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불륜 현장

(제목이 참, ‘선정적’이다-_-;;)

일테면 1980년대에 쓴 글들을 지금에 와서 아무런 유효성이 없다곤 몸앓지 않는다. 대략 20년가량의 세월이 흘렀기에 세상은 많이도 변했고 학문도 그 만큼의 변화를 겪었다. 그렇기에 70, 80년대의 텍스트들을 읽는 일이 낡은 일이고 별다른 의미를 제공하지 않는 일일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때론 요즘 나오는 텍스트들 보다 더 멋지고 빼어난 성찰을 보여주는 텍스트들은 얼마든지 있다. 일테면 루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벨 훅스bell hooks의 1981년에 나온 [Ain’t I A Woman]이나 1984년에 나온 [Feminist Theory]와 같은 책은 지금 나오는 어떤 책들보다 몸 아프게 하는 통찰과 성찰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종종 수업시간에 80년대 출판된 텍스트들을 읽게 하는 것은,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다. 비록 그 텍스트들이 그 당시엔 상당히 중요하고 유효한 성찰을 보여주었다 해도 그것이 현재에도 유효한가엔 회의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0여 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논의의 내용과 깊이는 많이도 변했고 그래서 그 시절 나온 글 중엔 더 이상 그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고전강독과 같은 경우, 혹은 ‘체계’적인 배움 등의 이유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지만 텍스트들의 수명은 다 다르기 마련이고 어떤 텍스트는, 정말이지 시간낭비란 불만만 나오게 한다.

수업을 듣다 보면 선생님이 배웠던 시절의 지식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않은 상태로 수업을 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 길게는 2, 3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당시의 텍스트와 지식으로 수업 시간에 강의를 하고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곤 하는 경우를 보곤 한다. 수업을 듣는 입장에선 이보다 화가 나는 일이 없다. 앞서 80년대 텍스트에 대해 궁시렁 거린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 수업 시간에 커리로 그 당시의 텍스트를 읽게 했다. 이런 사실 자체엔 별다른 불만이 없다. 1940년도에 나온 글도 수업 시간을 통해 읽었는데 80년대에 논의된 글 정도야(페미니즘/여성학에서 1940년대면 정말 ‘오래’된 시간이다). 문제는 이 텍스트들의 고전 이상으로서의 유효성과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하는 논의의 정도 등에서 발생했다.

오래된 논의라고 낡은 것이 아니며 최신 이론이라고 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행담론을 좇아가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예전에 배운 지식에 안주하여 지금 논의가 어떤 식으로 바뀌고 있는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거나 모른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특히 페미니즘 관련 수업 시간의 경우, 담론은 항상 움직이고 있고 그렇기에 현재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핵심은 수업에 들어오는 교수/강사의 태도가 문제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니까 와~ 하고 따라가고 탈식민주의가 유행하니까 와~ 하고 따라가는 것도 문제지만, 끊임없는 새로운 배움 없이 자신이 대학원 시절 배웠을 법한 지식으로 아직도 강단에 서 있다면 그것은 학생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윤리가 아니다. 과거의 배움을 아직까지 울궈먹는 행위는 자신의 지식에 회의하지 않는 태도이며 앎에 민감하지 않은, 변태하지 않는 삶이라고 본다.

불륜이 별게 아니다. 관계에서의 윤리가 아닌 것, 그것이 불륜不倫이다. 새로운 앎으로 나아가지 않고 과거의 자신에 안주하고 있으면서 강단에 선다면 그것이야 말로 학생들에 대한 불륜이 아니고 무엇일까.

*혹시나 해서 말하면 이 글, 특정한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니 오해는 말아줘요. (왠지 이 말이 더 이상하다-_-;;)

‘대안’이란 있을까

그런 말을 듣곤 한다. “그래서 대안이 뭔데?” 특히나 페미니즘에서 현실의 폭력들에 대한 지적을 할 때면, 늘 듣는 말이, “그래서 대안이 뭐냐?”, “페미니즘은 대안이 없다”와 같은 말들이다.

그래서 대안이 뭘까?

하지만 언제나 루인의 습관 상 이렇게 묻지 않는다. “루인이 대안을 말하면 그대로 할 거야?” 혹은 “당신이 말하는 그 ‘대안’이란 게 뭔데?”라고 묻지.

어떤 의미에서 어떤 이론/학문이든 대안이란 ‘없다’고 몸앓는다. 대안이라니, 그건 도대체 누구의 관점이란 말이냐.

일테면 세계적으로 명망 있는 페미니스트(혹은 다른 학문의 학자)가 있다고 치고 그 사람이 지금의 사회가 변하기 위해선 이렇게 해야 돼, 라고 대안을 제시했다고 치자. 그럼 그대로 따라 할 거야? 그 사람이 말한 맥락이 있고 루인이 위치하고 있는 맥락이 있으며 이런 맥락들이 서로 다른데 어떻게 그 사람이 말한 ‘대안’을 그대로 따라할 수 있겠어.

일테면 가족제도는 모순투성이니 해체되어야 해, 라고 말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가족은 (제도권 안에서의) 가족구성권이 있는 ‘이성애’자들의 가족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반queer/비’이성애’자들에게 가족구성권은 쟁취해야 할 권리이기에 해체할 건더기 자체가 ‘없다’. 이렇게 사람마다 서 있는 맥락이 다르고 위치(positioning)가 다른데 어떻게 ‘대안’이 가능할까. 그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말하는 고민들/몸앓이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란 질문은 어떤 의미에서 식민화된 사유라고 본다. 그 지점은 항상 자신의 위치에서 직접 고민해야할 부분이지 않을까. 자신의 맥락에서 언어들을 다시 읽어내고 자신의 ‘대안’을 생산하는 것, 그리고 이런 다양한 대안들이 경합하고 소통하는 것. 루인이 만난 페미니즘의 사유는 이러한 것이었다. 누군가가 말해주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진단이 있으면 그러한 지식을 삶과의 몸앓이를 통해 앎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

그래서 “대안이 뭐야?”라고 묻는 사람의 대안과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대안은 그 자체로 경합하는 개념이라고 본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체계에선 모든 것엔 정답이 있고 그런 정답을 찾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면 페미니즘에선 그런 질문의 전제가 무엇이며 그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구성되었는지를 다시 묻고 질문 자체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과정 자체가 이미 ‘대안'(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비’이성애’란 언어

비’이성애’란 언어를 사용할 때,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이성애가 아닌 ‘모든’ 성애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의미를 두고 있을 수도 있고.

처음 비이성애란 말을 사용할 땐,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결국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이성애가 기준이라는 의미는 아닌가 하는 문제. 이성애가 절대적으로 지배적인 사회에서 비이성애란 말은 자칫, 이성애를 여전히 기준점으로 두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비이성애란 언어를 사용하기로 한 것은, 몇 가지 가능성 때문이었다.

일전에 다른 글에서도 적었듯이, 한국사회에서 비가시적인 성sexuality은 ‘동성애’나 다른 성애가 아니라 이성애heterosexuality라고 보고 있다. “언제부터 동성애자가 되셨어요?”란 질문은 있어도 “언제부터 이성애자가 되셨어요?”란 질문은 없듯, 정말 모르고 말하지 않으며 비가시화되고 있는 부분은 비이성애가 아니라 이성애이다. 당연시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뿐, 정말 이성애가 ‘정상/규범’인지, ‘자연스러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동성애 담론이 ‘뜬’ 적은 있어도 이성애 담론이 뜬 적이 없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성애를 알고자 하는 순간 발생할지도 모를 ‘공포’ 때문이 아닐 런지.

암튼 이런 이유로 비이성애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비가시화되어 있고 숨어있는 횡포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랄까.

또 다른 이유로, 이성애가 아닌 성애로 동성애만 말해지는 것이 너무도 불편했기 때문이다. 많은 성적 행위가 있다고 말하면서 동성애만 말하면 다 말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불편했고 종종 폭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루인의 몸에선 이성애나 동성애나 젠더gender 범주 내에 있다는 점에선 그렇게 차이가 없는데(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또한 동성애의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와 함께 이반이론queer theory의 한 축을 이룬다는 트랜스섹슈얼리티/트랜스젠더를 루인은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없다고 보는 편이다. 동성애는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의 문제이고 트랜스섹슈얼리티/트랜스젠더는 정체성identity/sexuality의 문제인데(물론 이렇게 단순화/이분화시키는 것이 문제가 있음은 알고 있다) ‘성적 지향’으로서 LGBT(Les/Gay/Bi/Trans)란 식으로 묶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이성애란 언어를 사용했을 때, 그 의미는 이성애gender/gender rule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아마 이랑 발제문으로 쓴 글에서 적은 듯한데) 루인은 젠더를 이성애주의/젠더환원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해석에 바탕 해서 볼 때, 이성애는 젠더에 기반한 역할/규범들이고 이성애, 이성애주의, 이성연애각본 등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비이성애는 단순히 ‘동성애’나 트랜스 등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이성연애각본과는 다른 식으로 관계 맺으려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관계 내에서도 이성애와 비이성애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다(연애관계에 있는 A와 B 중에서, A는 이성연애각본에 충실하려고 하고 B는 기존의 주류 연애관계에서 벗어나 다른 관계를 모색하고 있는 경우).

여기에 주로 비’이성애’란 식으로 작은 따음표(”)를 붙이는데, 사실 이 부분이 가장 문제적이다. 도대체 루인이 말하는 ‘이성애’는 어떤 행위를 말하느냐는 것. 외부호명으로 이성애라는 식의 명명은 폭력일 뿐일 때, 누구를 그리고 어떤 관계를 이성애관계라고 부를 것이냐는 문제는 여전히 어려운 부분이다. 최근 어떤 몸앓이가 몸에 떠올랐는데 아직은 문제가 있어 몸앓이 중이다. 이런 부정확성 때문에 작은 따음표가 붙은 것이다. (‘여성’, ‘남성’에 붙이는 작은 따음표는 의미가 좀 다르다.)

그렇기에 루인에게 비’이성애’란 말은 이반queer란 말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위에서 말 했듯, 이반이란 말 자체도 다시 읽어야 하지만). 루인처럼 비’이성애’자면서 이반이 있는가 하면 이반이지만 ‘이성애’자일 수도 있고 비’이성애’자이지만 이반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