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에서 느끼다/감각하다로

“다음에 만나자”, “내일 만나” 라는 말에서의 “만나다”는 “보다”란 의미다. “보다”는 시각으로 상대를 확인한다는 의미인데 시각으로 확인한다는 건, 시각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이처럼 시각을 통한 인식이 곧 경험임을 말해준다. 근대주체는 시각주체인데 사진/사진기는 시각주체의 욕망을 표상한다. 하지만 주지하다 시피 시각적 주체를 가정하는 것은 시각’장애’인을 배제하는 차별적인(폭력적인) 언어이다. 루인이 “보다”와 같은 의미의 언어를 쓰지 않기 시작한 건 여기에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시각주체로서,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단순히 보는 것 이상으로 어떤 규범적 보기를 전제한다.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며 내가 보는 사물은 너도 같은 식으로 볼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관점(觀點: 관점이란 말도 시각에 기반 한다)에선, 1.5의 시력을 가진 사람과 0.1의 시력을 가진 사람 모두 같은 방식으로 볼 것을 강제하고 색깔에 있어서도 모두가 같은 식으로 구분할 것을 전제한다.

0.1의 시력이지만 평상시 안경을 쓰지 않는 루인에겐 이런 다른 식의 보기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을 읽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웬만큼 가까운 거리가 아니면 상대방이 누구인지 못 알아 보는데 이럴 경우 상대방은 무시한다고 화를 내거나 불쾌하게 받아들인다. 나이주의가 강한 한국사회에서 상대방이 루인보다 나이가 많거나 심지어 교수/상사이기라도 하면 상황은 더 골치 아프다. 어떻게 ‘해명’을 하고 나면, 왜 안경을 안 쓰고 다니느냐고 묻는데, 루인의 대답은, 안경 쓰기 불편해요. 렌즈는? 시도했지만 실패했어요. 이런 불편함을 경험하는 루인에게 ‘진짜’ 문제는 안경을 쓰지 않고 ‘낮은’ 시력으로 다니는 루인이 아니라 동일한 시력으로 다닐 것을 강제하는 사회이다. 그들과 같은 시력으로 다닐 것을 강제하는 사회에서 시력의 기준은 누구의 눈으로 정한 것이며, 돌아다닐 때 상대방을 확인하면서 다닐 것을 강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0.1의 시력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였다면 지금과는 엄청나게 다른 사회였을 것이다. TV시청은 1.5m 떨어진 곳에서 하라고 하는데, 그건 시청자의 시력이 그 거리에서도 불편함 없이 볼 수 있음을 전제한다. 루인의 시력으로 안경 없이 그 거리에서 보려면 TV 화면도 엄청 커야하지만 그 만큼 자막과 같은 글씨 등의 크기도 충분히 커야 한다. 노안이란 말 자체도 특정 시력을 정상화 하고 있기에 가능하다. 노안에 맞춘 세상이었다면 노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

더 불편한 말 중 하나는, 왜 다른 사람을 안 보고 다니느냐는 것이다. 즉, 거리에서 마주쳤으면서도 인사하지 않았다고 불쾌해 하는 상대의 반응. 왜 거리에서 아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고 살피면서 다녀야 하는데? 더구나 다른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 데다 시력이 0.1인 루인이니 당신이 먼저 말을 걸면 될 거 아냐. (상대의 얼굴을 잘 기억 못하는 걸 주의가 부족하다느니 관심이 없어서라느니 하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더 화난다. 루인이 영화를 玄牝에서 보길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영화 속 등장인물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서 때때로 앞으로 돌려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쓰고 보니, 뭔가 우울하다-_-;;)

규범화된 시각주체로서의 보기는 시력을 넘어, 소위 말 하는 색약, 색맹과 같은 ‘비정상’ 범주를 만든다. 모두가 같은 색깔 체계로 사물을 볼 것을 가정한다. (색깔 자체가 근대의 발명품이긴 하다.)

이 그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소위 말하는 색약/색맹 검사표이다. 사람마다 이 그림을 읽는 방식은 다른데, 이 다름을 비정상규범에선 색약/색맹으로 규정한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식으로 색깔 체계를 가지고 있는 거지 어째서 이것이 색”약”이고 색”맹”일까. 색”맹”이라면 흑백과 회색 톤은 색깔이 아니라는 의미?

“만나”는 건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다. “맹”인(盲人: 맹盲자 역시 장님, 어둡다, 무지하다 등의 뜻을 가진다)의 모임은 만남의 자리가 아니란 의미일까. 봐야지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는 것으로 아는 것도 아니다. 모임이 단순히 보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요즘, 감각하다(感覺-), 느끼다란 말에 매력을 품고 있다. “만나”는 자리는 단순히 보는 자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느끼는 자리니까. 그러니 인사하는 방법도 달라지겠지. 다음에 “만나”요, 가 아니라 다음에 또 느껴요 혹은 내일 또 감각해요, 와 같이. 물론 느낌/감각은 같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뭔가 애매한 구석이 있긴 하다. 그래도 왠지 좋은 걸.

경력과 경험의 틈 (각주들)

다른 곳에 쓴 글의 각주들

주1) 페미니즘은 책을 몇 권 더 읽었는지, 수업이나 강의를 몇 번 더 들었는지, 더 많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 어떤 경력이 있는지 아닌지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페미니즘/여성학은 학문이 아니라거나 너무 어려워 현실과 상관없다, 등의 의미가 아니라 이런 내용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대학교육을 받고 영어 텍스트 한 둘 읽으면 ‘당연히’ 더 많이 알거라는 믿음 자체가 이미 엘리트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저작권(copyright)과 함께 상당히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지식인이니 지식인(대학생)의 사명이니 하는 따위의 언설들이다. 역사책을 읽으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지식인은 그가 살던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뒤쳐져 있는 사람이며 때론 뒷북치는 존재라는 것이다. “민중”/대중이라 불리는 집단(지식인 자신은 민중/대중이 아니라는 오만함을 전제한다)이 이미 경험했고 알고 있는 내용을 불필요하게 어렵게 만들고 그것에 저작권을 주장하는 것. 페미니즘은 이런 방식과 가장 멀며 이런 방식 자체에 문제제기 한다. 특화가 불편한 건, 그 한 편에 이런 지점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루인이 어떤 특정 지점을 더 많이 이야기 한다면 그런 책을 한두 권 더 읽어서거나 관련 경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지점들이 루인에게 특히나 더 민감한 경계들이기 때문이다. 루인에게 첨예한 정치적 긴장이 발생하는 지점을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때, 지식/경력과는 상관없이 기존의 ‘상식’과는 다른 언어/내용으로 말 할 수밖에 없다.

(사회학 관련 수업에 참가하며 “사회학자가 없으면 사회현상도 없다”란 말을 접한 적이 있다. 이 말을 한 선생님은 사회현상은 사회학자들의 인식틀로 구성된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루인에게 이 말은 현상 혹은 경험은 지식권력에 의해 위계화 된다, 로 다가왔다.)

주2) 관련 경력이 있다는 것과 경험을 말한다는 건 다른 문제이다. 11년 넘게 채식을 해왔지만 채식주의자로 정체화한 건 기껏해야 2년이 안 된다. 채식과 루인의 삶을 엮어가며 몸앓기 전까지, 루인에게 채식은 단지 식사 시간만의 문제였다. 아직도 채식(주의)은 루인에게 무지의 영역 중 하나이며 때론,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의 언어가 루인의 몸에 더 잘 닿는 경우도 있다. 경력이 있다는 것이 곧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안다거나 그것을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
어제 오늘, 결국 공개하지 않은 글을 쓰느라 시간을 보냈다. 과도한 예민함은 과도한 둔감함과 닮아 있어서 어느 순간 그 더듬이를 잃어버린다. 너무 예민하게 작동하기에 어느 순간 작동하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게 되며 그 찰라, 둔감함이 작동한다. 꼭 이런 이유로 글을 공개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고 나면 안절부절 못하고 무슨 글이든 공개하기 어렵다.

#
폭력은 일순간이다.

#
무시로 울음이 나오고 있다. 아무 때고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울음이 난다. 하루에도 몇 번이 아니라 한 시간에도 몇 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