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der Studies: Terms and Debates – 젠더 이론 입문서

누군가가 내게 혹은 당신에게 이번 일 년 동안 영어 책(이론서를 중심으로)을 10권 정도 읽으라고 한다면 부담스러울까? 10권을 하나의 단위로 상상하면 부담스럽다. 하지만 하루에 5~8쪽을 꾸준히 읽으면 일 년에 열 권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책의 전체 쪽수에 따라 10권이 버거울 수도 있고, 10권 이상을 읽을 수도 있다. 어쨌건 얼추 10권 정도는 읽을 수 있다. 별 거 아니다. 그냥 매일 5~8쪽만 꾸준히 읽으면 된다. 이건 지금까지 내가 실천한 방법이기도 하다. 나의 영어 실력은 형편 없다. 하지만 영어 책이나 논문을 읽는데 부담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2004년 가을 혹은 늦은 겨울부터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정 분량을 꾸준히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날은 시간이 도무지 생기지 않아 한 문장만 읽었고, 어떤 날은 너무 바빠 한 문단만 읽기도 했다. 한 문장이라도 읽은 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독해력을 놓칠 것만 같아서 였다.
*이 문단은 사전만 있으면 영어 문장을 독해할 수 있는 사람, 특히나 제도권에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몸에 밴 습관 때문일까? 20쪽 정도 남은 책을 오늘 오전에 다 읽었다. 스스로 당황했다. 이렇게 빨리 읽을 수 있는 내가 아닌데, 하며. 아무려나 이렇게 해서 Gender Studies: Terms and Debates를 다 읽었다. 사실 이렇게 빨리 끝낼 계획은 아니었다. 올 초만 해도, 그냥 조금씩 읽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런 어정쩡한 계획으로 인해 어떤 날은 읽지 않는 날도 생기더라. 그래서 작정하고 하루에 딱 8쪽을 읽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오늘 다 읽었다.

Anne Cranny-Francis, Wendy Waring, Pam Stavropoulos, Joan Kirkby 공저의 Gender Studies: Terms and Debates(『젠더 연구: 용어와 논쟁』, 어떤 사람은 term을 규준?으로 번역하던데 여기선 용어로 번역)는 일종의 입문서, 개괄서라 할 수 있다. 내용은 젠더 이론과 연구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개념들, 용어들을 정의와 논쟁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개괄적이긴 해도 여러 논쟁을 폭넓고 어느 정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아울러 논의는 가장 기초적인 설명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이 책의 미덕 중 하나는 퀴어이론이나 트랜스젠더 이론을 곁가지가 아니라 논의의 주요 틀로 다룩루고 있다는 점이다. 아쉬운 점이라면 퀴어이론과 트랜스젠더 이론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일테면 퀴어 이론 내부에서 진행한 논쟁은 거의 다루지 않으며 어떤 대안처럼 다루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만큼 독자층을 분명히 한다는 의미다. 젠더 논의를 이론적으로 기초부터 공부하고 싶으며, 퀴어이론이나 트랜스젠더 이론은 낯선 이들이 이 책의 예상 독자다.
(몸 변형, 성형수술과 관련한 논의는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저자들이 속한 집단의 성격을 반영하는 듯.)

영어 공부도 하면서 젠더 이론도 공부할 수 있는 책이 될 거 같다.

+
공저면서도 개별 필자를 밝히지 않지만, 읽다 보면 문체가 바뀐 걸 알 수 있다. 읽다가 당황했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

+다 쓰고 나서 깨달았는데, 이 글은 블로깅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만든 산물이니 두서가 없어도 그러려니 하셨으면 합니다. -_-;;;

어젠 얼결에 논문 한 편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얼결’인 건, 원래는 이틀에 걸쳐 나눠 읽을 계획이었는데 읽다보니 탄력이 붙어 몇 시간 만에 다 읽었기 때문이다.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건 읽기 수월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분량도 짧고 내용은 무척 흥미로운데 읽기 어려운 글이 있기 마련인데, 어제 읽은 글은 수월했다. 저자는 카트리나 로엔(Katrina Roen)이고 제목은 “‘But We Have to Do Something’: Surgical ‘Correction’ of Atypical Genitalia.”

이 글이 실린 잡지의 특집은 작년 말 내게 어떤 좌절을 안겨준 내용이기도 하다. 젠더의 의료적 구성, 의료기술과 체화와 관련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이 내 논문의 내용과 상당히 겹쳤기 때문이다. 내 논문의 본문을 다 쓰고 나서야 이 특집을 알게 되었고, 심지어 작년 초에 발간한 내용이란 점에서 ‘논문을 접어야 하나’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작년에도 썼지만, 논문 쓰는 과정에서 한숨 돌리고, 최근 경향 확인을 위한 키워드 검색 겸 좋아하는 저자의 스토킹을 위한 검색 과정에서 찾은 거였다. 좀 더 일찍 찾았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이미 늦은 걸.)

아무려나, 이 특집은 논문이 끝나면 읽기로 했기에 요즘 읽고 있는데 로엔의 글도 그 중 한 편이다. 내용은 “‘하지만 우린 뭔가를 해야 한다’: 비전형적인 성기에 대한 외과수술 ‘교정'”이란 제목을 통해 얼추 추측할 수 있다. 외과의학에선 간성(intersex people)으로 태어난 이들의 외부성기 형태를 ‘여성’ 혹은 ‘남성’의 외부성기 형태에 적합하도록 모형을 바꾸는 수술을 시행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규범적인 존재로서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살 수 있고, 둘 중 하나의 젠더로만 인지되기에 다른 어떤 젠더로 사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의료기술은 이런 인식을 토대로 비규범적인 성기형태를 ‘교정’하여 규범적인 존재로 개인을 (재)생산한다.

문제는 외부성기형태재구성 수술을 시행하는 것이 간성들에게 ‘좋은가’, 수술 이후 합병증은 없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간성 본인은 이 수술을 원하는가란 질문을 탐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간성 수술(외부성기형태재구성수술)은 아이가 아주 어릴 때, 대체로 출생 후 18개월(혹은 2년) 이내에 이루어지기 마련이라 간성의 의견은 전적으로 부정된다. 수술은 부모의 동의를 얻어 이루어지지만,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아이가 일찍 죽을 것이다, 동성애자가 될 것이다, 간성으로 살면 불행할 것이다와 같은 식으로 말하며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편이라 한다(Peter Hegarty in conversation with Cheryl Chase. “Intersex Activism, Feminism and Psychology: Opening a Dialogue on Theory, Research and Clinic Practice.” Feminism & Psychology 10.1 (2000)).

수술의 경과가 좋은가란 문제에서도 정확하게 조사된 바 없다. 어릴 때 수술을 경험한 간성활동가들은 수술이 간성들에게 더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의료담론은 이들의 주장을 신경 쓰지 않을 뿐더러 더 많은 간성들이 부정적인 효과를 증언하지 않으니 수술은 긍정적이라고 가정한다. 현대 사회에서 간성이 부정적이거나 무언가 문제가 있는 존재로 인지되기에 자신이 간성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는 맥락을 무시한 가정이다. 침묵은 곧 긍정이라고 이해한 셈이다.

수술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단 수술을 하는데, 그럼 도대체 왜? 로엔의 논문 제목이기도 한데, 수술을 하는 건 어쨌든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서 간성을 돕는 실천이며, 수술을 하지 않는 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수술을 해야 하는 것인지, 수술의 결과가 좋은 것인지, 간성 자신이 수술을 원하는지에 상관없이 무언가(외과수술을 통한 외부성기형태재구성수술)를 하는 것이 의사로서 ‘윤리’이자 ‘의무’인 셈이다. 그렇기에 수술 후에 간성들이 경험하는 후유증, 합병증 등은 공적으로 은폐되기 마련이다. 태어난 직후에 이루어진 수술로 의사로서의 의무는 다 한 셈이다.

로엔의 글은 이와 관련해서 좀 더 파고들진 않는다. 그의 글이 기존의 문헌 재검토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로엔의 글이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로엔을 비판하기엔 난 더 심하니 이런 지적은 무안하지만, 로엔의 글은 종종 무언가를 말할 즈음 끝나거나 너무 익숙한 얘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나부터 절대적으로 반성해야 한다!)

나의 관심은 ‘하지만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윤리 혹은 의무감이었다. 현재 의료 체계에서 간성은 문제가 있는 존재로 다루어지고 있기에, 태어난 아이가 간성이라면 ‘치료’를 해야 한다고 의사는 느낄 것이다. ‘치료’가 정말 옳다고 믿기에 시행하는 의사도 있을 테고. 어떤 실천이 상대에게 좋은 건지, 아닌 건지를 떠나 일단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 사명감이 빚어낸 비극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내겐 옳은 것이기에 실행했는데 그것이 상대방에겐 치명적인 것일 때 발생하는 비극. 그래서 고민 없는 신념과 무지는 무서운 것이다.
(푸른기와집에 있는 누군가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잖은가. -_-;)

요즘 배려라는 것, 선물이란 것과 관련해서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 보니, 이 논문의 제목이 유난히 더 끌렸는지 모른다. 가끔씩 배려란 상대방의 전반적인 상황을 고민하는 것이라기 보단, 내가 상대방에게 관심 있는 부분만 고민하며 때때로 정말로 고민해야 할 부분은 간과하는 것이라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배려라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 것 같아. 그래서일까,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인용구절을 읽으며 ‘이 무식한!’이라고 중얼거렸기보단, 안쓰러운 느낌이 먼저 들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이것 자체도 어떤 실천이긴 하지만) 시기를 놓치면 큰일이 생길 거란 불안이 있을 테다. 기존의 관행은 이런 불안을 더 부추길 테니 외과수술이 어떤 효과를 낳을 것인가를 고민은 뒷전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렇다고 외부성기형태재구성수술에 동의하는 건 결코 아니다. 간성 이슈가 트랜스젠더 이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지점이다. 개인의 젠더를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의사들이 결정하는 의료체계, 모든 개인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환원하는 실천들, ‘여성’ 아니면 ‘남성’에 적합한 신체 형태(피부 표면)가 있다는 논의들은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니까. 그래서 간성 관련 글을 읽다보면 덩달아 나도 화가 나고, 때때로 분기탱천한다. 물론 나의 논리를 위해 간성을 동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조심스러울 때도 많고.

애도

장례식장에 몇 번인가 참가하며 깨달은 건, 죽음도 자본주의사회에선 상품이란 점이다. 죽음을 진행하는 모든 과정에서 돈이 오고간다. 그렇다고 과거의 죽음 의례를 낭만적으로 평가하려는 건 아니다. 과거엔 관의 재질과 무덤 주변을 꾸미는 정도로 계급을 과시했고, 지금은 화장 가루를 담는 도자기의 수준으로 계급을 과시하니까. 커다란 장식 꽃의 개수로도 죽음을 평가하고.

최근엔 회사의 부흥을 위해 죽음을 소비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기사를 써라, 그럼 트래픽 초과로 회사 가치가 올라갈 것이니” 라고. 분노를 어찌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사람을 애도한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 Boys Don’t Cry]란 영화로도 유명한 브랜든 티나/티나 브랜든의 죽음은, 트랜스젠더 운동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트랜스젠더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의 죽음이 트랜스젠더 운동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의 죽음은, 이후 트랜스젠더들이 혐오 폭력으로 죽을 때마다 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이 모여 항의집회를 여는 계기를 만들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자 혐오폭력으로 죽은 이들이 몇 명인지를 알려주는 사이트도 생겼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그가 그토록 파급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백인이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그 전에도 많은 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들이 혐오폭력으로 추정되는 사건으로 죽었으니까.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에도 인종, 계급 등이 개입한다. 그러니 죽음을 애도하는 건 정치적인 행위다.

“여장남자”로 방송에서 유명해졌다 하고, “성전환수술”을 해서 다시 한 번 유명해진 장채원씨의 죽음을 이제야 들었다. 상품성의 여부로 죽음을 대하는 사회에서 모든 죽음은 동등하지 않다. 포털 메인은커녕 주요기사에서도 접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의 죽음 소식에 슬픔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 “성전환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떠들썩할 때야 비로소 이런 사람도 있구나를 알았을 뿐 사람. 그 후론 잊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이 사람의, 아마도 마지막일 소식을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슬픔이 만조인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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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도
기사 제목과 내용은 언론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젠 화도 안 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