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척 하기

그런 경향이 있다. 어떤 집단의 소속이면서도 그 집단의 소속이 아닌 척 하려는.

일전에 한 동아리에 있을 때도 그랬다. 그 동아리가 전부인양 참여했고 열심히 했지만 다른 곳에선 그 동아리가 아닌 척 했다.

오늘도 그랬다. 이랑이 루인에게 거의 전부와도 같지만 마치 이랑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누구도 이런 루인의 행동을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고(아닐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이런 사실 자체가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걸까. 아니, 왜 이렇게 행동하고 싶어 하는 걸까. 왜 가장 아끼는 집단의 소속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언젠가 친구가 한 말이 있다. 지금과는 다른 동아리에 있을 때였고,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환영식을 하던 날이었다. 그 자리에서 친구는 루인에 대해 “최대 인사이더이자 아웃사이더”라고 평했다.

이런 태도와도 관련이 있는 것일까. 스스로 알고 싶어졌다. 왜 이런 식으로 가장 아끼는 집단의 소속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고 싶어 하는지에 대해.

기억의 배반 혹은 새로운 몸

극장에 가길 싫어하냐면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가서 볼 수 있다면 그러길 즐기는 편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본 영화 중 극장에서 본 것 보다는 나스타샤와(!) 본 것이 더 많을 듯 하다.

주말이나 시간이 날 때 너무도 보고 싶은 작품을 영화관의 큰 화면과 괜찮은 음향 시설, 그리고 괜찮은 관객들과 본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지금껏 영화관에서 보며 좋았던 기억 보다는 나빴던 기억이 많은 편이다. 사람이 죽어가는 슬픈 장면인데 옆 자리에선 키득거리며 웃는다거나 주변의 어떤 행동으로 영화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라거나. 혹은 영화관에서 에어컨을 지나치게 춥게 튼다거나 너무 덥게 한다거나, 등등. 이런저런 나빴던 기억이 많은 편이다.

이러한 나빴던 기억이 불법 다운로드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탠다면, 루인의 소유욕이다.

책을 빌려보기 보다는 사서 보는 것, 음악CD를 사면 처음 비닐포장 그대로 보관 하는 행위들은 루인이 즐기는 텍스트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일종의 욕망이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동영상 또한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한땐 DVD를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DVD 모으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격 부담도 크거니와 루인이 원하는 텍스트들이 모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그때부터 불법인걸 알면서도 다운로드 받기 시작한 것 같다. 그래서 늘 상 미안한 몸과 어쩔 수 없어 하는 ‘자기 위로’ 같은 몸이 동시에 노는 것을 느낀다.

어제 오늘에 걸쳐, 90년대 초반에 방영되었던 한 애니메이션을 다운 받았다. 어릴 때부터 TV를 싫어했기에 그다지 친하지 않았지만, 가끔 너무도 보고 싶어 하는 프로가 생기곤 한다(우연처럼 만난다). 이제 모두 받은 애니가 그렇고 애니로 나왔던 <오즈의 마법사>가 그렇다. 물론 이 둘 모두 제대로 못 봤다. 그건 루인이 TV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당시 살던 집에서 루인에게 가했던 ‘탄압'(!) 덕분이었다-_-;;

어제 오늘 받은 동영상의 경우는 특히나 당시의 각별한 사연으로 인해 너무도 보고 싶어 했다. 그랬기에 오랫동안 잊지 못했고 항상 기억 한 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그런 애니를 이제야 모두 ‘소유’했지만 아직 볼 상황은 아니다. 편수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이 애니를 보기까지 한 달 정도는 있어야 할 듯 하다. 중간고사기간에 玄牝에 콕, 박혀 볼 예정이니까.

이렇게 다운받고 CD로 구워서 보관하고 하는 것은, 어쩌면 그 시절에 대한 어떤 기억을 붙안고 싶어서 인지도 모른다. 그때 이루지 못한, 그럴 용기가 없어서 속으로 앓다가 이렇게 아쉬워하고 있는 오늘에 대한 기억을 반영구적이라는 저장매체에 보관하고 필요할 때 다시 꺼내보고 싶어서 인지도 모른다. 알고 싶어 다가서는 순간 변화하는 휘발적인 삶/세상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이런 텍스트들이라는 믿음. 물론 이런 믿음은 언제나 배신하는데, 몸에 남아 있는 장면과 다시 봤을 때의 장면이 너무도 달라 적잖아 당황하고 괜히 다시 봤다고 아쉬워한 기억은 얼마든지 있다.

극장에 가지 않는 것, TV를 사지 않고 나스타샤랑 노는 것은 루인이 최대한 즐겁게 텍스트와 만나기 위한 한 방법이다(그래서 5.1채널이다). 동시에 어떤 텍스트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텍스트도 고정시킬 수는 없다. 루인 자신이 유동하듯 텍스트를 만나는 순간, 그 순간의 시공간적인 유동성 때문에 매번 다른 텍스트를 만난다.

그래서 어제 오늘 새로 만난 텍스트들과 만나길 조금은 두려워하고 있다. 그 당시의 보고 싶어 했다는 갈망, 그 시절의 애틋함 혹은 아픔, 그런 몸들을 그냥 기억의 왜곡 속에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해서. 그럼에도 볼 것이다. 새로운 자신과 만나는 것은 몸속에 묻어 둔 기억을 꺼내 그것을 배반하고 새로운 몸을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로인해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의 몸이 더 풍성해질 수도 있으니까.

냥이

며칠 전, 추석이 끝나고 玄牝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玄牝은 어느 빌라의 가장 윗 층이고 문 앞엔 신발장이 있다.) 계단을 올라오는 길에 아래 층 문 앞에 놓여 있는 박스와 부딪쳤는데, 순식간에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반 층 위로 올라간 무언가는, 고양이였다.

아래층에서 기르는 고양이는 아니었다. 밖을 돌아다니는 고양이가 잠시 피해온 것인 듯 했다. 너무 좋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다. 상당한 경계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유리를 부딪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玄牝으로 돌아왔다가 잠시 밖으로 나가보니 한 곳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잠시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니 다시 경기를 일으킬 듯이 밖으로 나가려고 해서 그냥 돌아왔다. 그날 늦은 밤과 새벽, 고양이 울음을 들으며 가끔 잠에서 깨곤 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데(이랑 매체 작업으로 늦게 돌아왔다) 신발장 뒤로 뭔가가 들어가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잘못 본 것인가 하고 말았다. 헌데 시간이 지나자 고양이 울음이 들려왔다. 살짝 문을 열자 두 마리의 아기 고양이(전 날 본 고양이와 또 다른 한 마리)가 서둘러 신발장 뒤로 들어갔다. 그 날도 늦은 밤, 새벽 고양이 울음을 들으며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러고 보면, 꽤나 오랫동안 새벽마다 고양이 울음으로 잠에서 깨어났던 일이 떠올랐다. 그땐 어느 집, 아기가 우나 보다 했다. 고양이 울음과 아기 울음은 닮아있으니까. 그렇다면 그 아기 고양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서 살았단 걸까?

아무튼, 두 마리의 고양이가 신발장 뒤에 살고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설레었다. 오랫동안 함께 살 생명을 바랬기에. 그럼에도 여태껏 그러지 않고 있는 건 동물(비인간non-human)들에겐 자신들이 함께 살 공간에 대한 선택권이 없기 때문이다. 반려동물, 혹은 사람이 동물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곤 해도 동물들에게 자신의 원하는 환경, 동반자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라는 입장이기에 그냥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만 품고 있다. 그런데 두 마리의 냥이가 루인의 玄牝에 자리 잡고 살고 있는 것이다!

으하하, 두근두근, 설레는 맘으로 어떻게 ‘유혹’할까, 부터 생활비는 어떻게 나눠 쓸까, 까지 별의별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더 이상 냥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주인집에서 발견하고 쫓아냈을 수도 있고 냥이들이 다른 공간을 찾아 나간 것일 수도 있다.

아쉬움이 크다. 함께 살고 싶어서, “우린 운명이야”라는 기대까지 가졌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