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은 언어의 증거이다

몸이 아팠다. 이 말은 병이 나서 아팠다는 것이 아니라 “언어 없음”으로 인한 몸앓이였다. 타인의 행동에 부당함 혹은 폭력성을 느꼈지만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었다. 비단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 뿐이랴. 루인,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잘못했는데, 분명 어떤 행동에 스스로도 깨림칙함을 느꼈는데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지냈고 그런 불편함들이 몸에 쌓여 가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어를 찾았는가.
혹은 언어를 배웠는가.

그 말을 기억한다. “자기 목소리를 가져라.” 혹은 “자기 언어를 가져라.” 이 말에 매혹되었다. 언어와 소통에 천착하는 루인이기에 이 말은 그 자체로 매혹이었다. 하지만 충돌하는 감정들. 이 감정의 출처는 어디일까.

소위 진보적이라고 자처하거나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집단에서 “딸들아 깨어나라”와 같은 노래를 부른다고 들었다. “딸”은 깨어나야 할, 계몽되어야 할 대상인가. 정희진 선생님의 말처럼 “성차별에 저항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로 찍히고, 가만있으면, “여성들이 의식이 없어서 문제”“고 여긴다.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가져라”, “언어를 가져라”는 말은 목소리나 언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이는 “딸들아 깨어나라”처럼 계몽의 대상이라는 타자화/대상화와 얼마나 다른가.

목소리가 없었다고 언어가 없었다고 몸앓지 않게 되었다, 어제 쓴 글에서도 적었듯. 목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있지만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들, 언어들이 억압되고 억눌려진 것이다.

몸이 아팠던 건, 그리고 지금도 아픈 건, 언어가 없어서 생기는 감정들의 충돌들 때문이 아니라 억압하고 있는 자기 안의 언어/감정들이 깨어나려고, 발화하려고 몸을 타고 돌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들을 귀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혹은 그 언어를 발화하면 ‘처단’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언어가 없는 것처럼 가장假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장된 행동이 자신을 더 아프게 하는 ‘역설’적인 상황.

“언어를 가져라”, “목소리를 가져라”가 아니다. (이런 언설은 또한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가정한다.) 자신의 몸이 곧 언어이고 목소리며 감정이다. 페미니즘은 언어를 주거나 목소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억압된 언어/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라고 몸앓는다. 그래서 아픈 몸 혹은 ‘무력감’은 허약함 혹은 약자/타자의 ‘약점’/본질이 아니라 발화하려는 몸의 팽팽한 긴장감이다. 몸이 아픈 건 현 상황에 부당함, 불편함을 느끼는 몸의 또 다른 발화 방식인 것이다.

자기 몸에 가장 편한 언어가 있다고 몸앓는다. 그 언어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해서, 때론 모순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모순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모순으로 여기며 한 가지 방식의 목소리만 강제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다양한 몸언어를 발화할 수 있기를…

Audre Lorde의 시 [Latany For Survival]를 기억한다.

and when we speak we are afraid
our words will not be heard
nor welcomed
but when we are silent
we are still afraid

So it is better to speak
remembering
we were never meant to survive.

어차피 잃을 것도 없다면, 아픈 몸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랑에도 올린 글이랍니다..

타인에 대해/타인과 함께 말하기

bell hooks의 [Talking Back] “7. feminist scholarship: ethical issue”에 붙여

흑인만이 흑인 문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거나 한국인만이 한국 문화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식의 언설은 본질주의와 cool함이다.

이 말은 백인 혹은 비흑인은 본질적으로 흑인 문화를 이해할 수 없거나 말할 수 없다는 식의 결정론이며 그로인해 백인 혹은 비흑인에겐 책임이 없다는 식의 cool함을 의미한다. 결국 흑인의 노예제 경험은 흑인에게 책임이 있으며, 현재의 성역할sex role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가장 적합하다는 구조기능주의에 빠지기 쉽다. 주지하다시피 cool함은 무책임함이며 ‘나’는 세상과는 고립된, 탈육화된, 초월적인(disembodiment, disinteresting) 존재라는 착각의 산물이다. 누구나 타인에 대해 말할 수 있으며 말해야 한다고 몸앓는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말 하는가 이다.

호명으로서의/젠더로서의 ‘남성’은 모든 것(생리휴가라던가, 생리대면세 등)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믿지만/믿어 의심치 않지만 호명으로서의/젠더로서의 ‘여성’이 군대의 문제점에 대해 말하면 군대도 안 갔다 왔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말 하냐며 (사이버) 성폭력을 휘두른다. 이는 주체subject로 착각하고 사는 이들의 권력적 불안이며 일상화된 폭력이다. 그리하여 이런 식의 말하기는 타인에 대해 말하기라기보다는 순전히 자신의 불안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이다.

타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기존의 앎을 유지한 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자신과 만나는 것이다. 타인과 만나 대화를 하고서도 기존의 편견(폭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그건 대화가 아니라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식의 횡포일 뿐이다.

타인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더 많은 담론이 있어야 하고 그런 담론들로 소통해야 한다고 몸앓는 이유는, 말하고 듣기 자체가 하나의 저항행위이면서 기존의 유일보편의 “말씀”을 상대화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백인들만이 전문가로서 비백인들의 경험에 대해 말하거나(데이터화 하거나), 이성애주의 사회에서 비이성애에 대해 말하는 이성애자의 언설만이 ‘권위’를 부여 받거나,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남성’만이 다른 성들에 대해 말한다면 이는 기존의 권력체계를 강화, 유지 시키는 방식일 뿐이다. 그렇다고 반대의 상황만이 ‘정당’하다고도 몸앓지 않는다. ‘남성’이 다른 성들에 대해 말하듯 다른 성들도 자신에 대해 그리고 또 다른 성들(‘남성’을 포함하여) 에 대해 말하고 그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 대해 다양한 담론들이 존재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지고 타인에 대해, 타인과 함께 말할 수 있게 된다고 몸앓는다.

[#M_ #말하고 듣기 | 닫기 |

#말하고 듣기: 루인의 집의 경우, 그리고 한국식 혈연으로 이루어진 친족체계에서의 친척들의 경우, 모임에서 주요 화자는 ‘여성’들이었다. 물론 ‘남성’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드물었고 꽤나 재미없는 방식이었다. 반면 ‘여성’들은 풍성한 어휘와 내용으로 모임의 주요 화자들이고 모임의 대화를 이끌어가는 행위자들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여성’/’남성’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남성’은 풍성한 어휘와 내용으로 즐거운 말하기를 했지만 이러한 말하기를 받아 들이는 방식은 상당히 젠더적이었다.) 잘못된 앎이 아니라면 이런 방식은 단지 루인의 이성애가족체계/친족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이성애가족체계/친족체계 전반에 걸친 현상일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말이 없고 묵묵히 지켜보시는 분”이란 이미지, “어머니는 자식과 주로 이야기를 나누시는 분”이란 이미지들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라 몸앓는다. 그렇기에 말하기, 그 자체가 저항 행위가 아니라 말하고 듣기가 저항이라고 몸앓는다. 말하기가 그 자체로 저항이라는 언설은 지금껏 타자 혹은 약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타자 혹은 약자가 말을 할 수 없었다기보다는 타자 혹은 약자로 호명된 이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_M#]

<반지의 제왕> 단상

어제까지 해서 사흘에 걸쳐 [반지의 제왕]을 봤다. 이제서야 봤느냐고 하면 그동안 그다지 끌리지 않았기 때문. 보는 내내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1. 프로도와 샘의 관계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불편했던 점이라면 영웅주의, 평화를 위해선 전쟁이 필수라는 식의 근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죽어가는 무수한 존재들과 틀에 박힌 성역할은 상상력의 한계라고 밖에 볼수 없다. 그랬기에 왜 프로도가 영웅이 되어야 하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생도 샘이 더 많이 했는데.
샘은 프로도와 시작부터 같이 한다. 반지원정대를 떠나기 전에도 그 후에도. 물론 프로도가 반지를 가지고 있고 그 갈등을 이겨내는 고생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몸과 정신의 이분법이라는 근대적인 사유의 전형이라 몸앓는다. 프로도보다는 샘이 더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는 샘이 프로도의 고통까지도 같이 고민하기 때문이다. 샘의 고통을 보고 있으면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고통을 동시에 사유하는, 나와 타인을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간달프에 의해 설정된 권력적인 위계관계로 인해 그런 것이긴 하지만 (친절은 약자의 윤리라고 했던가)분명 프로도의 모습과는 다른 부분이다.
하지만 항상 프로도만 걱정하고 결론에서도 프로도에게 공을 돌리지 샘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이러한 영웅주의는 타인의 고통을 비가시화 시키고 단 한 명의 영웅만 괜찮으면 다 괜찮다는 식의 폭력의 반복이다.

-이 영화를 보며 꽤나 짜릿했던 것은 둘 사이에 보여주는 미묘함때문. 크크. 첫 편인 [반지원정대]에서부터 보여주는데, 둘의 관계는 말 못하는 퀴어queer관계(극히 좁혀서 보면 ‘동성’애 관계)인 것이다.
성별화된 현대 사회의 ‘정상화’된 이성애 관계(gender role)로 인해 비이성애 관계는 늘 비가시화되고 억압된다. 샘과 프로도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이런 억압이 너무도 자명해진다. 혼자 떠나려는 프로도를 샘이 물에 빠지면서까지 따라가려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둘의 모습 등 둘이 나오는 장면들의 상당 부분이 강압적 이성애 사회만 아니었어도 충분히 연인로 ‘발전’할 가능성들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면 왜 호명으로서의 ‘남성’들이 스포츠나 전쟁영화, 갱영화에 열광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스포츠나 싸움은 ‘공식’적으로 ‘남성’간의 신체접촉이 ‘허용’되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다. 전쟁영화 같은 경우, 전우애 혹은 우정이라는 핑계로, 억압되어 있는 ‘동성’에 대한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짜릿하게. 그리하여 자기 안에 금기시된 ‘동성’애적 욕망을 자극한다.
샘과 프로도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애증?)을 드러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욕망을 느꼈다. 이 영화의 의외의 재미라면 이 부분이다. [Lucia y el sexo]에 만큼 짜릿하다. 냐햐.

2. 스미골 혹은 골룸

등장 때 부터 매력적인 스미골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로 보였다. 다른 인물들의 경우, 사실, 거의 전형적인 인물들이었다. 프로도는 영웅 드라마의 전형이고 샘 역시 그런 영웅과 함께 하는 전형적인 인물이고. 다른 인물들 역시 별로 다르지 않아 보였다. (이런 읽기가 다소 거칠게 읽은 것이라 놓치는 부분이 있다는 점은 인정.) 하지만 분열되고 다중적인 자아의 갈등을 보여주는 스미골 혹은 골룸의 모습은, 가장 와 닿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갈등하고 그 갈등으로 고통 받고 그럼에도 계속해서 집착하는 모습, 그 집착이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데도 그런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은 가장 ‘포스트모던’한 인간상이지 않을까?
그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처럼 그려지는 다른 ‘영웅’들에 비하면 백배는 더 매력적이다.

3. 레골라스


이 사람, 멋지다. 꺄악>_<
심장이 두근두근. 꺄릇
안타까운 일이라면 이 사람이 출현한 영화들이 루인의 취향과는 한참 다르다는 점. 애석함을 감출 수가 없다.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