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시즌1, 이후 + 콘클라베

금요일에는 내란우두머리의 파면 선고를 수업 시간이 같이 봤다. 당연히 같이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수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 없으며, 모든 일에는 내적 근거가 필요해서 이상한 근거를 만들었다. 어차피 무슨 이유가 되었든 같이 봤겠지. 한편으로는 8:0 파면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얼마간의 망설임도 있었지만, 만약 기각된다면 곧장 안국으로 달려가 혁명을 일으켜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헌재의 논리를 아는 것도 필요했다.

헌법재판소의 변론이 끝나고 한달 넘게 내란수괴가 파면되기를 기다렸지만 엄청 기쁘지는 않았다. 파면 요지는 감동적이고, 판결문에서 구경한 적 없는 표현이 많이 나와 놀라웠다. 물론 톨스토이의 천사 이야기를 인용한 판결문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파면선고를 들으며 오히려 차갑게 식는 기분도 있었는데 이제 시작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계기이지만 아직 내란 공범, 동조범은 제대로 수사을 받지 않고 있다. 내란수괴를 탈옥시킨 지00 판사는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란에 동조했거나 내란범에 협조한 검찰은 여전히 기소권을 독점하고 있으며 수사를 방기하고 있다. 일부 언론은 여전히 내란에 동조하며 반-내란 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해 협잡질을 하고 있다. 내란에 공모했거나 동조한 국민의힘 계열 정치인들은 하나 같이 뻔뻔하게 민주당 비난만 하고 있다. 이들 모두에게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않는다면 다음에 다시 ‘내란을 일으켜도 유야무야 넘어가는구나’라는 신호가 될 것이다. 탄핵과 파면을 기다린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제야 시작할 수 있는 일이라 기뻐하는 일은 조금 유예해야지 싶었다.

파면 선고를 듣고 수업을 하고 나서(기쁘지 않다고 했지만, 수업에 집중이 되지는 않았…), 유명한데 뒤늦게 알게 된 영화 [콘클라베]를 봤다. 오… 그냥 새로운 교황을 결정하는 과정인데 재미있다는 설명만 듣고 극장을 찾은 것인데, 이렇게 소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상의 소개는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되고 그러면 재미가 반감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겠지. 특히나 초반에 내가 영화에 몰입하도록 만든 부분은 확신에 대한 의심이었다. 확신은 다양성을 포용할 수 없게 하고 확신은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식의 대사는, 비록 익숙한 말이라고 해도, 예상하지 않은 순간에 마주하는 즐거움이었다. 또한 비밀 추기경의 등장과 모든 수녀의 노동에 대한 감사 인사 역시 인상적이었다.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를 축적하는 이 영화는 바로 그 주제 의식을 구현하고 있고, 그래서 마지막에 기립 박수를 칠 뻔 했다. 영화제였으면 기립박수를 쳤을지도?

극장을 나서면서 파면이 된 날 이 영화를 본 건 참 잘 한 일이라는 고민이 들었다. 확신하지 않는 것, 하나의 적을 상정하지 않는 것, 특정 집단만을 없앤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고 2020년대 중반에 계엄과 내란, 그리고 법원에 대한 폭동/내란이 가능한 사회적, 정치적 맥락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탐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하여 의심하는 힘을 어떤 식으로 실천할 것인가를 계속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고민이 들어, 계엄선언을 한 그날부터 나온 방송 중 정리를 잘 한 방송으로 유튜브에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당일 생방송을 한 곳부터, 이후 주 단위로 정리를 한 방송(내가 애정하는 그 방송)을 모두 묶으니 몇 십 편이 되는데 그걸 다시 들으며 상황을 복기하고 있다. 물론 내란의 123일만 복기한다고 해서 시대적 맥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하루 새롭게 터지는 사건에 휘말리다보면 놓치고 성급해지기 쉬워서 몇 번이고 복기가 필요하겠다는 고민이 들었다. 느려도 괜찮으니 복기를 계속하면서 하나의 적을 만드는 확신을 갖기보다 의심과 의심을 쌓아가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 하나 정도는 좀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암튼, 콘클라베 안 본 사람 없기를…

작가 한 줄 성명 중

며칠 전 나온 작가 414명의 개별 성명서를 살피다가 가장 좋았던 구절은 이소연 시인의 것이었다.

차별과 혐오를 문제삼으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고민을 이렇게 아름답게, 날카롭게, 속시원하게 말할 수 있다니… 그래서 시집을 주문했다. 이제까지의 작품이 궁금했다.

잡담: 복숭아씨를 깨물면, 안전하게 상처받기

리 라이 작가의 그래픽노블 [복숭아씨를 깨물면](안민재, 프리케의숲)을 읽었다. 한 줄 평이라면, 참 좋다. 또 하나의 좋은 퀴어 그래픽노블이 번역되었다.

책 소개는 퀴어커플이라고 나와 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소개는 많은 것을 누락한 소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누락은 독자가 책을 읽으며 가질 감정의 흐름을 위해 의도적으로 덜 언급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책 소개로 미리 아는 것보다는 등장인물의 말 실수, 혐오발화 등을 통해 드러나는 순간을 미리 책소개로 말한다면 독자의 감각이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책은 퀴어 파트너와 각자의 가족과의 관계를 그리는데 그것은 마냥 아름답지는 않다. 레이는 언니와 감정적 갈등이 있고 언니는 레이의 파트너 브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브론은 양육자와 갈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유일한 지지자인 동생에게 상처받기도 한다. 이 책은 갈등을 적당히 마무리하기보다, 레이와 브론의 관계를 포함해서 모두의 관계를 적당히 해소하지 않고 종종 그냥 내버려두며, 씁쓸하지만 가능한 형태로 남겨둔다. 이게 좋다. 해피엔딩도 언해피엔딩도 아닌, 봉합하지 않는 관계의 갈등 속에서도 또 그냥 살아가는 삶. 머리맡에 두고 종종 찾아 읽을 듯하다.

며칠 전 한 시나리오작가와 인터뷰 비슷한 것을 하며, 안전하게 상처받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안전하게 상처받고, 안전하게 실패하는 것은 내가 자주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때의 이야기는 인권 교육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내가 학교의 교육을 잘 모르니 상당히 공허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인권 감수성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경험이 안전하게 상처받는 것이라는 점만은 강조할 수 있을 듯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내거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음을 안전하게 경험하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겪어가는 것. 나만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차별에 공여하는 나의 권력을 직면하는 과정. 교살에서는 공허한 이야기일 수 있어, 인터뷰 비슷한 자리에서도 좀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