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소녀

그런 영화나 책이 있다. 너무도 빼어난 작품이지만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은. 혼자만 그 텍스트를 읽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권하기엔 너무도 아프기 때문이다.

[천상의 소녀Osama]가 그렇다. 이랑의 이번 주 세미나 주제와 관련해서 봐야지 하고 봤다가, 그 이상의 결과와 만났다.

이 영화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 혹은 지금의 루인에게 있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일전에 젠더 구조에선 ‘여성’/이반queer/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리티의 삶과 일상, 공포, 폭력, 전쟁을 구분할 수 없음을 그린 소설이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다. 아니, 영화를 찍고 싶다는 욕망은 없으니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품고 개략적인 줄거리를 써 보기도 했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살아간다는 것이 곧 전쟁과도 같음을, 전쟁과 평화가 구분되는 것은 젠더 사회에서의 남성젠더들만의 경험일 뿐,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삶이 곧 전쟁이며 매 순간이 치열한 생존투쟁임을.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지점을 빼어나게 보여준다. 그래서 보는 내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울 수도 없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영화(?)지만 보는 내내 한국이라고 느꼈다. (타인의 고통을 상징으로 환원하는 이런 시선에 저주를!)

황우석이란 불편함 혹은 황우석이란 성폭력

지난 봄, 어느 강좌에서 황우석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무슨 얘기였냐고? 바로 요즘 한창 떠들썩하게 회자되고 있는 그 내용이다. 교수와 연구원이란 위계 권력 관계로 인해 연구원 중에서 난자를 제공하고 있다는 얘기, 불임클리닉 등에서 난자가 제공/판매된다는 얘기, 등등. 당시 한 기자가 황우석에게 질문했다고 한다. 바로 이 문제로. 그러자 그가 했던 말은, “여기가 어떤 자린데 감히 그런 얘기를 하느냐”(정확하게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이런 내용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의사 혹은 과학자는 자신이 신이라도 된다고 믿는 걸까.

玄牝엔 TV가 없으니 MBC PD수첩을 못 봤지만 지금 MBC를 향한 무수한 악플들을 보고 있으면 일련의 몇 가지 ‘사건’들이 떠오른다. 작년 가을에 있은 이영훈씨 사건, 이승연씨의 “위안부 누드” 사건, 더 거슬러 올라가면 끔찍했던 2002년 월드컵. 그리고 이 사건들과 연결고리가 되는 일제식민지 경험과 박정희 독재 경험,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방식.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민족의 수치라고 말하는 당시의(그리고 여전한) 발언이나 지금, MBC에서 방송하는 광고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말하며 “아이러브 황우석” 같은 카페가 뜨는 것은 연장선상에 있다.

국익이 아니라 진실이 우선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익’과 ‘진실’을 경합하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누구의 국가/국익인지 말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국익 운운하는 태도나 “아이러브 황우석”과 별로 다르지 않다.

소위 진보 운동 단체라고 말해지는 곳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단체가 중요 하냐 성폭력(같이 사소한 문제)이 중요 하냐”이다. 민족이 먼저냐 ‘여성’운동이 먼저냐, 계급이 우선 하냐 ‘여성’운동이 우선 하냐 란 말도 모두 같은 내용이다. 이들 언설은 모두 ‘여성’은 단체/민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남성’만이 단체/민족 구성원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국익과 진실이 경합할 수 있는 것은 그 진실이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별로 안 좋은 비유지만, 이번 사건이 정관수술이나 정소 제거와 관련 있다면, 즉 황우석 연구를 위해선 정관수술을 하게 된다거나 해도 이런 식으로 반응할까. 국익과 진실이 갈등하는 식으로 말할까.)

연구를 위해선 한 사람의 ‘여성’에게서 한 번에 10개 정도의 난자를 ‘채취'(채취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하면 ‘여성’이 어떻게 간주되는지 너무도 분명해진다)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사용하는 호르몬 주사가 몸에 얼마나 해롭고 고통스러울 지는 조금만 생각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황우석 문제를 (국가) 성폭력으로 볼 능력이 안 된다는 말인가. 진실은 도대체 누구의 진실이고 국익은 누구의 국익인가. 이 과정에서 ‘여성’/’여성’의 몸이 비가시화 되고 있는 맥락은 무엇이며, 난자기증 관련 기사의 제목이 “기증자”란 몰성적沒性的인 언어로 표시되고 있음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비가시화되고 이득을 보는 자는 누구인가.

루인의 위치positioning에서 이 문제는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성폭력)이기 때문에 황우석이란 인물, 황우석의 연구 방식, 그리고 이를 둘러싼 논란들이 모두 동일한 선상에 위치한다. 그렇기에 인터넷에서 접하는 황우석 지지, 비판 모두 불편하다. 황우석 비판이 가시적으론 MBC PD수첩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언론의 자유 운운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불편하고.

[#M_ 덧글 두 개.. | 닫기.. |

1. ‘국익’이 중요하면 이건희의 노동자 탄압과 탈세와 같은 문제도 용인 한다는 의미인가.

2. 호르몬 주사의 고통을 상상할 수 없다고? (그런 사람만 읽으세요.) 그 강좌에서 선생님이 해준 비유를 그대로 하면, 열 번에 할 월경을 한꺼번에 한다고 상상해 보라고.

_M#]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딘가로 환원되는 공간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딘가로 환원되는 공간
― “Your Body Is A Battleground.”인 공동경비구역
#일전에 쓴 [공동경비구역 JSA]를 수정한 글이예요.
이랑에도 올렸고요.

공동으로 경비하는 구역은 어디에 속하는 곳일까. 대한민국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혹은 그 모두에? 아님 그 어느 쪽에도?

며칠 전 [공동경비구역 JSA]를 봤다. 그전까진 관심도 없다가 우연히 본, 지뢰를 밟고 살려달라는 장면이 재밌어서 봐야지 했다.

“권력은 ‘무지’를 통과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무지’가 공포를 만들어낸다. 서로에 대해 모르도록 함으로써 서로를 향한 적개심을 형성한다. 6.25 이후 특히 박정희를 거치면서, 북한과 공산주의/사회주의는 “빨갱이”, “얼굴이 빨간 괴물”, ([똘이장군]에서의) “늑대”이지만 공산주의가 뭔지, 사회주의가 뭔지, 주체사상이 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는 것 자체가 보안법과 같은 법에 걸리는 위법/친북행위이기에 아예 모르면서 무조건 “빨갱이”라고 적대시했다. 이 영화는 이런 무지가 적개심을 만들어 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볼 만’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작년 가을 즈음, 이영훈씨의 과거사 청산 관련 발언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반응이 떠올랐다. “세상엔 빨갱이와 빨갱이들의 적”만 있을 뿐이라는 사유는 기생 관광, 기지촌 성매매와 전시 성폭력은 연장선상에 있다는 말을 “(그럼) 정신대 할머니들이 매춘 여성이란 말인가?”로 반응하는 것처럼 획일화된 이분법(monolithic)의 전형이며 결국 적/타자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세울 수 있다는 점에서 주체라는 것이 취약한 존재이며 허상임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소피(이영애)는 이를 폭로하는 존재이다.

중립국에서 파견한 존재(소피)를 여성젠더로 재현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한데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전선이 남성젠더들만의 것이며 작년, 이영훈씨를 둘러싼 반응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음을 암시한다. 군 위계상 계급으론 상관임에도 실제 소피의 역할은 두 ‘남성’을 보살피는 것인데 이는 ‘남성’연대homosocial bonding사회가 ‘여성’이란 존재를 “어머니”/’창녀’로 환원함을 의미한다.

성매매 담론이 뜨거운 지금, 성매매방지특별법에 찬성이냐 반대냐 혹은 성매매에 찬성이냐 반대냐 하는 식의 질문을 쉽게 접한다. 하지만 이런 질문 방식들 모두 문제인데 성매매와 같은 문제를 이렇게 획일적인 이분법으로는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찬성 아니면 반대란 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문제 자체가 없다고 본다). 성매매엔 반대하지만 기존의 성매매 방지 특별법이 문제이기에 특별법에 반대할 수 있다(“반대한다”는 “그것과 의견을 달리 한다”는 의미지만 “그것이 틀렸다”로 해석하는 것 역시 이분법적 사유이다). 혹은 젠더사회에서의 노동을 다시 사유하고 성매매를 둘러싼 기존의 담론이 누구의 시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문제 삼기에 성매매방지특별법을 비판 할 수도 있고 성매매방지특별법이 “‘남성’의 행복추구권을 침해 한다”며 성매매방지특별법을 반대할 수도 있다. 전자와 후자는 전혀 다른 의미/전선이지만 획일화된 이분법 구조에선 둘 다 같은 반대로 환원된다. 페미니즘과 같이 기존의 전선과는 다른 전선을 형성하는 정치에 너희들은 어느 편이냐며 끊임없이 ‘진보’ 아니면 ‘보수’, 찬성 아니면 반대 어느 한 편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기존의 정치적 전선에서 다른 목소리는 존재하기 힘들며 존재한다고 해도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공동경비구역이 ‘분쟁’지역인 이유기도 하다)

정치적 중립은 탈정치적이란 의미가 아니다. 중립은 기존의 양분된 대립구조에서 어느 쪽도 아닌, 다른 정치적 전선을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립을 탈정치적인 입장으로 보는 것은 “비권”이란 말처럼 무지/이분법의 소산이다. 하지만 중립을 탈정치적인 것으로 환원하고 기존의 ‘진보’/’보수’를 위협하지 않고 보살필 것을 요구하는 것이 현재의 한국이다. 이 영화에서 소피의 존재가 그렇다. ‘여성’적 섹슈얼리티, 여성젠더로 재현된 중립국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모두를 보살피고 상처를 달래는 역할을 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정치적 전선으로 등장하려는 순간, 소피는 본국으로 ‘추방’된다. 그렇기에 소피와도 같은 존재인 공동경비구역은 “적 아니면 나”에 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 대리 분쟁지역이며 여성젠더로 재현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한 많은 영화들이 간첩을 여성젠더로 재현함에도 불구하고(대표적으로 [쉬리]를 보라) 이 영화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남성젠더로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이다. 무지를 넘어 섰을 때, ‘친구’가 될 수 있는 ‘적’은 ‘남성’이어야지 이성연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여성’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분쟁이 발생한다면 대리 분쟁지역이면서 여성젠더로 재현되는 공동경비구역에서 발발함으로써 ‘남성’연대의 위협을 해소한다. (수혁(이병헌)과 경필(송강호)의 갈등은 소피를 통해서/매개해서만 드러난다.)

영화는 “세상엔 빨갱이와 빨갱이들의 적”만 있을 뿐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지만 기존의 ‘남성’정치전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를 수 있었던 영화가 진부하고 (관객에게) 폭력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