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균열: [무어의 마지막 한숨]

심한 폭력에 희생당한 사람은(옛날 올리버 대스가 꿈속에서 직관했던 것처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릴 것이다. 자신의 몸과 정신뿐 아니라, 온 세상과의 모든 관계가 미묘하고도 명백히 달라져 버린다. 어떤 확신, 자유에 대한 생각도 영원히 산산조각 나 버린다. 때리는 자들이 항상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다면. 종종 얻어맞는다는 것은 분리이기도 했다. 얼마나 자주 나 자신 그런 걸 목격했던가! 희생자는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다. 그의 의식을 공기 중에 떠다니게 한다. 그는 자신을 깔보는 것 같다. 제 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부러지기도 하는 걸 바라본다. 앞으로 그는 결코 완전히 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

―살만 루시디 [무어의 마지막 한숨](하) p.142~143

더디게 읽고 있다.

폭력이 구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절실하기에 아픈 문단이다.

“희생자는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다.”
이 문장에서 숨이 멎었다.

섹슈얼리티가 도대체 뭐죠?

00.주제가 흥미로워 청강(!) 들어간 수업에서 조별 발표한 내용.
(하지만 루인이 원한 주제는 이번 주 목요일이었다.)
주제는 성적 취향(섹슈얼리티)
내용은 동영상과 설명과 퍼포먼스.
퍼포먼스 내용은 ‘이성애’커플과 백인’여성’-흑인’남성’커플, ‘장애”남성’-비’장애”여성’커플, ‘동성애'(게이?)커플, 독신’여성’이 나왔고 성애 장면이 나오고 이성애커플이 불화를 일으키면서 다른 성적 취향이 함께하게 되는 장면으로 끝난다. 뭐, 대충 이렇다는 얘기다. 당사자들이 이 글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항의하겠지만 루인은 이런 식으로 읽었다.

01. 쑥의 지적+루인 첨가
(쑥의 블로그를 링크하고 싶으나 본인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밝히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생략.)
도대체 발표자들은 성적 취향/섹슈얼리티를 어떻게 해석 한걸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도 성적 취향인가. 백인과 비백인의 사랑도 성적 취향이란 말인가.
(자세한 건 뒤에서. 쑥의 문제제기가 여기서 그쳤기 때문이 아니라 뒤에서 할 말과 너무 많이 겹치기 때문에.)

02. 교수의 발언 중에서
(선생님이란 지칭은 말 그대로 먼저 태어나 배운 사람을 일컬으나 존경의 의미도 함께 있는데, 그 수업 교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관계로 그냥 교수라고 부르겠음. 흔히 청소부님이라고 하지 않는데 교수님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임.)
교수의 마무리 발언 중, 많은 부분이 문제였다. 이 수업의 경우, 여성학 개설과목의 한 과목이지만 루인이 아는 사람에 한하자면 이 과목에 호의적인 사람은 별로 없는 듯. 전공자나 깊이 있게 배우고 싶은 사람에겐 실망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극렬 안티(페미니즘)가 되어 나가는 사람도 있다고 함. 루인은 수업을 직접 들은 적은 없고 직간접적으로 수업을 듣거나 다른 사람의 얘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고, 교수와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마다 실망했기에 별로 안 좋아한다. 어떻게든 이 교수의 수업을 듣지 않고 대학원까지 졸업하는 것이 목표이기도 하다는-_-;;

02-1. “당연한 것을 뒤집어 봐라”
마무리 발언을 하며 교수가 한 말 중에 “페미니즘에서 당연한 것을 뒤집어 봐라고 하듯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 순간 문제제기할까 하다가 그냥 넘어갔는데(이미 수업 마칠 시간이 지났기에-_-;;) 문제 있는 말이다.
루인이 아는 페미니즘은 당연한 것을 뒤집어 보는 것이 아니라 당연함은 누구의 입장이냐고 묻는 것이며(전자와 후자는 다르다) 또한 그 당연함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페미니즘도 이반정치학(퀴어queer정치학)도 당연한 것을 뒤집어 보는 것이 아니다. 다른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당연한 것을 뒤집어 보겠냐. 당연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기존의 이데올로기가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며 매 순간이 투쟁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지 당연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을 뒤집어 보려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을 뒤집어 보라”라는 말은 그렇게 말 하는 사람에게 “당연한 것”은 불편하지 않은 것, 경계를 형성하지 않는 것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페미니즘이 당연한 것을 뒤집어 보는 것이라면 루인은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조금 딴 소리지만, 수업 교수의 말을 들으며 페미니즘/여성학과 양성평등을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한다고 느꼈는데 페미니즘이 양성평등을 말하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루인은 페미니즘을 반대한다. 반대 수준이 아니라 열렬한 안티페미니스트가 되었을 듯. 크크크)

02-2. “우리”
비단 이 교수의 말에서 뿐이랴. “우리”란 말은 너무도 빈번하게 사용되기에(우리 집, 우리 엄마, 우리 학교 등등) 별문제제기 없이 넘어가기 쉽지만 너무 자주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 루인에겐 폭력적인 말이다.
우리? 오늘 수업의 경우, 교수인 당신과 학생인 루인이 우리일 수 있을까. ‘이성애’자인 당신과 비’이성애’자인 루인이 우리일 수 있을까. 젠더 범주의 성으로 살고 있는 당신과 이반queer 범주의 루인이 우리일 수 있을까.
“우리”란 말은 그 자체로 배타적이며 배제하고 위계질서를 강조한다. 그리하여 화자의 “우리” 범주(일테면 서울출신, 서울거주, ‘이성애’, 비’장애’인,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병역 의무를 마친 ‘남성’)와 다른 위치positioning에 있을 때, ‘나’의 다른 경계를 지우고 “우리”에 속하는 척 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서 원천봉쇄 되어 배제된다. “우리”라는 말은 획일화시키는 언어이며 그래서 차이와 그 차이를 발명하는 권력을 말할 수 없게 한다.

02-3. “조심스럽다”
교수는 여러 번에 걸쳐 이 주제에 대해 말하기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그런 말은 타자화/대상화하는 말이란 거? 조심스럽다고 생각하는 당신의 심리/무의식에 대해 말해야지 않을까요?

03. 성적 취향 – 섹슈얼리티가 뭐예요?
(01번 내용과 연결)
변혜정 선생님은 섹슈얼리티sexuality를 관계라고 해석하고 루인은 정체성으로 해석한다. 다르면서도 ‘같은’ 말인데, 루인이 말하는 정체성(섹슈얼리티)은 관계 속에서 유동하고 다중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체성(섹슈얼리티)은 어떤 관계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어떤 집단에선 피부색이 의미를 가지지 않지만 어떤 집단에선 피부색이 차별의 근거가 된다. (선생님도 정확하게 이런 의미로 관계라고 해석했던가…기억이 가물가물-_ㅜ)
하지만 발표조는 섹슈얼리티를 다양한 성적 취향으로 해석했던가. 사실, 발표조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정확한 해석 없이 막연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섹슈얼리티와 성적 취향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한 것.
만약 섹슈얼리티를 관계나 정체성으로 해석한다면 01번의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성적 지향은 물론 피부색, ‘장애’/비’장애’, 나이, 출신지역, 젠더 등이 모두 섹슈얼리티의 범주이기 때문이다(이 말이 인종, 종교, 젠더, 나이 등이 섹슈얼리티의 하위 범주란 의미가 아니다). 일테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비‘이성애’적 연애는 섹슈얼리티의 범주에서 읽는 지점이기에(젠더 범주에선 해독 불가능한 부분이 너무 많기에) 그렇게 해석했다면… 이 글을 쓸 이유도 없었겠구나-_-;;
하지만 발표조는 섹슈얼리티를 성적 취향과 동의어로 사용했고 그러면서 퍼포먼스 내용엔 ‘장애”남성’과 비’장애”여성’의 사랑,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의 사랑을 함께 다뤘다. ‘장애”남성’을 사랑하는 게 성적 취향인가?
앞의 글을 읽어오며 눈치 챈 이도 있겠지만 성적 취향이란 말 자체도 문제다. 이 말이 문제가 되는 건, 현재 한국 사회가 강력한 젠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성애’나 ‘동성애’가 취향인가, 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성적 취향이란 말은 성적 지향이 사회문화적인 맥락과는 동떨어진 아주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의미이다(그렇기 때문에 “성적 취향은 개인적 선호”라는 식의 말은 상당히 문제적인 언설이다). 성적 취향이란 말은 ‘이성애’/젠더 문제를 정치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자신의 쿨cool함을 강조하고 싶음을(“동성애? 당연히 인정하지”라는 식의 말처럼) 무의식에 깔고 있다. 비’이성애’ 행위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지향성orientation의 문제이며 그렇기에 정치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발표조는 심지어 인종이나 ‘장애’/비’장애’와 같은 지점들도 성적 취향으로 환원해버렸다. 동시에 이들 성적 “취향”은 곧바로 성애화/성교화 되었고.
그렇다면 발표조가 해석하는 섹슈얼리티/성적 취향은 도대체 뭘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쑥이 이런 의미로(좀 다를 수도 있다;;) 질문을 던졌지만 발표조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루인이 던진 질문 역시 알아듣지 못했기는 마찬가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나마 빗나간 방향으로라도 답변을 한 건 반도 안 된다. 힝~)

04. 다양하다고?
발표조는 다양한 성적 “취향”의 공존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무대 위에 올라온, 그리고 발표조가 말한 내용은 이성애/젠더 관계뿐이었다. 발표조는 전복적인 내용을 구성했다고 했지만 너무도 진부하다 못해 위험스럽고 폭력적이기도 했다. 영화 [오아시스]를 예로 들며 그와는 다른 ‘장애”남성’과 비’장애”여성’의 연애를 무대에 올렸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흑인’남성’과 백인’여성’의 연애를 무대에 올리며 그것이 전복적인 관계를 꾸미기 위해서라고 했다. 도대체 뭐가 전복적인 거냐고. 질문 시간에도 말했지만 상상력이 너무 빈곤하게만 보였다는 것이 솔직한 평이다.
교수는 수업을 마무리 하며 발표조의 의도를 생각하자고 했지만 의도를 모르는 것이 아니잖아. 또한 의도는 언제나 선하다는 걸 모르고 하시는 말씀인지. 모든 의도는 선하다고. 아내폭력 가해 남편도 의도는 아내를 사랑해서란 걸 모르시는지요.

05. 그리고
목요일에 또 이 수업 청강할 예정. 주제가 드랙퀸이라는데 어떻게 듣지 않을 수 있겠냐고.

믿을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쓴 말은 하고 싶은 말의 반의반도 안 된다. 아직도 몸이 말하는 언어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기 검열’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주 화요일, 다른 수업에서 루인과 의견이 같으냐 다르냐로 약간의 논쟁이 있었고 결국 같은 것 같다고 루인이 수긍했는데, 오늘 너무도 다르다는 걸 확인했다. 그럼 도대체 왜?

#(다시 읽으며) 03번에서, 루인의 글과는 미묘하게 다른 지점에서 쑥이 말했는데, 그 지점 역시 루인도 말하고 싶은 문제인데, 문제는 그게 너무도 ‘자명’해 보여(일테면 01번에 쓴 것 처럼) 뭐라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듣지 못하고 있다. 으으으 이 답답함이라니!! 몸이 말하는 언어를 모두 들을 수 있다면 그땐 행복할까? 불행해도 좋으니 듣고 싶어~!!!

문희준 군 입대 단상

문희준이 현역 입대한다는 기사를 보며, 기사도 기사거니와 리플들이 상당히 흥미롭다.

인기 ‘남성’ 연예인이 군 입대 한다는 사실이 기사거리가 될 수 있는 사회라는 것과 그 기사의 리플들이 대체로 호의적이라는 사실은 한국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역설적으로 ‘남성’연예인들(비단 연예인뿐이랴)이 군대에 얼마나 가기 싫어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면서 군대에 입대한다는 것과 면제 받거나 ‘기피’하는 것에 어떤 감정을 가지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한땐 문희준 관련 기사엔 리플 자체를 달 수 없게 했던 적도 있었다. 인신공격 수준을 넘어서는 악성리플이 너무도 많았기에 포털사이트 측에서 취한 궁여지책이었으리라. 하지만 문희준이 현역 입대한다는 기사에 달린 리플들은 유승준과 비교하며 상당히 호의적이고 심지어 ‘지지’ 한다.

[#M_ 잠깐!! | 계속~ | 악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악플의 대부분은 소위 “빠순이”라고 불리는 ‘여성’팬들을 향해있다. 그리고 이 현상이 더 ‘흥미’롭다. 악플러들의 공격 방향이 사실상 문희준이 아니라 문희준의 팬들에게 향해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아마 예전에 있었던, 외국인 영어 학원 강사 “사건”때 보여준 리플들과 같은 맥락이겠지. 피해의식 말야._M#]

입대한다는 사실에 억울해하면서도 자랑하는 이중적인 감정은 남성연대 통과의례라는 점에서의 자부심과 “신의 아들”에 대한 열등감, 억울함, 그리고 피해의식이 뒤섞여 있는 감정일 테지. (이렇게 ‘단순화’ 하는 이유는 군대 내 성폭력/구타 문제와 이 문제는 섬세한 결을 따라 구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군대 내 성폭력/구타 문제는 국가나 국방부 같은 곳 혹은 구타 당사자/제도에게 문제제기할 지점들이지 비’남성’에게 징징거리며 보살펴달라고 할 문제가 아니다.) 인기 ‘남성’연예인이 군입대하는 것이 커다란 기사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은 군대에 간다는 것이 ‘손해’라는 지점을 강조함(그것이 특권임을 비가시화 시킴)과 동시에 그 만큼 국방의 의무가 신성함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서겠지. 리플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이런 지점들이다. 군대가 얼마나 힘든지 다시 한 번 상기하고 문희준도 이제 군대에 가니 “어른이 되었다”는 ‘남성’연대의 확인. 그리하여 누구도 군대 제도가 가지는 폭력성과 군 입대 자체를 문제제기 할 수 없고 병역기피와 양심적 병역 거부가 같은 것으로 환원된다.

이런 지점들이 결국 군대 없는 나라를 상상할 수 없게 한다. 24시간 전시 상태를 시뮬레이션하고 있기에 군대는 영원한 성역이고 군 입대 여부를 통해서만이 발화권리/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나라.

권인숙씨가 쓴 최근의 책 제목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은 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