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육아 단상..

처음 루인이 공동육아란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린 건 루인의 어린 시절이었다. 루인의 과거를 공동육아의 개념으로 떠올릴 수 있었던 건, 다른 맥락의 어떤 글을 읽으며 그렇게 정리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글은, 비’이성애’자, 이반queer 가족이든 ‘이성애’ 가족이든 상관없이 고립된 가족 중심의 문화 보다는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꾸려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좁혀서, 레즈비언 커플이나 게이 커플이 양육하면 아이들에게 별로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비난”(사실 상 공포)들이 있는데, 이런 비난에 동조하는 내용이 아니다. 가족이 ‘이성애’ 가족이든 비’이성애’ 가족이든 상관없이, 마을 공동체를 통해 아이가 여러 계층과 나이대의 사람들을 접하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70대 ‘여성’과 접하며 소통하는 경험을 갖는 것, 40대 백수 ‘남성’과 낮 시간에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경험, 가게 주인에게 때론 혼나면서도 동생들 데리고 잘 놀라며 과자를 받는 경험 등이 있는 것은 이후 중요한 경험,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글을 읽으며 루인은 곧장 루인의 경험을 떠올렸다. 아주 어릴 땐 주택가에서 살았고 초등학생 시절엔 아파트에서 살았던 루인은 두 곳 모두에서 이성애혈연부모에 의한 종일 보살핌(혹은 관리?)에 있지 않았다. 동네에서 놀고 있으면, 구멍가게 주인이 가게를 보면서 동네 아이들을 같이 챙겼기 때문이다. 굳이 구멍가게 주인이 아니어도 동네 사람이라면 지나가며 항상 동네 아이들을 챙겼다. 누군가 다치면 근처에 있는 어른이 와서 보살폈기에 굳이 이성애혈연부모가 같이 있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물론 젠더화된 현상은 있었지만, 어머니만이 자식에 대한 유일한 양육 책임이 있다는 억압이 지금과는 달랐다. (맞벌이에 대한 요구가 커질수록 양육에 대한 어머니만의 책임이 강조되는 건 의미심장하다.)

주택가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 즈음 하교를 해서 집에 돌아가면, 아무도 없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옆집 혹은 위층의 “아줌마”가 밥을 챙겨주곤 했다. 이로 인해 초등학교 2학년 즈음부터 계란을 굽고 밥을 챙겨먹는 ‘간단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점심때 부모님이 아무도 없다고 해서 그다지 걱정할 일은 없었다. 동네에서 놀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루인의 경험은, 이성애가족제도의 아버지/남편=생계부양자, 어머니/아내=전업주부란 식의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루인의 엄마는 취직을 한 적은 없지만 전업주부는 아니었고 루인이 살던 동네의 거의 모든 집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루인의 기억 속에 ‘여성’들은 중요한 그리고 항상 생계부양자이다. (생계부양자로서의 남편, 전업주부로서의 아내란 젠더역할은 판타지일 뿐이다. 한국에서 전업주부는 10%도 안 된다. ‘여성’/어머니/아내의 노동을 부업이란 식으로 불렀기에 비가시화 되었을 뿐.) 그렇기에 나이든 노인들이 한 곳에 앉아 얘기를 나누면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살피는 식이었다.

루인은 이런 경험을 공동육아로 해석하고 있었기에, 공동육아를 교수나 의사처럼 자기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고 경제적 기반이 되는 중산층들만의 일이란 말에 당황했었다. 공동출자를 해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한다는 말에 얼마간의 당혹감도 있었다. 도대체 어떤 공동육아를 계획하기에 중산층은 되어야 가능하다는 거지? 그렇기에 루인이 상상하는 공동육아는 친한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 살아가는 것뿐이다. 누군가 바쁜데 마침 바쁘지 않은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가 아이들을 챙겨주는 정도. 모두가 바쁘면, 또 그런대로 아이들은 생활할 수 있기에 별다른 걱정이 없는 생활. 아이들 곁에 항상 어른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착각이다. 아이들끼리도 아기들을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육아가 또 다른 노동이 되고 대안교육이 또 다른 사교육이 된다면 무엇 하겠냐고.

그런데, 루인이 오랜 산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20년 조금 더 산 것 뿐인데, 이런 경험이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무슨 동화 속 얘기나 되는 것 같고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_-;;

두 달 전에 쓴 글 고치기

두 달도 더 된 글을 고치며 어색한 문장과 엉성한 구성에 뭔가 갑갑함이 밀려온다. 그렇다고 새로 쓰기엔 감당할 자신이 없고 기존의 글을 고치기엔 뭔가 몸에 안 들어서 후회만 잔뜩 할 것 같다.

예전에 너무 몸에 안 들었음에도 어떤 이유로 공개했던 글이 있다. 쓴 사람의 입장에선 너무 싫어서 그 글을 썼다는 사실 자체를 지우고 싶었는데, 읽는 사람의 입장에선 꼭 그렇지는 않았나 보다. 그럼에도 너무너무 그 글이 싫어서 지금도 그 글이 느껴지면 얼른 외면한다.

지금 글이 꼭 그럴 운명에 놓인 것 같다. 뭔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한 것 같기도 하다. 속상하다.

채식이 중산층 특권이라고?

01. “생물학이 운명이다”란 말을 접한 적이 있다. 페미니즘에선 조금 ‘유명’한 말인데, 이 말을 통해 젠더차별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원래 이렇고 여자는 원래 그래”라는 식의 언설들이 모두 “생물학은 운명이다”란 말과 닿아 있다. 그래서 이 말에 대항하며 나온 말이 “생물학은 운명이 아니다”이다. 어떻게 읽으면 유용할 것 같지만, 별로 재미없는 말이다.

루인이라면, “그래, 생물학은 운명이다. 그런데 네가 말하는 생물학과 운명은 어떤 의미냐?”고 묻겠다. 루인의 입장에서도 “생물학은 운명이다.” 루인에게, 운명이란 고정되고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구성해가는 것이다. 생물학도 그렇다. 과학이라는 것은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논리의 집합체”가 아니라 그 시대의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내용이 바뀐다. 머리의 크기가 지능을 결정한다, 뇌의 크기가 결정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 연금술로 황금을 만들 수 있다 등등 어떤 시절엔 모두 과학적 사실이었다.

“무엇은 무엇이다”, 란 식의 언설에 “무엇은 무엇이 아니다”란 식으로 대답하는 걸 들으면 참 재미없다. 어떤 식으로든 의미는 있지만, 상대방의 전제를 고스란히 인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생물학은 운명이다”란 말이나 “생물학은 운명이 아니다”란 말이나 둘 다, 생물학과 운명에 대한 내용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런 식의 논의는 재미가 없다. 에로틱한 자극이 없으니까.

[#M_ +.. | -.. | 문답이어받기를 하며 15번 대답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좀더 자극적이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좀더 에로틱하면 좋겠다, 였다. 힛._M#]

02. “채식주의자들은 중산층의 계급적인 특권 문제가 있다”는 말을 자주 접한다. 채식을 선택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다는 얘기다. 오랫동안 이 말에 어쩌지 못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채식을 접하고 있으면 돈이 없으면 채식이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였다. 루인이 범한 착각은, “채식주의자들은 계급적 특권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이나 정말 계급적 특권을 가져서 채식을 하는 사람들과 루인의 계급을 무심결에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채식에 모종의 반감을 드러내며 이런 말을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대학교수 등의 중산층 계급이었다.) 쳇, 루인은 중산층이라서 옥탑방에서 생활하고 한 달 생활비를 50원 단위로 계산한단 말이냐.

채식을 중산층의 특권적인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자발이든 비자발이든) 지구 상 인구의 70%가 채식을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언설이다. 당연히 이런 통계자료는 채식 내부의 계급, 젠더 등의 다양한 차이를 비가시화한다는 문제를 가진다. 하고 싶은 말은, 소위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웰빙 채식과 젠더차별로서의 채식, 관계를 고민하는 지점에서의 채식, 동물권을 말하는 이들의 채식 등 채식과 채식주의 내부의 다양한 차이를 지우고 화자의 편견으로 채식을 획일화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신이 전제하고 있는 채식이 도대체 어떤 건데?”라고 되물었어야 했다. (아, 억울해. 으으으, 너무너무 화나!! 왜 이제야 깨달은 것이지, 바보바보바보.) 혹시 [슈퍼 사이즈 미]에서처럼, 젠더화된 채식과 이성애주의로 점철된 그런 채식을 상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 채식을 하는 ‘여자’친구가 주인공 ‘남자’를 챙겨주는 식으로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