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만나며

종종 어떤 문제에 대해 루인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입장에 있는지를 ‘모르는’ 루인을 만나면, 두려워진다. 이 이슈에 어떻게 접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건, 고민 없음, 아직도 몸이 말하는 언어를 듣지 못하고 있음이며 기존의 언어에 익숙함/안주함을 만나는 찰라 이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이 시작지점이다. 두려우니 덮어둘 것인가, 이 두려움을 앎으로 바꿀 것인가.

아직도 두려움 앞에서 아는 체 하며, 루인의 무지를 회피하고 싶음이 있지만(많지만) 이 두려움이 삶을 엮어가는 힘이란 걸 ‘안다.’ 이 힘으로 몸이 말하는 언어를 듣고 새로운 루인을 만난다.

그러니, 두렵지만, 매 순간, 두려움을 만나길 욕망한다.

당혹스럽지 않은 당혹스러움

[Run To 루인]에 어떤 경로로 들어오나 해서 리퍼리를 보다가 첫눈을 통해 누군가가 들어온 것을 보았다. 뭘까 하는 호기심에 눌러봤더니..

[#M_ 보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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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추천블로그를 눌러 봤다. 그랬더니…

[#M_ 보기.. | 접기.. |

_M#]

헉;;;

루인이 모르는 곳에서 루인이 소비되고 있다는 건, 당혹스러운 일이다. 아니, 루인은 루인이 모르는 곳에서 루인이 소비되는 상황을 너무도 싫어한다. 이런 이유로 튀지 않음을 미덕으로 여긴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아서 잊혀질 것도 없는 상태. 루인이 모르는 곳에서 루인이 소비될 가능성 자체가 없는 상태.

하지만 이곳 인터넷이란 또 다른 현실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Run To 루인] 자체가 공개와 소통(/소비)을 위해 만든 곳이니까. 그렇지만 이런 모습을 만나면 묘하다. 일전에 구글에서 루인으로 검색하면 [Run To 루인]이 최상단에 위치했던 것과는 뭔가 다른 기분. 검색에서 제외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닌데. 경계에 서 있는 모호함을 인터넷에선 ‘해결’ 혹은 소통할 수 있을까? “노국대장공주”를 검색해서 들어오는 것과 (요즘 [Run To 루인] 검색어 1위가 “노국대장공주”다-_-;;) 이렇게 얼토당토 안 한 추천블로그는 느낌이 너무 다르다고.

(첫눈에서 재미삼아 루인으로 검색을 했더니 추천블로그가 70개가 나온다. 우훗. 뭐, 네이버에선 지금 현재 389명이 나오는데, 뭘. 이런 개성의 익명성이 좋다. 튀지만 튀지 않음.)

누구의 언어로 상상할 것인가

목요일에 있을 세미나 발제문을 쓰겠다고 여성학 사무실 책상에 앉았다. 노트를 펴고 세 쪽 정도를 쓰다가, 몸이 엉키면서 쓰고 있던 내용을 찢어버릴까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의 몸앓이 지점에서 새로 쓰려면 목요일까지 발제문을 쓴다는 건 불가능해 그냥 쓰기로 했다. (슬프다.)

이맘이랑 종종 나누곤 하는 얘기 중 하나는, 한국어로 상상하기다. 즉, 외국어(주로 영어)를 외래어로, 음역으로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로 번역/해석해서 사용하고 그런 한국어로 상상하는 것. 비단 번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위 학술적인 용어라고 말하면서 배배꼬아놓아 내용은 쉬운데 단어만으론 무슨 내용인지 모르게 만드는 지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나 신나고 너무 재밌는 공부들이 영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점에 대한 문제제기/불편함/불만이다.

그렇다고 “순 우리말”이란 게 있다고 믿지 않는다. “순 우리말”이란 것 자체가 환상이고 이데올로기다. 그렇기에 “우리말을 사용하자”는 민족주의적 언설을 반복하려는 것도 아니다. 자국어와 외국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문제는 식민주의/탈식민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일테면 젠더(gender)라는 용어가 그렇다. 한국어론 젠더 뿐 아니라 sex/sexual/gender/sexuality 모두를 성性으로 번역/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페미니즘 책이 이 용어들을 어떻게 번역/해석할 것인가로 최소한 몇 마디는 언급 한다. 경우에 따라선 성을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고 불편함을 말하기도 한다. 루인 역시 그랬고/그렇고, 그래서 항상은 아니지만 음역을 사용하곤 했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로.

하지만 요즘 들어, 이렇게 구분하는 것 보다는 성이라는 하나의 언어로 쓰는 것이 어쩌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는, 몸의 경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몸앓이를 하고 있다.

히즈라, 버다치, 트랜스젠더, 트라베스티와 같이 외국어로 익숙한 언어가 한국어, 양성구유와는 대응해서 사용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하면 몸은 더 복잡해진다. 흔히 “제 3의 성”이란 말을 쓰며(루인은 이 용어가 불편하다) 트랜스젠더 등을 의미하지만 트랜스젠더와 양성구유는 그 의미와 내용이 너무 다르다. 그렇다면 한국어론 음역, 트랜스젠더로 사용할 것인가. 아님, 뭔가 께름칙해서 사용하길 꺼려하지만 성전환자란 용어를 계속 사용할 것인가. 성전환자와 트랜스젠더를 같은 의미/내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미묘하고도 께름칙한 지점이 큰데 계속해서 사용할 수는 없다.

불만은, 이런 고민들을 한국어를 사용하는 루인은 하지만 미국에 살며 영어를 사용하는 이는 하지 않는다는 것. 기존의 언어와 학문이 누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말 하나 마나?). 전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 언어의 사용은 위계와 권력을 나타낸다.

암튼 대충 이런 문제로 세 쪽 가까이 쓴 발제문을 찢어버릴까, 했다. 다만 이걸 핑계로 발제문을 안 쓸 수는 없어 그냥 계속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불편하다. 기껏 젠더를 해석하고 그 해석에 토대를 둔 언어를 구성하려는 찰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한다. 행복하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