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을 읽고 매우 기대한 영화가 별로란 걸 스크린으로 확인하자 기운이 빠졌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지하철에서 망상했다. 다음주에 모처에서 강의를 하는데 그때 가장 좋은 질문을 하시는 분에게 이제는 구할 수 없는 책,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를 선물로 드릴까란 고민을 했다.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책을 받는 사람은 떨뜨럼하겠지.
돌이켜 생각하면 필진 면면이 엄청나지. 나만 빼면. 나는 흑역사를 쌓았지만 다른 글은 대체로 다 괜찮지. 절판이라 아쉬운 책이지만 절판이어서 다행이기도 하지. 후후후. 책은 별로 안 팔렸고 재고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출판사가 출판사업을 접으면서 절판되었는데 그걸 나중에 알고 재고가 있으면 받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전달은 되었지만 받을 방도가 없겠지. 앞으로도 영영. 어떤 글은 여전히 유의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뿐이기도 하고.
아무려나 어째서인지 영화의 여파로 정말 오랜 만에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가 떠올랐다. 아마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여러 권의 자서전이 축적된 뒤에 등장한, 처음으로 트랜스젠더퀴어 논의에 집중한 이론서다(나는 그렇지 않음을 입증하고 싶다). 앞으로 또 언제 그런 책이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남성성과 젠더]나 [성의 정치 성의 권리]처럼 퀴어 페미니즘을 논하는 책은 나왔지만 트랜스젠더퀴어 이슈에 집중하는 단행본(번역본이 아니라 한국이란 맥락에서 생산한 논의)은 언제 다시 나올 수 있을까. 뭔가 기획 중이란 이야기는 언젠가 들었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지? 트랜스젠더퀴어 맥락에서 논의를 재구성하는 책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누군가가 많이 많이 써주면 좋겠다. 쪼렙인 나 따위 말고 훌륭하고 뛰어난 누군가가! 나는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살아야지. 글 쓰고 글을 읽고 아카이브 작업을 하고.
아주 못 만든 건 아니지만 기대를 부정적 의미로 배반한 영화의 여파가 크구나. 무려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를 떠올리다니.
심지어 이 글은 그냥 나오는대로 쓰고 있다. 맙소사. 하지만 공개하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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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을 쓰지 않는 이유는, 제가 오늘 악몽을 꾸다 깨어나선 잠을 계속 설쳤고 비염이 제대로 터져선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 상태에서 봤기 때문입니다. 다른 상태였다면 평가가 달랐을 수도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