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와 시스는 반대말인가

며칠 전 어느 대학교에서 나온 퀴어 잡지를 뒤적이다가.. 어느 각주가 걸렸다. 물론 그 잡지를 자세히 읽은 건 아니고 잠깐 짬이 났을 때, 어떤 주제를 담고 있나 궁금해서 뒤적였기에 맥락을 못 잡은 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신경 쓰이는 구절이었다. 시스젠더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트랜스의 반대말, 즉, 신체적인 성과 본인의 정신적 성이 일치하는.’이던가.. 얼추 이런 내용이었다. [잡지의 충분한 맥락을 파악한 것도 아니고, 해당 글을 다 읽은 것도 아니며 훑어만 보다가 각주가 걸린 경우라,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습니다.] [QIS의 잡지 퀴어플라이 <우상>에 실린 메코MECCO 님의 글]
이 설명을 읽으며 난감했다. 첫째,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는 “반대”인가? 둘째, 시스젠더는 소위 생물학적/신체적 성과 정신적 성이 “일치”하는 사람인가?
첫째,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는 “반대”인가? 이런 인식을 접하면 몸이 복잡하게 변한다. 일단 존재는 반대일 수 있는가? 이를 테면 흑인의 반대 인종은 어떤 인종일까? 백인? 황인? 혹은 또 어떤? 비슷하게 동성애의 반대는 어떤 성적 지향인가? 혹시 이성애인가? 동성애의 반대는 존재할 수 있는가? 만약 동성애의 반대를 상정한다면 이런 행태는 이성애나 동성애로 설명하기 힘든, 바이/양성애를 비롯한 다양한 성적 실천을 모두 은폐하고 추방하는데 동조함과 같다. 이렇게 진술 방식을 조금만 달리하면 “반대”라는 표현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젠더로 바꿔 얘기해보자. 여성과 남성은 반대 존재인가? 만약 둘을 반대로 설명하면, 즉 여성의 반대 젠더는 남성, 남성의 반대 젠더는 여성이란 식으로 설명하면 이것은 매우 곤란하다. 이런 설명 구조는 모든 인간의 젠더는 여성 아니면 남성 뿐이라는 이분법을 밑절미 삼는다. 이 토대는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를 부정적 의미에서 변태, ‘신의 실수’, 교정하고 치료해야 할 병리적 대상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 정치학을 전면 부정해버리는 문제가 발생한다. 존재를 “반대”라는 언어/인식론으로 설명하는 건 매우 위험한 행위다(여기서 나는 ‘폭력’이란 용어를 사용할지지를 고민하고 있다).
반대란 표현 방식은 정확하게 시스젠더란 용어를 제안했던 트랜스젠더 이론가/활동가의 기획에도 위배된다. 시스젠더란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 건,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가 반대여서가 아니라, 시스젠더가 계속해서 인식(론)에 누락된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인종 정치에서 유색인이란 표현은 백인을 기준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백인을 인종과 무관한 범주로 설정하는 문제를 야기했다. 정작 문제는 백인이고, 백인이 겪는 인종 경험을 탐문해야 함에도 유색인종이란 표현은 이를 방해하고 백인을 자연화하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비백인이란 식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시스젠더 역시 마찬가지다. 젠더 경합만이 아니라 다양한 젠더 경험을 마치 트랜스젠더만 겪는 것처럼 오인하고 오용하는 비트랜스젠더의 인식론과 태도를 문제삼고, 비트랜스젠더의 젠더 경험을 분명한 용어로 명명하기 위해 시스젠더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반대”로 독해한다면 시스젠더란 용어를 쓰지 않는 것만 못하다.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범주로 착각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시스젠더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시스젠더란 용어가 꽤나 심심찮게 쓰임에도 내가 비트랜스젠더란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기도 하다. 나는 두 범주가 분명하게 구분되기보다 어떤 연속체 속에서 다시 사유해야 한다고 믿는다. 비트랜스젠더의 젠더 경험이 따로 있고 트랜스젠더의 젠더 경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아울러 내겐 트랜스젠더 맥락에서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의 젠더 경험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기획이 있기도 하다. 이런 인식틀에서 시스젠더라는 명명은 최초 의도한 정치적 효과를 얼마나 잘 성취할 수 있을지 가늠이 잘 안 된다(이것은 순전히 내 상상력의 빈곤과 무지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의도적으로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가 아니라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는 반대가 아니다. 존재는 반대일 수 없고, 둘은 별개의 분리된 젠더를 겪지 않는다.
둘째, 시스젠더는 소위 생물학적 성과 정신적 성이 “일치”하는 사람인가? 이 진술을 달리 기술해보자. 시스젠더가 일치하는 사람이면 트랜스젠더는, 앞서 “반대”라고 진술한 논리에 따라, 소위 생물학적 성과 정신적/사회문화적 성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된다. 과연 그런가? 트랜스젠더의 몸 경험을 이렇게 단순하게 진술할 수 있는가? 나는 이것과 관련해서, 내 블로그에서도 이미 여러 번 비판했다(예를 들어 https://www.runtoruin.com/2138 ). 트랜스젠더가 일치하지 않는 존재인지, 아니면 매우 협소한 몸 규범을 상정하고 그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를 불일치한다고 여기는 인식이 문제인지, 질문의 형태를 바꿔야 한다. 또한 트랜스젠더가 비록 자신의 몸과 어떤 형식의 경합을 겪는다고 해서 그것이 ‘일치’의 문제로 얘기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다른 한편, 시스젠더는 과연 소위 두 가지 다른 성이 “일치”하는 존재인가? 많은 비트랜스젠더가 다이어트, 성형 등을 통해 젠더 경합을 겪으며 소위 두 가지 다른 성이 완전하게 일치 하지 않는 상황을 겪는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는 아니지만, 사회적 여성성 규범에 부합하지 않아 ‘섹스와 젠더’가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으며, 그저 둘을 불안하게 봉합하며 사는 비트랜스여성은 무슨 젠더인가?
사실 지금 이런 식의 비평이 정당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 글은 매우 짧았고 짧은 지면에 할 수 있는 얘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어떤 형식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에도 꼭 그렇게 언어/용어를 정의해야 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과연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나? 각주를 달아 설명할 거였다면 조금이라도 더 섬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을까?

메모: 김지혜, 페미니즘, 레즈비언/퀴어 이론, 트랜스젠더리즘사이의 긴장과 중첩

이미 몇 번 읽었고, 제가 쓴 글에서 여러 번 인용했지만, 며칠 전 수업 자료라 다시 읽었습니다. 내용이 압축적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쟁점을 아우를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성찰과 아이디어로 가득한 글이고요. 읽으며 이번에 유난히 좋은 구절을 따로 메모했습니다. 이번에 유난히 좋았다는 건, 다른 날 읽으면 또 다른 구절이 더 좋기도 하단 뜻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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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문학페미니즘> 제19권 2호(2011)
페미니즘, 레즈비언/퀴어 이론, 트랜스젠더리즘사이의 긴장과 중첩
김지혜
배타적 영역 설정은 성별 이론들 사이의 논쟁에 등장하는 공간적 사유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될 수 있다. 보니 짐머만(Bonnie Zimmerman)은 “‘영토’나 ‘경계’와 같은 공간적 비유들이 페미니즘과 레즈비어니즘이라 불리는 단일한 공간“이 있는 것처럼 가정한다고 지적한다(166). 각각의 성별 정치학들을 고정된 공간의 점유로 이해할 때, 유동적 관계성은 조망될 수 없다. 젠더 이론들의 영역을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각각의 영역을 단일하고 동질적인 범주로 전체화함으로써 내부적인 이질성과 다양성을 삭제하게 된다.(55)
가령, 재니스 레이몬드(Janice Raymond)와 쉴리아 제프리스(Sheila Jeffreys)는 트랜스젠더리즘을 페미니즘의 존립과 정치적 목적을 훼손하는 반(反)페미니즘으로 단언한다. 그러나 에미 코야마(Emi Koyama)가 분명히 말하듯이, 트랜스젠더의 실존이 위협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젠더를 본질화하고 양극화하며 이분화하는 세계”이다(“Whose Feminism”  704). 트랜스젠더 주체성은 “여성 억압과 경험의 보편성”을 가정하며 “권력과 특권의 위치에 있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 위협적인 것이다(ibid).(56)
헤스포드의 발상은 공리처럼 굳어진 역사적 해석이 어떤 특정 집단의 편집된 기억일 수 있으며 그들의 서사 속에서 다른 집단/시각의 역사가 은폐되고 침묵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60)
할버스탬의 퀴어적 세대론은 비평적 젠더 이론들 사이의 오래된 적대적, 배제적 관계를 지양할 수 있는 인식론적 전환을 제공한다. 젠더 변이(gender variance)나 출생 시 부과된 젠더와의 불화(gender dysphoria)는 언제나 존재해 왔으며 최근의 현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든 페미니스트들은 젠더퀴어 주체나 트랜스젠더들을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으로 간주함으로써 내면화된 트랜스 혐오를 세대 격차로 은폐하곤 한다. 그러나 재생산적 시간성을 해체한다면 새로운 세대로부터의 배움과 성찰도 가능하며, “과거에 대한 대안적인 독해로부터 대안적인 미래”가 그려질 수 있다(104).(64)
주디스 로버(Judith Lorber)는 탈젠더(degendering)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젠더의 이원적 범주가 바로 여성의 불평등을 양산하는 구조라고 말한다(82).(66)
젠더 정치학의 연대는 권력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민감한 의식과 면밀한 검토를 필요로 한다.(70)
동일성에 기반한 정체성의 정치학으로부터 탈피해서 동일시의 정치학으로 연대한다면, 비평적 젠더 이론들은 더 많은 지점에서 교차하면서 자신들의 프레임과 세계를 탄력적으로 풍요롭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71)

부정기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2013년 4월 소식입니다.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2013년 4월 소식입니다.
ㄱ. 만든다는 홈페이지는 안 만들고!! ㅠㅠㅠ 죄송합니다. 5월엔 꼭.. ㅠㅠㅠ
ㄴ. 4월 1일에 새로운 연구원이 오셨습니다. 바로 케이 님입니다! 기존에 계시는 다른 분(캔디, 시우, 이브리)과 함께, 연구소에 함께 하면 좋을텐데 하는 분이었기에 무척 기뻐요. 🙂
ㄴ-1. 재밌게도, 이 분들과 함께 하면 좋겠다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어요. 신기하고 또 즐거운 일입니다. 앞으로도 이렇겠죠? 헤헤.
ㄷ. 검색서비스는 운영 중에 있고, 조금씩 서비스를 신청하는 분들의 연락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요청인과 제공자 간의 협의에 따라 진행합니다. 이런 걸 만들어가는 과정도 흥미롭네요.
ㄹ. ‘트랜스/젠더/퀴어연구소’ 소속을 명시한 글이 처음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유서 깊은 여성주의 교지에 실렸습니다. 학부시절 ‘이런 교지를 만드는 분은 참 멋있겠지’라며 좋아한 교지에 글을 실었고, 무척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나저나 파일이 없으니 기록만 남네요. (제가 작성한 파일은 있지만 출판 형식으로 디자인한 파일은 없으니까요.)
ㅁ. 연구소에 함께 하는 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분주한 나날이었습니다. 각자의 공간에서 연구를 한다거나, ‘트랜스젠더 삶의 조각보 만들기’ 프로젝트나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에 합류해서 활동을 한다거나.. 5월엔 좀 더 풍성한 소식을 전할 수 있을 듯합니다.
ㅂ. 그리고 명함이 나왔습니다!
ㅅ. 뒤늦게 한 분에겐 말했는데요.. 다른 연구원 몰래, 민홍철 의원을 규탄하는 성명서에 연구소 이름도 올렸습니다… 자발적으로 밝히지 않는다면 누구도 몰랐을 일… 앞으로 연대서명할 일이 있으면 계속 하려고요..
(의논 없이 저질러서 다른 연구원껜 죄송… 근데 미리 의논할 시간이 없..;; 근데 과연 의논 없이 친 일이 이것 뿐일까요? 후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