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완자가(모완)의 윤리: 무지로 무지를 얘기하기 혹은 트랜스-바이 맥락으로 읽기 시도

참고글
ㄱ 모두에게 완자가. 82화 “트렌스젠더에 대하여”에 대하여 https://www.runtoruin.com/2138
ㄴ ‘모두에게 완자가’에 대해 어제 쓴 글에 덧붙여서[약간 추가] https://www.runtoruin.com/2139
ㄷ 이것저것 잡담: 읽은 거, SNS, 구글플러스, 모두에게 완자가(모완), 무한도전-노홍철 https://www.runtoruin.com/2140
모두에게 완자가(모완)을 논하는 글을 썼을 때, ‘이 삐리리한 삐리리한 삐리리야’라고 쓸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모완을 읽으며 너무 싫어서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다짐하셨을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욕을 하며 비판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르며 각자의 맥락에 따라 이를 표현하는 방법도 다양하니까요.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룬 82화와 83화에 문제가 있은 표현이 상당하단 점에서 저 역시 “야이 삐리리야”라는 식으로 글을 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제 판단에 저는 그럴 위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완자 작가보다 낫다고 얘기할 부분이 없거든요.
자신이 모르는 이슈, 열심히 고민하지 않은 이슈에 있어선 ‘누구나’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수준으로 얘기한다고 정희진 선생님께서 지적한 적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모든 이슈에 아무런 문제 없이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럴리가요. 어떤 이슈에서 저는, 저도 깨닫지 못하는 상태로 논쟁적이고 혐오발화일 수도 있는 말을 했을 겁니다. 제가 주로 염두에 두는 맥락에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얘기를 한다고 해도 제가 염두에 두지 않은 맥락에선 문제가 될 발언이 상당합니다. 장애이슈에 있어선 어떤 ‘사건’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지금 떠올려도 이불 속에서 하이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일입니다. 제가 주로 글을 쓰고 제 전공이라고 얘기하는 트랜스젠더 이슈라고 예외일까요? 오히려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훨씬 더 논쟁적인 얘길 더 많이 했을 수도 있습니다. 트랜스젠더 이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고작해야 제가 경험한 방식의 일부만 떠들 수 있을 뿐인 걸요. 저는 다른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대표하지 않으며 다른 트랜스젠더의 경험을 대리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경험과 역사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저의 논의가 다른 트랜스젠더에겐 문제가 많고 혐오로 독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완에 관한 논평을 쓸 때, 그 잣대를 저에게도 들이댈 수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얼마나 잘 할 수 있나? 자신없어요. 모완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고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너는 얼마나 잘 하나 보자’는 식으로, 타인을 비평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비평할 것인가를 얘기하고 싶습니다. 트랜스젠더가 이 세상의 최대 약자, 최대 피해자라서 모든 언설을 판단하는 기준도 아닌데, 트랜스젠더 역시 다양한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혐오발화를 하는데 감히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더구나 각자의 맥락에서 얘기하자는 건, ‘나는 이게 싫어’라는 식으로 그냥 툭 내뱉자는 게 아니니까요. 나의 감정을 정치적으로 맥락화하자는 거죠. 밑도 끝도 없이 ‘그건 혐오야’, ‘그 말이 난 불편해’라고 말하는 건, 적어도 비평적 글쓰기엔 … [그냥 생략할 게요.]
물론 사람마다 다 다른 윤리가 있기에 제 글쓰기 윤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습니다. 그저 저는 이런 고민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는 거죠. 제 기준에 제가 잘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요.
어쩌면 제가 모완을 1화부터 계속 읽었기에 이렇게 판단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82화만 읽었다면 또 한 편의 트랜스혐오 텍스트가 나왔다며 “이 삐리리한”이라고 비판했을지도 모릅니다. 다행이라면 1화부터 읽었고 모완이란 작품의 흐름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완자 작가는 자신의 무지를 통해 무지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누군가 어떤 낯선 이슈를 얘기할 때면 다양한 전략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학부 <성과 사회>란 수업 조별 발표 자리에서, “저희 조는 트랜스젠더라는 (신기한)존재를 만났는데..” 운운할 수도 있죠. 혹은 “너네들 트랜스젠더 잘 모르지? 내가 어제 트랜스포머 아니 트랜스젠더를 만났는데 내가 가르쳐 줄게”라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발언의 수위는 달라도 많은 경우 타인을 얘기할 때 이런 형식입니다. 말투만 조금 순화되었냐 아니냐의 차이지 내용에선 아무런 차이가 없는 그런 타자화 혹은 우아하지도 않은 혐오일 때가 많죠.
모완은 어떤가요? 조금만 세심하게 읽으면 완자 작가는 윤리적으로 그리기 위해 상당한 고민을 한 걸 짐직할 수 있습니다. 글에 나타난 문제적 표현을 잠시 덮어둘 수 있다면, 트랜스젠더 이슈에 접근하는 태도, 트랜스젠더 이슈를 얘기하려는 태도가 그러합니다. 자신이 안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 자신에게 어떤 무지가 있는지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작가의 바이 범주가 만든 성찰이지 않을까라고 추측합니다.
완자 작가는 야부와 7년 정도 파트너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이 시간이라면 자신을 그냥 레즈비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편이 설명하기 더 편할테고 사람들이 더 쉽게 받아들이니까요. 완자 작가가 자신을 바이라고 밝혔음에도 모완이 동성애 웹툰으로 이해되는 걸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개별 관계에선 자신을 바이라고 얘기하면서 공적 자리에선 레즈비언이라고 밝히기도 했고요. 이것이 현재 바이 범주가 갖는 위치를 상징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제가 특강에서 얘기할 때, 동성애나 트랜스젠더는 그래도 참조할 대상이 있어서인지 고개라도 주억거리지만, 바이나 무성애 이슈에선 다들 어떻게 인식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분위기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완자 작가는 자신을 바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그럴 작가가 아니죠. 완자 작가는 자신이 바이란 점을 분명하게 밝혔고 바이 범주를 설명하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어느 화에서 바이에 관한 오해를 설명한 적도 있는 듯하고요(다시 정주행을 하지 않고 쓰는 글의 문제;;). 자신을 바이로 설명하면서 완자 작가는 자신의 범주 및 삶과 관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설득하고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겠죠. 바이가 아닌 거의 모든 사람, 동성애자건 이성애자건 상관 없이 끊임없이 자신의 범주를 설명해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감수성과 성찰이 있을 테고요. 그렇기에 타인의 삶에 대해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없고 함부로 아는 척 얘기 할 수 없다는 걸 정말 잘 아는 듯하단 인상입니다. 이제 완자 작가가 트랜스젠더와 관련해서 얘기를 할 때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입니다. 웹에서 자료 좀 검색해서 떠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직접 만나서 듣고 그 얘기를 전하는 것, 그렇게 들은 얘기로 아는 척하기보다는 자신의 무지를 먼저 밝히며 무지를 통해 무지를 얘기하는 것이죠.
물론 저는 어떤 글을 비판할 땐 “야이 삐리리야”를 글쓰기 언어로 바꿔서 쓸 때도 있습니다. 이경이나 김정란의 글을 비판할 때 그렇습니다. 비트랜스젠더는 무조건 옹호하고 트랜스젠더는 비난부터하는 글에 저는 지금까지 적은 글쓰기 기준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완자는 제가 판단하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 글에 “야이 삐리리야”라는 식의 비판을 할 순 없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제가 모르는 이슈와 관련해서 글을 쓸 때 완자 작가 수준으로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며 글을 쓸 용기가 있느냐면 아니요, 제겐 그런 용기가 없습니다. 저는 완자 작가보다 잘 쓸 자신이 없습니다. 완자 작가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만 비판하라(“너희 중에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져라”?)가 아닙니다. 그냥 저는 이런 판단을 했다는 것 뿐입니다.
그랬기에 트위터에 제 글이 유통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만약 둘 다 유통된다면, “모두에게 완자가. 82화 “트렌스젠더에 대하여”에 대하여”보다는 “‘모두에게 완자가’에 대해 어제 쓴 글에 덧붙여서[약간 추가]”가 더 많이 유통되길 바랐습니다. 지금이라면, 앞의 두 글보다 지금 이 글이 더 많이 유통되길 바라고요. 하지만 글의 소비와 유통은 제가 판단하고 바랄 수 있는 게 아니죠. 제가 원한다고 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도 않고요. 이를테면 지금까지 출판한 글 중에서 ‘다른 어떤 글보다 지금 이 글을 사람들이 더 많이 읽으면 좋겠어’라는 글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람들이 읽어주는 글은 다른 글입니다. 제가 기대하는 글보다는 다른 글을 더 좋아해주시더라고요. 그러니 그 글 말고 이 글을 읽어주세요, 이 글을 유통해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제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읽은 분이 판단할 사항이니까요. 제가 고민하는 부분과 사람들이 공감하는 부분은 다르단 뜻이겠지요. 그러니 지금까지 쓴 글은 당연하게도 저 한 사람의 사소한 주절거림에 불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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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완자가. 82화 “트렌스젠더에 대하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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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비판이 적절한지는 고민입니다. <모두에게 완자가>(모완)라는 작품의 흐름 속에서 이번 화를 구절구절 비판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느낌도 있거든요. 모완의 연재 역사에서 필요한 비판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무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애당초 이번 화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려고 쓴 글이란 판단 때문입니다. 82화에도 드러나는 빈번한 문제(혹은 아쉬움) 중 하나는 …
mtf와 ftm을 구분해서 표기해야 하는 지점에서 구분하지 않는 건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분할 경우, 자기 자신을 mtf 트랜스여성, ftm 트랜스남성이 아니라 트랜스젠더로 설명하는 이들이 누락된다는 점에서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다음은 몇 구절을 논평한 내용입니다.
# “참새씨는 남자의 몸을 가졌지만 여자인, ‘트렌스젠더’다.”
-‘남자의 몸’ 아닙니다. 여성 몸의 다양한 양상 중 하나입니다. 일단, 저는 제가 남자의 몸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트랜스젠더의 몸으로 인식할 때가 가장 많고, 때때로 여성/여자 몸의 다양한 형태 중 하나라고 인식하거나 설명합니다. 저처럼 인식하지 않는다고 해도(각자 다 다르게 인식하기 마련이니까요), ‘남자의’ 몸이 아니라 mtf/트랜스여성의 몸 혹은 여성의 몸인데 그저 특정 신체 부위의 형태가 다를 뿐입니다. 그리고 이 형태를 해석하는 방식(내가 해석하는 방식과 나 외에 다른 사람이 해석하는 방식, 내가 해석하고 싶은 방식과 사회에서 지배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방식 등)이 달라서 갈등이 발생하고요.
-‘가졌지만’.. 가지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으로 몸은 가질 수 없습니다. 몸이 소유 형식일 수 있다면 트랜스젠더의 성전환수술, 다양한 사람의 성형수술이 이토록 논쟁일 수 없습니다. 몸이 소유물이라면 그리고 몸을 소유했기에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진정한)주체가 따로 있다면 몸을 변형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몸이 소유물이 아니라 몸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에 성전환수술, 성형수술 등에서 논쟁이 발생합니다. 몸이 곧 나 자신이기 때문에 연애 파트너가 mtf/ftm/트랜스젠더로 자기 설명 방식을 바꾸거나 트랜스젠더일 때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 거고요.
-‘트렌스젠더’… 아놔… 트‘렌’스젠더 아니고요. 트‘랜’스젠더입니다! 이런 기본적 단어는 틀리지 마시라고요. 그저 한 곳에 틀린 것이 아니라 제목부터 일관되게 틀리고 있습니다(‘트랜스섹슈얼’은 트’랜’스섹슈얼로 적은 것이 신기할 정도). 여담인데, 어떤 분이 트’렌’스젠더는 의료적 조치를 한 사람이고 트’랜’스젠더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고 구분하더라고요.. 한국에서만 가능한 해석이긴 합니다. 그리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태원 트랜스젠더 업소에서 ‘트렌스젠더’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요즘은 거의 다 트랜스젠더로 바꿨습니다.
# “참새씨는 보통 남자들과 ‘성별정체성’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건 도대체 어디서부터 수습해야 할까요?
우선 왜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는 알 듯합니다. 아마도 참새 씨는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보통 남자들과는 다르게 여성으로’ 운운하셨을 듯합니다. 준비가 안 된 사람, 트랜스젠더 이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많이 하는 설명 방식이기도 하고 트랜스젠더 자신이 종종 사용하는 서사기도 합니다. 아울러 동성애/양성애는 성적지향 이슈고 트랜스젠더는 성별정체성 이슈라고 둘을 구분할 필요도 있지요(만화에도 나와 있듯이요). 이 두 가지가 작가에게서 뒤엉킨 것이 아닐까라고 막연하게 추정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뒤엉킨 것만은 아닐 수도 있는데 이는 뒤에 나오는 구절 “성별을 바꾸는 수술” 때문입니다. 학제에서 흔히 얘기하는 섹스-젠더 구분공식이라는 설명 방식이 작가에게 없기에(섹스-젠더 구분공식을 모두가 아는 것은 아니기에 모르는 건 문제가 아닙니다) 섹스와 젠더(성별)를 뒤섞어 사용한 듯합니다. 그래서 작가가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하지만 매우 문제가 많은 방법)인 ‘정신적 성과 육체적 성이 다른 사람’이라는 설명을 반복하는 것이 차라리 더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즉 ‘성별정체성’ 대신 ‘정신적 성’이라고 적었다면 작가가 의도했던 내용이지 않을까 합니다.
(섹스-젠더 개념을 구분하는 논쟁이 있던 초기에, 물론 지금도 여전하지만, 젠더를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성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정신적 성’으로 표현을 바꾼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문장을 수습하려고 고민하다가, 수습이 안 될 수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작가가 ‘성별정체성’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은지, 학제에서 규정한 ‘성별정체성’이 정확한 개념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 조심스럽기 때문입니다. 학제에서 나온 논문이라면 기본 개념도 모른다고 비판할 수 있지만 모완은 학제 논문이 아니니까요. ‘성별정체성’ 개념의 옳고 그른 사용 방식을 규정하기에 앞서, 이 용어가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연구가 앞서야 합니다. 학제에선 이러이러하게 쓰고 있으니 학제가 아닌 곳에서도 이렇게 사용해야 한다는 건, 지식을 누가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야기합니다. 작가는 성별 개념을 잘못 쓰고 있다고 비판하기보다, 성별 개념이 어떻게 유통되고 쓰이는지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가 더 의미있는 작업입니다.
-‘보통 남자들’이란 표현도 문제인데요. 전 이 구절이 작가의 표현이 아니라 앞서 적었듯 참새 씨의 말에서 인용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합니다. 문제는 ‘보통 남자들과 다르다’라고 말했을 때의 뉘앙스를 포착 못 하고 그냥 인용한 것에서 문제가 발생했지만요. 어쨌거나 이 문장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제가 가진 관념에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작가에게 여쭤보고 싶어요. 이 문장은 정확하게 어떤 의미냐고.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성애는 보통이고 동성애나 양성애는 특수’란 설명 방식에 작가가 동의하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왜 트랜스젠더 이슈에선 이런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일까요? 역시나 ‘트랜스젠더란 낯선 이슈’를 다루면서 너무 얼었던 걸까요?
# “성별을 바꾸는 수술”
-이 구절에서 ‘성별’이 소위 ‘육체적 성’ ‘생물학적 성’을 지칭한다면, 즉 섹스를 지칭한다면 대중 미디어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신적 성’을 지칭한다면… 흠… 그렇진 않다고 믿겠습니다. 그냥 ‘성전환수술’이라고 적었다면 가장 무난하게 넘어갔을 텐데 왜 이랬을까 싶으면서도, 성별이란 용어가 어떻게 쓰이는가를 우선 확인해야 할 부분이니까요.
-성별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확인해야 하지만, 작가가 성별을 사회문화적 성인 젠더와 생물학적 성인 섹스를 혼용하고 있다는 인상은 지울 수 없습니다. 작가가 표현한 방식이 야기한 당혹감과는 별개로, 섹스와 젠더가 정말 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던가요?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전공자와 일부에게만 의미 있는 논쟁 아니었나요? ‘일반 대중’은 이런 개념을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경우엔 섹스와 젠더를 구분하지 않는데 왜 트랜스젠더에게만은 유독 이를 분명하게 구분해서 적용하는지를 되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일상에서 ‘여자와 남자는 달라’라고 말할 때 섹스와 젠더는 구분되지 않고 상당히 뒤섞여 있습니다. 늘 이렇게 사용하고 있는데 트랜스젠더 이슈에서만은 둘을 구분하면서 생물학적 섹스를 본질로 삼는다면, 바로 그 방식을 파고 들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자와 남자는 달라’란 언설이 섹스-젠더의 단선적 생애서사 운운하면서 그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바로 그걸 염두에 두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 서사를 내파하는 작업이 필요할 듯합니다.)
# “신체적 성과 정신적인 성이 다른 사람을 전부 트렌스 젠더라고”
-신체적 성과 정신적 성이 다르다고 느끼지 않는 저는 트랜스젠더가 아닌가요?
이번 모완을 읽으면서, 전 ‘신체적 성과 정신적 성이 다르다’를 비판하기에 앞서 이 언설의 의미를 틀어버릴 수사가 필요하다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이 언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이렇게 설명하면 곤란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큰 효과가 없다면, 기존 언설을 틀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재구성하는 작업도 병행해야지 않을까 싶어요. 그럼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그리고 ‘트렌스 젠더’가 아니고 ‘트랜스젠더’! 도대체 띄어쓰기는 무슨 이유로 한 건가요?
-인용한 문장은 수술여부와 상관없다고 얘기하면서 나온 내용입니다. 트랜스젠더를 수술 여부와 무관하게 설명한 건 좋아요. 🙂
# 작가는 얼었고 농담은 실패했고.
앞에서 저는 작가가 얼어버린 것 같다고 썼는데요. 평소 작가의 개그 감각이 실패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황새가 아이를 물어 주는 장면은 작가의 전형적 농담인데요. 그 장면이 매우 어설프게 전개되고 말았습니다. 모완이라는 작품의 맥락에선 그 농담을 더 밀고 나갔어야 오히려 좋았을 텐데요. 하지만 작가는 트랜스젠더 이슈를 다루면서 낯설어했고 얼었고 농담은 정말 어정쩡한 상태로 끝났고…
# 댓글에서 “문득 드는생각에 트렌스젠더인데 동성애자라면 정말 대박이겠네요 이런 사람도 있을까요?”
전 대박입니다. *^^*
네이버도 다음처럼 댓글 추천제도가 있으면 좋겠어요.
+관련글 추가입니다: https://www.runtoruin.com/2139
관련글 또 하나 추가: https://www.runtoruin.com/2146

범주 용어의 역사, 메모

“게이가 호모고 트랜스젠더가 게이던 시절..”이란 표현은 어느 시기까지로 유효한 것일까? 일테면 1990년대 초반엔 확실히 이런 식으로 구분한 듯하다. 그 시기 나온 (일전에 언급하기도 한)기록물엔 mtf 트랜스젠더를 지칭하며 게이로, 남성동성애자(바이남성은 어떤 위치일까?)를 지칭하며 호모를 사용하고 있다. mtf 트랜스젠더를 묘사하며 게이로 지칭한 시집도 나왔다. 조금 더 추적할 때 1986년에 원고를 쓰고 1987년에 나온 어느 책에서도 mtf 트랜스젠더를 게이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1985년 즈음이나 그 직전에 쓴 기록물에선 분명하지 않다. 그 즈음 글에서 호모는 오늘날의 게이와 mtf 트랜스젠더를 모두 지칭한다. 둘을 아예 구분하지 않는다. mtf 트랜스젠더를 여장한 남자로 이해하며, 게이와 mtf 모두 태어날 때 남자로 지정받았지만 여성성을 실천하는 존재로 묶는다. 그래서 호모와 게이란 용어 역시 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진 않다. 물론 이것이 일반적 경향이라고 할 순 없고, 그저 내가 찾은 몇 편의 기록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기록물이 늘어날 수록 과거는 더 흥미롭고 또 복잡하다. 그래서 좋다.
레즈비언과 관련한 용어는 최소한 1980년대 초반부터 분명하게 쓰인다. 여성 간의 성애적 실천(두 동성애자여성 간의 관계일 수도 있고 두 바이여성 간의 관계일 수도 있고 동성애자여성과 바이여성 간의 관계일 수도 있고 동성애자여성과 이성애자여성의 관계일 수도 있고 등등)은 레즈비언으로 표현한다. 1970년대 명동 문화에서도 레즈비언이란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했다고 하고 신문기사에도 1970년대 초반부터 레즈비언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레즈비언의 용어 역사를 살피고 그 의미가 미묘하게 변해가는 과정을 살피는 작업도 꽤나 흥미로우리라.
가장 어려운 건 바이/양성애란 용어 사용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일텐데 ‘양성애’로는 신문기록이 별로 없어서 의외다 싶다. 대신 ‘양성’(ex. 국력양성)이나 ‘바이’(ex. 알리바이, 케이스-바이-케이스)는 관련 없는 기록도 같이 검색되기에 걸러내는 것부터 일이다. 무엇보다 바이를 레즈비언과 호모/게이로 묶어서 일괄 설명했을 가능성가 상당하기 때문에(가능성 97%에 한 표) 이 지점을 섬세하게 가르는 작업이 필요할 텐데.. 이건 단순히 기록물을 발굴하는 것 이상의 어떤 작업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바이로 설명할 수 있는 mtf 트랜스여성의 흔적이 있다는 점에서 재밌는 기록물이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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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네이션(동성연애국민)”
1992년 기사에서…
읽고 빵 터졌다. 크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