들었다. 물론 이런 얘긴 인터넷의 리플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4인의 이성애정상가족을 가정하고, 당신의 아빠나 엄마가 어느 날 “난 레즈비언(게이)야”라고 커밍아웃을 하거나 “나 트랜스야, 곧 성전환수술 하려고”, 라는 얘길 한다면 위의 ‘쿨’한 반응은 사라진다. 이런 상황은 두 해 전, 수업 시간에 직접 겪은 일이기도 하다. “성전환자의 법적 지위”란 내용의 수업이었는데 발표자들도 토론에 참여한 일부 몇 명도, 당연히 권리를 인정해야하며 특별법이라도 제정해야 한다며 자신의 ‘진보’성을 과시하고 자신의 ‘쿨’함을 드러내려고 안달했지만 “가족이 커밍아웃하면?”이라는 질문 앞에선 침묵하거나 발뺌했다. 남의 얘기, 나완 상관없는 먼 이웃의 얘기, 인터넷에서나 접할 수 있는 얘기라면 뭐든 상관없지만 정작 자신의 얘기라는 가정 앞에선 여지없이 ‘진심’이 드러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당연하지만, 이런 ‘진심’을 접하면 때로 화나고 상처(이 상처는 앎의 쾌락을 위한 대가란 점에서 힘이며 자원이다)가 되기도 하지만 이런 질문에도 “지지해, 그의 행복이 중요하니까”라고 말하고선 다른 순간에 혐오증을 드러내는 사람을 접하면 짜증과 분노는 몇 곱으로 변한다. 그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 안달하는 태도에서 드러나는 특권 때문이다.

며칠 전, 졸업식 참석 때문에 올라온 엄마가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아침 玄牝의 한쪽 벽에 쌓아 둔 책을 찌푸린 얼굴로 한참을 보더니 한 마디 했다. “왜 이렇게 이상한 책들만 보냐?” 무슨 말인가 싶어 반문했더니, 지목한 책이 [동성애의 심리학]이었다. 순간 온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해서 부모님들도 알게 되는 것인가 하는 몸앓이가 스쳐갔다. 하지만 “이상한 책을 읽는다고 잘못되는 건 아니니까”라는 말로 맺었을 때의 루인은 뭐라고 할 수 없는 복잡한 몸에 빠졌다. 아직 이성애혈연가족에게 커밍아웃할 의향은 전혀 없으니 이 순간을 이렇게 넘긴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평생 부모님에게 커밍아웃 같은 건 기대도 못하게 되었으니 슬퍼야 하는 건지, 이성애혈연가족에게서 들은 혐오증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같은 발언도 혈연가족에게 듣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것은 의미와 무게가 다르다), 부모님이 온다는 얘기에 몇 가지를 숨겼는데 그것이 들키면 어떻게 될 런지 하는 공포까지. 그 외에도 아직은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복잡한 감정들로 아찔했다. (설날 부산에 갔을 때, 엄마는 하리수만 나오면 짜증난다고 몇 번이고 혐오 발언을 했었다. 어떤 지점에선 참 얘기가 잘 통하는 엄마지만 이런 지점에선 아득한 높이의 벽을 느낀다.)

트랜스가, 이반이, 커밍아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다시 고민하고 있다. 트랜스가, 이반이 그렇게 끔찍해?

작년 가을, 한 강좌에서 한채윤씨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때, “만약 지금 레즈비언인데 나이 60살 되어서 갑자기 남자를 좋아하면 이성애자가 되는 건가요? 양성애자가 되는 건가요? 노망난 레즈비언인가요?”라는 말을 해서 모두들 웃었다. “노망난 레즈비언”이라니. 크큭. 하지만 농담처럼 한 이 말이 그날 강의의 핵심 중 하나라고 루인은 몸앓는다. 트랜스와는 달리 이반의 성적 지향/성정체성은 관계를 통해 의미가 생긴다. 즉, ‘나’의 성정체성을 명명하는데 있어 상대의 젠더가 중요한 요인이다. 그리고 이런 지점 때문에 트랜스가 이반―좁게는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배척되기도 한다.

‘레즈비언'(‘게이’)인데 상대가 어느 날, “나 성전환 수술 할거야”라고 말 한다면 성정체성이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단순한 문제지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조금 전까지 ‘레즈비언'(‘게이’)이었던 정체성는 상대의 한 마디에 ‘이성애’자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적으면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사귀고 있는 사람이 혹은 당신의 가족 중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면 어떨까. 글을 시작하며 적은 상황이 여기에서도 발생한다. 엄마가 어느 날 “나 트랜스야, 남자라고”, 라고 말한다면 아빠라고 불러야 할까? 여전히 엄마라고 불러야 할까? “엄마”란 명명과 “아빠”라는 명명은 (다른 여러 친족호명과 함께) 철저하게 젠더로 구성되어 있기에 기존의 젠더를 붙잡고 있으려는 이상 해결 불가능한 문제다. (비록 사용하고 있지만, 가장 쓰기 싫어하는 호명이 “엄마”, “아빠”, “언니”, “오빠”, “누나”, “형”과 같은 젠더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명명들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사랑하는 건 상대방의 몸/욕망이 아니라 젠더로 재현하고 있는 이미지, 혹은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거울 역할은 아닌지. 남아선호 사상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아들(홍길동)이 트랜스’여성’으로 커밍아웃한다면 거의 초상집 분위기가 될 텐데 이것은 홍길동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혈연가족의 젠더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귀고 있는 상대방이 어느 날 커밍아웃을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상대방의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보여주는 어떤 이미지를―일테면 긴 생머리나 “몸짱” 같은 몸매, 잘생긴 얼굴 같은― 사랑하는 것이며, 이런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젠더를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성전환 수술을 한다는 말에, 트랜스란 고백에 그렇게 끔찍하게 반응하거나 나중에 알게 되곤 그렇게 싫어하는 이유는, 자신을 비출 거울 역할이 사라지기 때문에 가지는 불안함은 아닌지,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