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기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2013년 1월 소식입니다.

안녕하세요.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의 루인입니다.
얼마나 정기적으로 할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첫 번째 달이 지났으니 연구소 관련 소식을 짧게 전합니다.
01. 유일하게 소속한 사람, 루인은 현재 저널에 투고하기 위해 “내가 사는 피부” 관련 논문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마감 일자를 뒤늦게 전달받아 조금은 조급하게 원고를 수정하고 있다고 하네요. 연구소 소속 출판물을 의외로 빨리 생산할 수 있을 듯합니다.
02.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에서 진행하는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프로젝트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3년의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3년 뒤엔 트랜스젠더 단체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기획단으로 참여하고 싶은 바람도 있지만 이래저래 하고 있는 일이 많아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는 후문입니다. 지난 1월 26일 오리엔테이션을 했는데 무척 좋은 분이 많아 멋진 프로젝트가 될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03.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는 당분간 루인 1인 연구소로 운영할 계획이었는데요… 설명하기 애매한 이유로 새로운 연구원이 들어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이 기회에 아예 개방을 할까 고민도 잠시 하고 있지만, 개방했는데 함께 하겠다는 분이 아무도 없으면 매우 뻘쭘한 관계로 일단 고민만 하고 있습니다.
이상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소식입니다.
2월엔 더 많은 소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2월에 뵐 수 있길 바랍니다. 🙂

동성애규범성의 만연, 퀴어이론서의 필요

01

1월에 총 24개의 글을 작성했습니다. 우와아!!! 2011년 1월 이후 월 포스팅 20개 넘은 건 처음입니다. 으하하.
02
어제 강의를 들으며 다시 확인했지만, 걸커(걸어다니는 커밍아웃), 걸아(걸어다니는 아웃팅), 티부(티나는 부치)와 같은 언설은 동성애규범성 논쟁을 촉발한다. 동성애규범성은 바이/양성애, 트랜스젠더 등을 배제하거나 누락하는 이슈일 뿐만 아니라 특정 양식의 실천만 동성애에 적합한 것으로 다루고 그렇지 않은 다양한 실천을 배제하는 이슈다. 특정 행동 양식의 동성애자를 꺼리는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일이다. 동성애자 공동체에서만 문제가 아니라 동성애자가 아닌 퀴어 공동체(양성애/바이,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트랜스젠더 등)에게도 문제가 된다. 이를 논의할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는데…
03
KSCRC 아카데미를 들으며 한국 맥락에서 쓴 퀴어이론서가 있어야겠다는 고민을 했다. <남성성과 젠더>, <성의 정치 성의 권리>가 괜찮은 퀴어이론서지만, 책 제목이 퀴어이론을 표명할 뿐만 아니라 목차 역시 퀴어 이슈에만 좀 더 초점을 맞춘 것을 원한다. 레즈비언, 게이, 바이,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에이즈 이슈를 다루는 글 각 두 편씩 묶어서 책으로 낼 수 있으면 참 좋을텐데(가능하다면 장애퀴어 이슈도 한 편 정도 있어야 하겠고).
미국의 경우 1990년대 중반부터 퀴어연구, 퀴어이론이란 제목의 선집이 다량 출간되었다. 그 중 나름 괜찮다고 평가하는 것은 Brett Beemyn과 Mickey Eliason이 엮은 Queer Studies: A Lesbian, Gay, Bisexual, and Transgender Anthology다. 초기 퀴어이론 선집이 레즈비언과 게이 중심이었다면, 비민과 엘리아슨의 선집은 레즈비언과 게이 중심의 퀴어이론을 비판하면서 등장한다. 그래서 끼워 넣기 식으로 바이와 트랜스젠더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 바이와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퀴어이론을 재구성하는 글이 여럿 있다.
한국에서 퀴어이론서가 나온다면 비민과 엘리아슨의 선집을 모델로 삼고 싶다. 동성애 중심으로 퀴어 이슈를 논하는 분위기, 퀴어 모임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당연히 레즈비언 아니면 게이라고 여기면서 바이와 트랜스젠더는 누락되거나 배제되는 분위기에 문제제기하는 맥락에서 책의 방향을 잡고 싶다. 예전 같으면 누가 이런 방향으로 책 기획을 하면, 그리고 내게 함께 하자고 하면 같이 해야지, 했는데 요즘은 좀 변했다. 내가 원하는 책을 누군가 기획해주길 기다려봐야 아무도 안 하더라.;;; 그래서 원하는 방향의 책이 있으면 직접 기획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달까. 하지만 혼자는 할 수 없는 법. 누구 저랑 같이 이 책 기획하실 분 계신가요?

[개인적 기록] 바이 이슈 논쟁에 덧붙여

말과 글로 먹고 사는 인간이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어제 절감했다. 요즘 몸이 안 좋아 목이 꽉 막혔다. 간단한 대화만 짧게 할 수 있어 토론은 꿈도 못 꾼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도 못 하는 상황이 무척 답답했다.

어제 진정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바이 이슈가 나왔고 그때 말하고 싶었지만 못 한 얘기가 있어 개인적 기록 차원에서 남기는 글. 어제 논의 자리에 있던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글이란 점에서 일기장에 쓰면 좋을 법한 글이지만 블로그가 (공개적으로 쓰는)일기기도 하단 점에서 그냥 여기에 쓰기로 한다.
바이를 둘러싼 논쟁을 다루는 부분에서 기혼이반 이슈, 여성과 만나다가 남성과 결혼하는 여성의 이슈를 주로 다루며 바이와 기혼이반을 등치하는 문제를 야기했다. 이 이슈에 대한 문제제기는 어제 토론 시간에도 적잖게 나왔고 강사는 자신은 바이보다는 기혼이반 이슈를 좀 더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제목을 “바이”가 아니라 “기혼이반”으로 바꿨어야 하지 않을까?
내가 가장 아쉬웠던 것은, 바이 이슈를 다루기 전까지는 매우 흥미롭고 탁월한 분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강숙자 논쟁을 이원젠더 규범에 대한 문제제기로 재구성하려한 부분은 참 좋았다. 그런데 이런 통찰이 바이-기혼이반 이슈엔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이와 기혼이반 이슈를 혼재하면서, 이전의 통찰이 사라지고 바이 이슈를 또 다른 이분법으로 환원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것은 직관적 판단이다). 이런 의심은 나의 참조점에서 출발한다. 다른 많은 이슈에선 이분법 자체를 문제 삼으며 탁월한 성찰을 보이는 많은 비트랜스젠더 페미니스트가 트랜스젠더 이슈에서는 트랜스젠더를 이원젠더 규범을 강화하는 존재란 식으로 독해할 때가 있다. 심한 경우, 트랜스혐오 문헌을 적절한 참고문헌을 인용하며 트랜스젠더를 비난할 때도 있다. 다른 많은 이슈에서는 반짝거리는 성찰을 표현하면서 왜 트랜스젠더 이슈에선 그 성찰이 드러나지 않는 것일까? 어제 강의에선 바로 이 지점이 아쉬웠다. 앞 부분의 논점을 바이-기혼이반 이슈에 적용했다면 전혀 다른 글과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을 텐데…
아울러 남자에게 가는 것,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문제라면, 남자에서 여자로 혹은 여자에서 여자로 떠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면, 이것은 어떤 의미인지, 이것이 레즈비언 범주, 레즈비언의 진정성을 구성하는데 어떤 의미인지를 질문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모니끄 위띠(Monique Wittig)는 레즈비언이 남성과 관계를 맺지 않는 존재로서 이성애 관계 외부, 여성과 남성 범주 외부에 있는 존재(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레즈비언은 남성과 관계를 맺지 않으니 여성이 아니라는 위띠의 주장은 매우 중요하지만, 위띠의 주장에서 레즈비언은 여전히 이성애주의 맥락에 위치한다. ‘남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관계의 외부’라는 또 다른 남성과의 관계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위띠 식의 논의는 바이와 트랜스젠더를 완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위띠 논의에서 바이는 이성애자가 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매우 위태롭고 위험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파트너가 혹은 나 자신이 남자 혹은 남성에게 가는 것이 레즈비언 범주 형성에 어떤 의미인지를 살폈을 때 레즈비언 범주 논쟁, 바이 논쟁, 트랜스젠더 논쟁을 더 복잡하고 흥미롭게 살필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어제 강의에선 위띠 얘기가 안 나왔습니다. 위띠 얘기는 제가 덧붙인 것입니다.)

덧붙여 우리는 각자 자신의 맥락에서 글을 쓰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핵심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이다.
이런저런 고민이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위치에서, 자기 맥락에서 논의를 전개한 강사에겐 무척 고마웠다…라고 쓰면 너무 수습하는 느낌이려나? ;;; 근데 바이 이슈가 아니라 트랜스젠더 이슈였어도 나는 똑같이 고마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