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이성애’란 언어

비’이성애’란 언어를 사용할 때,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이성애가 아닌 ‘모든’ 성애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의미를 두고 있을 수도 있고.

처음 비이성애란 말을 사용할 땐,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결국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이성애가 기준이라는 의미는 아닌가 하는 문제. 이성애가 절대적으로 지배적인 사회에서 비이성애란 말은 자칫, 이성애를 여전히 기준점으로 두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비이성애란 언어를 사용하기로 한 것은, 몇 가지 가능성 때문이었다.

일전에 다른 글에서도 적었듯이, 한국사회에서 비가시적인 성sexuality은 ‘동성애’나 다른 성애가 아니라 이성애heterosexuality라고 보고 있다. “언제부터 동성애자가 되셨어요?”란 질문은 있어도 “언제부터 이성애자가 되셨어요?”란 질문은 없듯, 정말 모르고 말하지 않으며 비가시화되고 있는 부분은 비이성애가 아니라 이성애이다. 당연시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뿐, 정말 이성애가 ‘정상/규범’인지, ‘자연스러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동성애 담론이 ‘뜬’ 적은 있어도 이성애 담론이 뜬 적이 없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성애를 알고자 하는 순간 발생할지도 모를 ‘공포’ 때문이 아닐 런지.

암튼 이런 이유로 비이성애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비가시화되어 있고 숨어있는 횡포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랄까.

또 다른 이유로, 이성애가 아닌 성애로 동성애만 말해지는 것이 너무도 불편했기 때문이다. 많은 성적 행위가 있다고 말하면서 동성애만 말하면 다 말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불편했고 종종 폭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루인의 몸에선 이성애나 동성애나 젠더gender 범주 내에 있다는 점에선 그렇게 차이가 없는데(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또한 동성애의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와 함께 이반이론queer theory의 한 축을 이룬다는 트랜스섹슈얼리티/트랜스젠더를 루인은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없다고 보는 편이다. 동성애는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의 문제이고 트랜스섹슈얼리티/트랜스젠더는 정체성identity/sexuality의 문제인데(물론 이렇게 단순화/이분화시키는 것이 문제가 있음은 알고 있다) ‘성적 지향’으로서 LGBT(Les/Gay/Bi/Trans)란 식으로 묶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이성애란 언어를 사용했을 때, 그 의미는 이성애gender/gender rule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아마 이랑 발제문으로 쓴 글에서 적은 듯한데) 루인은 젠더를 이성애주의/젠더환원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해석에 바탕 해서 볼 때, 이성애는 젠더에 기반한 역할/규범들이고 이성애, 이성애주의, 이성연애각본 등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비이성애는 단순히 ‘동성애’나 트랜스 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이성연애각본과는 다른 식으로 관계 맺으려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관계 내에서도 이성애와 비이성애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다(연애관계에 있는 A와 B 중에서, A는 이성연애각본에 충실하려고 하고 B는 기존의 주류 연애관계에서 벗어나 다른 관계를 모색하고 있는 경우).

여기에 주로 비’이성애’란 식으로 작은 따음표(”)를 붙이는데, 사실 이 부분이 가장 문제적이다. 도대체 루인이 말하는 ‘이성애’는 어떤 행위를 말하느냐는 것. 외부호명으로 이성애라는 식의 명명은 폭력일 뿐일 때, 누구를 그리고 어떤 관계를 이성애관계라고 부를 것이냐는 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부분이다. 최근 어떤 몸앓이가 몸에 떠올랐는데 아직은 문제가 있어 몸앓이 중이다. 이런 부정확성 때문에 작은 따음표가 붙은 것이다. (‘여성’, ‘남성’에 붙이는 작은 따음표는 의미가 좀 다르다.)

그렇기에 루인에게 비’이성애’란 말은 이반queer란 말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위에서 말 했듯, 이반이란 말 자체도 다시 읽어야 하지만). 루인처럼 비’이성애’자면서 이반이 있는가 하면 이반이지만 ‘이성애’자일 수도 있고 비’이성애’자이지만 이반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자주 떠올리는 글

루인이 이랑에 쓴 글 중에 ‘자주’ 떠올리는 글은 “‘지나친’ 미안함“이란 글이다. 이 글이 잘 썼다는 말이 아니라 루인의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페미니즘과 같은 집단에서 ‘정치적 소수자’가 권력을 가지고 ‘정치적 소수자’의 언설에 다른 사람들이 침묵하는 상황을 루인은 끔찍하게도 싫어한다. 침묵 자체가 이미 ‘정치적 올바름’이란 판타지/폭력의 실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소수자’의 발언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절대적으로 정확한 이론이나 말을 할 수 있다고 몸앓지 않는다(그것 자체가 환상이다). 다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언어를 말 할 수 있을 뿐이다. ‘장애’인 ‘문제’에 대해 비장애인이 말하는 것이, 아프리칸-아메리칸 ‘문제’에 대해 백인이 말하는 것이, 비이성애자의 고통에 대해 ‘이성애’자가 말하는 것이 무조건 문제가 있다고 몸앓지 않는다. 물론 기존의 특정한 누군가(일테면 미국 중산층 ‘이성애자’ 비’장애’인 백인 ‘남성’)의 말만이 권력을 가진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소수자’의 언어만이 권력을 가지는 것도 문제다. 일테면 ‘게이’문학(‘게이’문학이란 말 자체가 문제적이지만 여기선, 그런 것이 있다고 치고-_-;;)에 대해 ‘이성애’자는 침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자라는 정체성/위치를 통해 독해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좋다고 믿는다. ‘게이’문학에 대한 ‘이성애’자의 해석, ‘레즈비언’의 해석, ‘게이’의 해석, ‘장애’인 비/’이성애’자의 해석 등등 무수하게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각자의 위치에서 말할 때에야 서로의 다른 위치들이 각자 어떤 식으로 읽고 있는지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가해) 상황에 대해, 마냥 죄송함을 표현하기 보다는 어째서 그런 언설을 했는지 말하고 피해 경험자는 왜 그것이 폭력인지 말할 수 있길 바란다. 피해 경험자가 “그건 폭력이야”라고 했을 때, 마냥 죄송하다는 말만 한다면 그건 피해 경험자를 (그리고 피해 상황을) 더 외롭게 만드는 일이다.

자기 공포/혐오의 이면

요즘 들어 자주 하는 말이 자기공포/혐오self-phobia이다. 물론 어디 가서 하는 말은 아니고 이곳과 루인이 루인에게 말을 걸 때 하는 말이지만.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할 때,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느끼는 격렬한 금기의 감정, 두려움, 공포 등이 바로 사회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요즘 들어 몸앓고 있다. 뭐, 특별할 것 없지만 그 만큼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랄까.

이런 자기공포/혐오의 감정이 바로 이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rule이며 현재 사회와 별다른 갈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알지 못할, 하지만 대다수가 내면화 하고 있는 작동 이데올로기다. 그래서 자기공포/혐오는 이 사회를 읽는 중요한 텍스트/거울이라고 몸앓는다.

이런 텍스트/거울을 읽어내는 것, 그 과정들이 삶과 앎이 교직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순간들이 아프지만 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