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 페이퍼 기간, 대선 단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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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 페이퍼 기간이라 정신이 없습니다… ㅠㅠㅠ 글은 계속 쓰고 있는데 블로깅은 할 수 없는 슬픈 상황.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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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결과와 관련해서 구글플러스에 남긴 두 개의 단상.
ㄱ.
문재인이 당선되면 관련 뉴스 찾느라 기말페이퍼를 제대로 못 쓸 텐데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부인 단계에서 참담한 심정까지…
투표에서 선택하는 기준을 다시 고민하고 있다.
무엇보다 50% 넘는 사람이 지지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다.
ㄴ.
감정은 비합리적 판단이 아니라 이 세상의 규범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하는, 매우 합리적 판단이다.
이 감정을 읽어야 하고 이 정서를 읽어야 한다.
50% 넘는 사람들이 지지하는 이 정서, 감정을 조롱하고 넘어가면 아무 것도 준비할 수 없다. 다시 5년의 시간을 벼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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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면서 ‘폭군’인 사람의 딸이 적법한 절차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기말 페이퍼 기간만 아니었다면 블로깅을 여러 편 했을 듯하네요.
많이 화나고 속상하고 암담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날을 세워야죠. 20일 아침엔 라디오를 듣는 것도 싫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라디오를 켰습니다. 더 이상 뉴스를 듣지 않느다면, 그것은 새누리당과 박근혜가 원하는 결과에 따르는 것이니까요.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성찰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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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떠도는 선거 관련 글 중에, 직종, 소득분위 등에 따른 투표율을 비교한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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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업별 득표율
*농림 임업 어민: 朴 55.2-文 37.1%
*자영업: 朴 50.2-文 37.1%
*화이트칼라: 朴 32.7-文 53.5%
*블루칼라: 朴 43.1-文 48.1%
*가정주부: 朴 55.6-文 32.3%
*학생: 朴 27.9%-文 57.7%
*무직: 朴 60.4-文 19.3%

2. 월(月) 소득별 득표율
*200만 원 이하: 朴 56.1-文 27.6%
*201만~300만 원: 朴 40.1%-文 47.6%
*301만~400만 원: 朴 43.5-文 47.3%
*401~500만 원: 朴 39.4-文 50.6%
*501만 원 이상: 朴 40.8-文 46.4%

3. 학력별 득표율
*중졸 이하: 朴 63.9-文 23.5%
*고졸 이하: 朴 52.8-文 33.1%
*대재(大在) 이상: 朴 37.4-文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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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근거로 학력 혐오, 직종 혐오가 표출되는데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FTA 반대하며 (전라도가 아닌 지역)농민이 집회를 연다면 불법집회로 신고하겠다는 글, 대구시청 게시판을 도배하고 있는 민영화(아, 선진화지 -_-;; )를 찬성하는 글(혹은 민영화는 대구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한다는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 상실감은 알겠지만 조금은 무섭습니다. 이런 감정이, 박근혜가 당선되지 않길 바라며 지향한 가치였나요? 문재인을 지지하며 가졌던 가치가 이런 혐오였다면 문재인에게 준 제 한 표가 억울합니다.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박근혜가 당선되지 않길 바랐던 건가요?
05
박정희 향수로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분석, 납득이 안 갑니다. 전봇대가 나와도 새누리당이면 뽑을 경상도라는 말도 마찬가집니다(물론 제 친척만 표본으로 삼으면 납득이 갑니다.. -_-; ).
51%에 준하는 사람들이 (통상 사유에 반대하는 개념이라고 여기는)정서와 감정으로 박근혜를 뽑았다고 이해하는 순간, 앞으로도 계속 새누리당에서 대통령이 당선될 것입니다. 정서와 감정은 매우 합리적 가치 판단입니다. 정서와 감정은 이 사회의 지배규범을 매우 예민하게 파악하는 행동입니다. 정서와 감정 만큼 지배 규범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정서와 감정이 무엇인지를 읽어야겠지요.
“무식하고 가난해서 박근혜를 뽑았다”가 아니라, 중도 혹은 진보의 가치가 왜 저학력, 저소득 계층에게 전달되지 않는지를 고민해야겠죠. 단순히 매체를 특정 집단이 독점하고 있는 문제는 아닐 겁니다.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순간, 우민화하는 결과만 초래합니다. 저학력이면 무식하다는 식의 판단, 매우 위험합니다(물론 제 블로그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이렇게 판단하지 않으리라 믿고요).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 전공인 트랜스젠더 이슈로 쓰는 글도 (때때로 젠더 이슈 전공자에게도)쉽지 않다고 평가 받는 입장에선, 할 얘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더 많은 고민을 하고 방법론을 바꾸고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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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여성’대통령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범주 논쟁이 아니라 연대의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범주 논쟁 자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범주 논쟁 좀 해도 괜찮다고 믿어요. 페미니즘의 여성 주체가 박근혜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요. 페미니즘은 본질적 존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하는 가치를 논하는 것이잖아요.
그럼에도 여성혐오와 여성단체혐오가 더 증가할 거라 걱정입니다. 이것이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입니다. 어쩌면 반-박근혜 혹은 자칭 진보연 하는 사람/집단의 여성혐오를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요.
네, 정말 많은 것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올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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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한두 줄 쓰고 끝내려고 했는데…
그럼 전 기말페이퍼가 끝나면 돌아오겠습니다. 꺄릇.

버틀러Judith Butler의 젠더수행성 쪽글

2012년 12월 5일, 수업시간에 제출한 쪽글입니다.
주디스 버틀러의 논문에 대한 쪽글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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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가 수행적 행위라는 말은 본질적 젠더 정체성이 있고 내재하는 핵심을 충분히 잘 표현하며 외화함이 아니라 반복 실천을 통해, 마치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행함이다. 젠더 범주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 행위의 효과다. 따라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젠더 범주의 의미는 형성[constitution]되고 변화한다.
물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젠더는 일종의 본질이다. 모든 사람은 당연히 여성-남성으로 태어나고 이렇게 평생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된다. 젠더를 사회적 변수로 얘기할 때 비트랜스 여성-남성만 얘기해도 충분하다고 여긴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하여 비규범적으로 젠더를 실천하는 사람은 예외 현상이다. ‘그들’을 논할 때만 언급하지 인간의 기본 범주로, 젠더 자체를 재사유할 밑절미로 인식하지 않는다. 보수 기독교를 포함하여 혐오 발화를 규범 삼는 곳의 언설은 이런 인식을 극대화한다. 트랜스젠더는 한국사회의 적법한[constitutional] 시민이 아니라 불법 ‘인간’이며 언제나 추방되어야 할 존재다. 트랜스젠더의 등장은 청소년의 젠더 정체성 형성에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트랜스젠더를 문제 삼고 혐오 폭력을 당연시 하는 사회가 아니라 트랜스젠더가 문제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익숙한 역설을 야기한다. 트랜스젠더가 청소년의 젠더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한다는 언설은 젠더 범주가 본질적 범주가 아니라 단속과 훈육을 통해서 구성[construction]하고 형성해야 할 범주란 점을 역설한다. 젠더 정체성이 정말 본질이고 불변의 범주라면 트랜스젠더의 등장이 끼치는 영향을 왜 두려워하는가? 젠더가 본질이 아님을 가장 잘 알고 있어서 끊임없이 단속하는 곳은 다름 아닌 가족과 학교다. 옷을 입는 방식부터 머리카락 길이, 걸음걸이, 자리에 앉는 방식 등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 모두 규제하고 매(혹은 규범적 폭력)와 벌점 제도를 통해 통제하는 행위는, 젠더가 본질이 아니기에 가능하다. 젠더가 정말 본질이라면 그래서 “여자(남자)는 원래 그렇다”면 이런 훈육이 왜 필요하겠는가.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아도 그냥 자연스럽게 되는 것을. 그래서 이원 젠더가 강고한 사회일 수록 젠더가 구성물임을 더 강하게 역설한다. 버틀러가 연극 무대의 트랜스베스타잇은 흥미로운 존재지만 버스 옆자리의 트랜스베스타잇은 혐오와 공포를 야기한다고 지적할 때(278), 이 혐오와 공포는 일정 부분 젠더의 형성 과정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젠더는 자연스런 본질이어야 한다고 강고하게 믿는 사회에서, 젠더의 형성 과정을 은폐해야 하는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그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과정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폭로는 규범의 취약한 구조를 직면하도록 한다. 이를 회피하고 젠더를 자연화하는 방법 중 하나가 혐오폭력이다. 하지만 혐오 폭력은 아무 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젠더와 관련해서 알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우리가 타인의 겉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타인의 젠더 범주가 아니라 기껏해야 이 사회가 규정하는 젠더 스타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타인의 젠더 범주가 아니라 타인의 젠더 실천을 해석하는 나의 인식체계를 알려 줄 뿐이다. 젠더는 역사적으로 조건짓고 제한된다는 버틀러의 언설을 확장하면, 한 인간의 일생에 걸쳐 알 수 있는 일관된 젠더는 없다. 특정 시점의 젠더 실천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전 생애의 고정된 범주로 이해하는 순간, 젠더는 또 다시 이원론으로 수렴되고 고정된 본질로 환원된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젠더 이론은 여성과 남성의 권력 관계 뿐만 아니라 여성-남성 이분법으로 인간을 환원할 때 발생하는 폭력과 억압 역시 탐문해야 한다(274). 이원 젠더에 온전히 들어맞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트랜스페미니즘 선언문: 망상

“우리가 페미니즘의 안팎에서 거부당한 경험을 공유한다고 해도 우리의 최대 동맹으로 남아 있는 이들은 페미니스트, 레즈비언, 그리고 다른 퀴어다.”

의역한 표현입니다. Emi Koyama가 쓴 “The Transfeminist Manifesto”의 한 구절이죠.
선언문답게 쉽게 쓴 글입니다만.. 어차피 영어라는.. -_-;; 나중에 번역할까봐요.
읽으면서 저도 이런 글을 한 번 쓰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번역하고 싶었습니다. 번역하면서 별로인 구절은 뜯어 고치고 좋은 구절은 더 좋게 다듬고 제 고민을 보태고 의역하면서 저자와 옮긴이가 구분되지 않는 그런 글을 만들고 싶달까요.. 사실 새로운 글을 기획하는 것이 귀찮아서 이런 상상을 했지만요. 크. ;;;;;;;;;;;;;;;;;;
트랜스페미니즘, 혹은 트랜스젠더 페미니즘 관련 글을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접점을 좀 더 정교하게 모색하려는 시도였지 선언문은 아닙니다. 선언문이라면, 선언문이란 형식과 내용이 있죠. 그것은 쉬워야 하고 또 주장이 선명해야 하죠. 그런 글을 쓰고 싶고요. 방학 때 하면 되지 않느냐 싶지만.. 이미 계획한 일도 많아..;;;;;; 계획하면 쓸 수 없습니다. 그냥 어느 순간 “삘”을 받아야죠.
그러고 보면 트랜스젠더 이슈 관련해서 처음 쓴 글이 “트랜스젠더 선언문 1/2″입니다. 읽는 사람 몇 없는 그런 글이지만요. 크. ;;; 그 시기의 치기와 고민이 담겨 있겠지요(저도 더 이상 기억이 안 나니까요;;). 제겐 중요한 글이지만 공개할 수 없는 그런 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선언문을 쓰고 싶은가 봅니다. 다른 한편으론, 트랜스젠더 이론/실천과 페미니즘의 접점을 계속해서 설명하는 것이 귀찮아서;; 글로 정리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쓴 글을 정리하는 수준일 수도 있겠지요. 아무래도 좋습니다. 제 판단에 지금 이 시점에서 “트랜스페미니즘 선언문”이 필요하단 것이죠. 무엇보다도 페미니즘 논의가 좀 더 확장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