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글이 주는 불안

특히 이곳에 글을 쓸 때마다, 글의 내용과 형식(이런 식의 구분이 가능하다면)이 모순을 일으키며 충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 시달린다. 글을 통해 비판하는 바로 그러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분명 그런 모순 속에 있을 것이다.

이런 불안들이 글쓰기를 힘들게 하지만 그렇다고 글쓰기를 중단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루인에게 1990년대는 소설 그리고/혹은 시를 쓰던 시절이었다. 재능은 없었지만 즐거웠고 미친 듯이 좋아했다. 하지만 서서히 힘들었고 지쳐갔고 어느 순간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그때가 99년. 결국 모든 걸 불태우고 끝내버렸다.

왜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꺾어진 골목이었음을 몰랐을까.

이후, 다시는,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 없게 하는 자기 저주를 퍼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글을 쓰고 싶었지만 두 번 다시는 글을 쓰지 못했고 그렇게 잊혀진 기억이 되었다.

힘들어 질수록 더 많은 글을 생산하고 있다. 불안하고 글쓰기가 힘들어질수록 더 열심히 글을 쓰겠다는 다짐. 관계가 불안할수록 더 많은 대화를 통해 소통의 새로운 장으로 들어가듯 글쓰기의 불안이 심해질수록 더 많은 글을 씀으로서 새로운 길로 들어가는 것. 그것은 막다른 골목처럼 보이는 곳이 사실은 꺾어진 골목임을 깨달으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여하튼 간에 계속해서 이곳에 쓰는 글들이 불안하다.

<신돈>: 퀴어, 페미니즘/페미니스트

결국 어제 나스타샤와 만난 [신돈]을 10회까지 봤고 오늘 아침 새로 만난 11회도 봤다-_-;; (“신도니언”이라는 말도 있더라고요..크크크) 그렇다고 [신돈]에 대한 리뷰를 쓸 건 아니고, [신돈]을 읽으며 루인이 읽고 싶은 몇 가지 코드가 있어서. 우훗.

원현이 신돈(편조)을 향한 마음과 안도치가 공민왕을 향한 마음은 ‘게이’ 관계로 읽힌다. 후후후. 물론 이런 식의 독해가 얼마간 젠더(‘이성애’)적인 발상에 기반하고 있지만, 특히 도치가 공민왕을 향해 바라보는 눈빛은 절절한 애정을 나타낸다([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와 샘처럼). 한채윤씨가 지적했듯 이반queer 관계가 낯설지 않은 한국의 동성사회(homosocial)에서 이런 코드를 찾기는 어렵지 않지만 [대장금](보지는 않았다) 이후 또 한 번 이반코드가 가득한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싶다.

루인이 이 드라마를 보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던, 노국대장공주는 애증이 교차하는 인물. 한 편으론 ‘재앙’이고 한 편으론 페미니스트라고 보고 있다(노국대장공주를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한다면 욕하려나? 흐흐)

[신돈]을 보며 혼란스러운 부분은 어떤 부분은 근대 이후에 나타난 연애 관계나 조선 중기 이후에나 나타나기 시작한 이데올로기들이 쉽게 등장한다는 점. 일테면 ‘연애’ 장면이나 이제현의 딸 혜비의 정조 관념은 얼마간 당혹스러운 것이 사실. 루인이 알고 있는 짧은 지식(!)으론 이런 정조 관념이 고려 후기엔 별로 심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 아닐 수도 있다는;;; 암튼 하고 싶은 말은 노국대장공주의 캐릭터 특징은 (본 적은 없지만) [다모]의 채옥을 연상케 하는데, 노국대장공주는 현명하고 똑똑하며 내조도 잘하고 무술까지 잘하는 슈퍼 울트라 메가톤급이며, 이런 ‘여성’상은 현재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이상적(이데올로기적) ‘여성’상에 부합하는 모습이다. 현모양처는 기본이고 돈도 잘 벌고 똑똑하고 등등. 그렇기에 이런 노국대장공주의 재현(representation, projection)은 ‘재앙’으로 다가온다. “새로운”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그래서 뭔가 ‘다른’) ‘여성’상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바로 그 ‘여성’상이다.

그럼에도 노국대장공주가 좋은 이유는 어제도 적었듯이 변태하는 삶 때문이다. 비단 변태하는 삶 때문만은 아니다. 흔히들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그리지만 사실 신사임당은 현모양처가 ‘아니다.’ 죽으며 이원수(남편)에게 남긴 유언이 “재혼하면 귀신으로 나타날 것이다”였다. 당시의 그리고 지금의 관점에서 봐도 이런 유언이 현모양처의 그것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현모양처란 이미지는 젠더사회/가부장제에서 필요한 모습으로 재현한 것일 뿐이다. 노국대장공주의 삶이 그렇다. 원나라의 수도에서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나 고려 땅을 달라고 하는 모습이나 실상 노국대장공주의 실제 욕망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인 듯 하다. 권력을 요구하는 모습. 하지만 당시의 유교 관념에서 왕이 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왕비가 되는 것이다. ([신돈]에 등장하는, 권력을 요구하는 ‘여성’들이 실제 권력을 성취하는 방법이 섭정이나 황후가 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여성’들을 ‘악녀’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이미 젠더화된 폭력/성폭력이다.) 즉, 나이팅게일이 전쟁에 참여하고 싶으나 그런 욕망이 좌절되자 간호장교가 되었듯이(“백의의 천사”란 말은 성별제도에서 만들어낸 재현/왜곡이다) 노국대장공주 역시 자신의 ‘권력지향’에의 욕망을 당시의 사회제도의 틀 내에서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공민왕을 선택했다. 이런 노국대장공주의 행동은 몸의 언어를 듣고 몸/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협상력이다. 바로 이런 모습(변태하는 삶과 협상력)이 루인으로 하여금 노국대장공주를 페미니스트로 읽고 싶게끔 한다. (물론 페미니스트/페미니즘을 어떻게 정의 하느냐에 따라 루인식의 독해가 얼토당토 안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나저나 무려 60회라던데, 과연 끝까지 다 볼까나. 훗, 그 여부는 MBC에 달려 있군-_-;; (그렇다면 처음으로 보는 드라마가 되려나? 지금껏 TV라곤 안 보고 살았으니까..)

#어쩌면 기황후를 위한 변명이란 글을 쓸지도 모르겠다.

글쓰기2 – 코끼리, 벼룩 그리고 부재하는 한계

언젠가 어디에서 읽은 글: 써커스단에서 어린 코끼리를 “사육”할 땐 튼튼한 쇠사슬로 묶어 둔다고 한다. 하지만 힘이 엄청나다고 하는 어른 코끼리에겐 오히려 쉽게 끊을 수 있는 가죽끈으로 묶어 둔다고 한다. 쇠사슬에 묶인 어린 코끼리는 도망치려해도 도망칠 수 없고 결국엔 자신을 묶고 있는 줄(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도 포기한다고 한다. 이런 포기가 결국 쉽게 끊을 수 있는 가죽끈으로 묶어 두어도 끊고 도망치지 않게(못하게) 한다.

벼룩에 관한 유명한 얘기: 흔히 벼룩은 몇 미터씩(과장인가;;) 뛸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벼룩을 30Cm 높이의 실린더에 가두고 뚜껑을 닫으면 벼룩은 첨엔 계속 뚜껑에 부딪히며 더 높이 뛰려고 하지만 결국엔 30Cm 만큼만 뛴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훈련’한 벼룩을 60Cm 실린더에 옮겨도 벼룩은 여전히 30Cm 만큼만 뛸 뿐 그 이상 뛰지 않는다고 한다.

소논문(레포트가 요약보고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앞으로는 논문이라고 쓸까 한다, 이제껏 요약보고서를 써 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을 쓸 때 마다 항상 루인의 한계점을 만나길 기대하는 편이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현재의 루인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기에 소논문 숙제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런 소논문 쓰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단지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만나서가 아니라 이런 한계를 만남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한계가 더 이상 한계가 아니게 되며 새로운 한계점을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이렇게 자신의 새로운 한계점과 만나는 과정이기에 글을 쓴 이후,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하다.

코끼리의 가죽끈 얘기나 벼룩 이야기를 쓴 건, 바로 이 한계라는 지점 때문이다. 한국의 제도화되고 정형화된 교육 틀과 루인을 ‘인정’하지 않는 이성애혈연가족제도에서 자랐기에 루인의 많은 부분들이 깎여 나갔거나 불가능한 기대로 여기게끔 배웠다. 하지만 이런 불가능성은 어떤 의미에선 두려움일 지도 모른다는 몸앓이를 종종 한다. 더 잘 할 수 있음에도, 다른 세상으로 횡단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고 서성이고 망설이는 이유는 “넌 할 수 없어” 혹은 “너 따위가 어떻게 그런 걸 해” 라는 식의 말들을 통해 생겨난 보이지 않은 벽이 주는 두려움은 아닐까 하는 몸앓이.

루인에게 한계점이 없음을 깨닫게 해 준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물론 여기서의 글쓰기는 소설이나 시가 아니라 소논문에 한정되겠지만(소설이나 시는 루인의 한계, 높은 벽을 선명하게 만난 계기이다). 그렇기에 루인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는 루인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두려움의 벽들을 넘어서려는 행위이다.

비단 루인 뿐이랴. 글 쓰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