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적 병역 거부

양심적 병역 거부와 관련한 기사들을 읽으며 고개를 주억거렸어. 중앙일보는 “할 일 안 하고 안 할 일 손대는 인권위”라는 사설도 실었더라. 하지만 가장 흥미롭게 다가온 기사는 “누가 아들을 군대 보내려 하겠나”라는 제목의 세계일보 기사. 제목부터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있잖아.

사진으로 해병대 출신의 아저씨가 나오는데, 해병대 출신의 아저씨도 아는 거지. 군대란 곳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그래서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란 걸.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군대를, 양심적 병역 거부가 인정되는 순간, “모두”가 군대에 가지 않을 거란 걱정을 어떻게 하겠어. 겉으로는 자랑하지만 실은 자기도 가고 싶지 않았을 테고, “내가 갔는데 네가 안가”하는 심보는 아닌가 싶기도 해.

이 만큼이나 가기 싫은 곳이라고 항변하는 모습을 접하며, 군대가 ‘남성’ 성인식/통과의례로서 얼마나 강하게 작동하는지를 느껴. 군대를 통해 어른이 된다고 말하는 문화 속에서 (이런 문화가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을 “어린이” 취급 하지) 예비역 병장이란 ‘계급’은 당연하다는 듯 권력과 명예를 가지잖아. 군대나 군사주의 문화와 관련해서 약간의 비판만 나와도 군대에 갔다 오지 않았으면 입 다물고 있어라 거나, 의무는 행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주장하지 말고 군대나 가라는 말들. 이런 말들이 왠지 수긍되는 분위기. 경력과는 무관하게 예비역 병장들이 알바 같은 곳에서 팀장을 한다거나, “역시 군대에 갔다 오니 다르네” 라는 말들. 심지어 군 입대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하거나 (지금은 없지만) 군가산점 얘기도 여전히 나오고 있잖아. 근데 도대체 왜 군대 경험에 대한 “보상”을, 법적으로 가야함에도 권력과 부를 통해 가지 않는 사람이나 군 제도를 만든 기관에 청구하지 않고 애시 당초 군 제도에 배제되어 있는 사람에게 하는 거야?

혹은 그렇게 가기 싫은 곳이면 폭력을 세습하지 말고 북한과 협상해서 통일하는 게 더 ‘현명’한 거 아냐? 군대가 없어지면 안 되는 이유가 분단국가라고 하니, 그 비용으로 통일하고 통일’비용’으로 전용하면 안 되려나. 그리고 결과적으론 군대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 더 좋은 거 아냐.

결국,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면 군대에 가지 않을 거란 얘기와 군대를 갔다 오면 어른이 된다며 예비역 병장들이 가지는 자부심(혹은 열등감? “피해의식”?)은 같은 내용인거야. 그 만큼 가기 싫고 폭력적인 곳을 갔다 왔으니 그에 따른 보상을 해야 하고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는 거.

바보 같아서, 너무 바보 같아서

너무 좋아하면 가라 앉는다는 말을 떠올린다.

어제, 말을 건넸다가 얼른 발뺌했다. 그 전엔 어떻게든 잘 보이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했다. 알고 있다. 좋은 느낌을 주고 싶을수록, 아무 말도 못하거나 말을 한다 해도 바보 같은 말만 한다는 걸. 뭔가, 인상을 주고 싶을수록 이상한 말만 늘어놓거나 나쁜 인상만 남긴다는 걸.

몸 상해서, 그 사람에게 바보처럼 남았을 거라는 불안에 몸이 너무 무거워서, 잠들기 전까지 몸을 태웠다. 메일을 보내려고 안달했지만, 괜히 보내는 것 같고 답장을 받을 때까지의 불안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보내지 않았다. 인터넷과 접해있는 내내, 수신확인을 수시로 확인할 것이고 답장을 받기 전까지 뭔가 잘 못 썼거나 더 바보 같은 글을 쓴 건 아닌가 하고 안절부절 못할 걸 알기 때문이다. 확인 못하고 잠든다면, 제대로 잠들지도 못하지만, 그 불안에 잠에서 깨자마자 나스타샤를 켜고 확인할 것이다. 이 불안이, 안절부절 못하면서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 메일 하나로 며칠씩 후회와 퇴고를 되풀이 하는 것이 힘겨워서 결국 보내지 않았다. 뭐, 보내지 않으면 또 보내지 않았기에 후회와 퇴고를 되풀이 하지만.

이런 루인을 느끼며, 그 사람에게 너무 몰입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결국 빠진 상태인건 아닐까, 했다. 거리를 둘 필요가 생긴 걸까. 거리를 둬야할 필요성이 몸에 떠오르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욕망 또한 강하다.

아, 하지만, 너무 바보 같은 인상을 남겼을 거란 불안에 다시는 닿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아, 정말 왜 그랬을까ㅠ_ㅠ

채식주의자라서 불편하냐고요?

제목처럼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살면 많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이런 질문을 받으면 상당히 곤혹스러운데,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부정확하지만 그래도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대답은, 별로 안 불편해요, 이다. 물론, 이 말의 전제는 기본적으로 직접 음식을 해 먹는다는 것. 젠더 사회에서 음식을 하는 사람은 주로 “엄마”/”아내”이니, “엄마”/”아내”와 함께 살고 “엄마”/”아내”가 모든 음식을 다 하는 상황에서 채식주의자인 자신의 정치성을 “배려”해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착취(폭력)라고 몸앓는다.

루인이 채식주의자로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는 건, 루인이 접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거나 페미니스트거나 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이유로 상처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면서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임이 있을 때 음식점을 선택하는 문제 등에 있어선 “불편”하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루인이 채식주의자라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루인이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 때문인 편이다. 그리고 루인이 보기에 ‘정말’ 불편한 사람은 루인이 아니라 육식주의자들이다(육식주의자는 루인 농담처럼, 장난스레 사용하는 말로 유제품을 포함한 육식을 하는 사람을 일컬음). 정말 불편한 사람은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채식주의자 ‘때문에’ 선택 사항이 줄어들거나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야 한다고 느끼는 그 질문자가 아닐까. 채식주의자가 같은 자리에 없었다면 그 사람은 불편함을 느낄 이유가 없을 테니까.

루인이 불편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육류나 유제품 등의 다른 존재들이 애시 당초 루인의 선택 사항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테면 루인이 육식을 좋아하고 선택사항에 있는데, 어떤 이유로 먹을 수 없다면 불편할 수 있겠지만 애시 당초 루인에겐 선택사항이 아닌데 어떻게 불편할까. 일테면 ‘이성애’자에겐 ‘레즈비언’이 “대안”일 수 있겠지만 정작 ‘레즈비언’에겐 그렇지 않은 것처럼.

물론 채식에 대한 감수성이 없어 음식점에서 주문할 때, 요구사항을 이상하게 여기는 반응은 불편하다. 이런 연유로 모임 등의 이유가 아니면 직접 해 먹는 편이다. 루인이 채식주의자라는 걸 알고는 외국의 각 종 사례를 들며 “인류학”적 지식을 자랑한 후 “그래도 나는 고기가 좋아”라고 말하며 채식을 정치학이 아닌 ‘단순한 취향’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불편하다.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싶어 반응하는 “관용”적인 (척 하는) 태도 역시 불편하다. (후자의 두 경우엔 거의 분노한다.)

불편하다니, 그럴 리가. 얼마나 좋은데!

[#M_ +.. | -.. | 채식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여기 참조)과 “채식한지 얼마나 되셨어요?” 란 질문 모두 싫어하는데, 루인이 무식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11년 하면 대단하고 6개월 하면 그냥 그런 건가? 모르겠다._M#]

[#M_ ++.. | –.. | 내용 중, “그 질문자”는 특정 누군가를 지칭하지 않아요. 행여나 해서…_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