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언어

지식이 삶과 만나 앎이 되는 순간, 지금까지 썼던 언어는 바뀔 수밖에 없다. 이렇게 언어가 바뀌는 찰라 삶과 앎이 만나고/분리될 수 없음을 몸으로 앓게 되고 다시는 이전에 언어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면 이전의 언어는 지금의 몸과 충돌하며 불편하기 때문이다. (글 분류의 “삶~앎”은 그런 의미에서 나온다. 자기 다짐의 의미랄까.)

그래서 루인이 스스로 내뱉고도 가장 무서워하는 말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비단 자신이 하는 말이 타인에게 어떤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지식자랑을 하고 있는지 정말 몸으로 앓은 언어를 말하고 있는지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제 민우회 강좌를 들으며, 근래 들어 들은 강좌 중, 몸을 가장 복잡하게 만든 강좌였다고 중얼거렸다. 정말 너무도 불쾌하고 불편한 강좌면서 어떻게 그렇게 괜찮은 강좌일 수 있을까 싶었다(좀 심하게 과장하면 최악이면서 최상이었다고 할까). 초반의 강의 부분에선 수강생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을 말했고, 질의응답시간(아무리 봐도 그 시간을 ‘토론’시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엔 질문자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답변을 하기도 했다. 나서기를 싫어하는 루인이면서 동시에 튀고 싶어 하는 루인이기에 그다지 질문을 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어젠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그건 질문이 아니라 문제제기였고 그래서 어제의 그 공간 자체가 루인이 바랐던 것과는 틀이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암튼 루인은 몇 가지 문제제기를 했는데 강사는 루인의 맥락을 읽지 못했다. 그럼 다시 말하라고? 아쉽게도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강사는 자신이 권위와 차별이 없는 공간에서 생활하며 그런 생활을 만들려고 한다지만 어제 그 자리에서 루인이 겪었던 건, 강사와 수강생이라는 위계질서의 엄격함, 나이에 따른 권위주의 등이었다.

지난 봄, 지금과 같은 민우회 여성주의 학교-간다 봄 학기 수업을 들으며 깨달았던 것은, 정말 몸의 세계관이 다르면 타인의 말을 알아듣기가 어렵구나, 였다. 강사 중 한 명인, ‘남성’ 평화학자의 질문(두 명의 강사가 함께 진행했다)은 어느 부분까지는 알아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멍한 상태로 말을 흘렸다. 이전까지, 학교 수업 시간에 토론을 하며 루인이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답변을 하는 것을 경험하며 답답했는데 왜 그런지 이해되는 순간이랄까. 그렇다고 다른 세계관과는 대화/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른 몸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더 격렬하게 대화의 장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다(대화/소통의 첫 번째 전제는 이 과정을 통해 달라진 자신을 만나겠다는 열망이다). 어제의 자리가 토론의 장이 아니라 질의응답시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사는 루인의 언어를 자신의 세계관으로 환원해서 ‘엉뚱한’ 말을 해버렸고 그래서 당황했고 심지어 강사가 말하는 “유목적 사유”란 말 자체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유목적 사유”라는 말을 하기는 쉽다.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믿기도 쉽다. 하지만 루인이 읽는 “유목적 사유”는 끊임없는 자기 회의와 반성, 그리고 새로운 언어의 사용이다. 루인의 믿음 중 하나는 지식이 삶과 만나 앎이 되는 순간, 언어가 바뀐다는 것이다. 더 이상 기존의 언어는 불편하고 변화한 몸을 설명할 수 없기에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양성평등”이란 단어가 문제적이라고 지적하고 ‘동성애’자가 인구의 10~15% 정도를 차지한다고 말하면서도 모든 설명을 ‘여성’/’남성’으로만 말하거나, 근대화 기획의 ‘공사’구분이나 ‘거대’담론/’일상’의 정치 등으로 구분하는 말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탈근대를 말하면서도 사회적인 것을 위해서 개인적이고 작은 것은 좀 참고 지낼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을 의심한다. 몸으로 트랜스섹슈얼리티/트랜스젠더를 앓고 났다면, 더 이상 언어에서 ‘여성’이나 ‘남성’이란 말을 쉽게 쓸 수가 없으며 탈근대나 유목적 사유와 ‘공사’를 구분하는 식의 언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고백하자면, 어제 그 강사의 강의 내용은 지식자랑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M_ 보태기.. | 접기.. | 트랜스섹슈얼리티/트랜스젠더를 단지 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몸은 그것과 다르다는 말을 들으며 얼마간 충격을 받았는데, 그럼 도대체 강사가 정의하는 몸이란 무엇일까 궁금했다. 또한 몸과 성적인 것의 구분이 가능할까? 강사가 생각하는 트랜스섹슈얼리티/트랜스젠더는 무엇일까. 학벌에 연봉까지 성/적인(sexual/ity) 것으로 여겨지는 한국사회에서 강사가 생각하는 ‘성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_M#]

그럼에도 그 강의가 좋았다면 공동체 생활에서의 윤리, 문학과 관련한 나중의 부분 때문이다. 자연과 대화하는 글쓰기란 말은 공간과 소통하는 몸이란 루인의 앓이에 꽤나 자극적이었다(강사가 말한 자연은 타자화된 자연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지점이 있었는데 이는 좀더 조심스럽게 접근할 부분). 또한 밥상공동체를 통한 소통 방식은 이랑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를 몸앓을 수 있게 했다. 이와 관련해선 나중에 더 쓸 수 있겠지.

이제 그만…

지금의 무언가에서 도망치기 위해 빠져들었던 몰두가 새로운 중압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부담스럽거나 하기 싫거나 미루고 싶어질 때, 다른 일에 빠져들곤 한다. 그것이 재밌기도 하겠지만 그렇기 보다는 마냥 그것에 빠져듦으로서 현재의 일에서 회피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빠져든 다른 일이 새로운 억압이 되고 회피하려한 일이 그리워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새로운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억압이 무거워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고 회피하려한 일이 달콤하게 유혹한다.

짜부라질 것 같은 어떤 상태에서, 알지만 모른 척 하고 있다.

또 다른 불륜 현장

(제목이 참, ‘선정적’이다-_-;;)

일테면 1980년대에 쓴 글들을 지금에 와서 아무런 유효성이 없다곤 몸앓지 않는다. 대략 20년가량의 세월이 흘렀기에 세상은 많이도 변했고 학문도 그 만큼의 변화를 겪었다. 그렇기에 70, 80년대의 텍스트들을 읽는 일이 낡은 일이고 별다른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 일일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때론 요즘 나오는 텍스트들 보다 더 멋지고 빼어난 성찰을 보여주는 텍스트들은 얼마든지 있다. 일테면 루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벨 훅스bell hooks의 1981년에 나온 [Ain’t I A Woman]이나 1984년에 나온 [Feminist Theory]와 같은 책은 지금 나오는 어떤 책들보다 몸 아프게 하는 통찰과 성찰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종종 수업시간에 80년대 출판된 텍스트들을 읽게 하는 것은,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다. 비록 그 텍스트들이 그 당시엔 상당히 중요하고 유효한 성찰을 보여주었다 해도 그것이 현재에도 유효한가엔 회의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논의의 내용과 깊이는 많이도 변했고 그래서 그 시절 나온 글 중엔 더 이상 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고전강독과 같은 경우, 혹은 ‘체계’적인 배움 등의 이유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지만 텍스트들의 수명은 다 다르기 마련이고 어떤 텍스트는, 정말이지 시간낭비란 불만만 나오게 한다.

수업을 듣다 보면 선생님이 배웠던 시절의 지식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않은 상태로 수업을 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 길게는 2, 3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당시의 텍스트와 지식으로 수업 시간에 강의를 하고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곤 하는 경우를 보곤 한다. 수업을 듣는 입장에선 이보다 화가 나는 일이 없다. 앞서 80년대 텍스트에 대해 궁시렁 거린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 수업 시간에 커리로 그 당시의 텍스트를 읽게 했다. 이런 사실 자체엔 별다른 불만이 없다. 1940년도에 나온 글도 수업 시간을 통해 읽었는데 80년대에 논의된 글 정도야(페미니즘/여성학에서 1940년대면 정말 ‘오래’된 시간이다). 문제는 이 텍스트들의 고전 이상으로서의 유효성과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하는 논의의 정도 등에서 발생했다.

오래된 논의라고 낡은 것이 아니며 최신 이론이라고 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행담론을 좇아가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예전에 배운 지식에 안주하여 지금 논의가 어떤 식으로 바뀌고 있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거나 모른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특히 페미니즘 관련 수업 시간의 경우, 담론은 항상 움직이고 있고 그렇기에 현재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핵심은 수업에 들어오는 교수/강사의 태도가 문제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니까 와~ 하고 따라가고 탈식민주의가 유행하니까 와~ 하고 따라가는 것도 문제지만, 끊임없는 새로운 배움 없이 자신이 대학원 시절 배웠을 법한 지식으로 아직도 강단에 서 있다면 그것은 학생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윤리가 아니다. 과거의 배움을 아직까지 울궈먹는 행위는 자신의 지식에 회의하지 않는 태도이며 앎에 민감하지 않은, 변태하지 않는 삶이라고 본다.

불륜이 별게 아니다. 관계에서의 윤리가 아닌 것, 그것이 불륜不倫이다. 새로운 앎으로 나아가지 않고 과거의 자신에 안주하고 있으면서 강단에 선다면 그것이야 말로 학생들에 대한 불륜이 아니고 무엇일까.

*혹시나 해서 말하면 이 글, 특정한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니 오해는 말아줘요. (왠지 이 말이 더 이상하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