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입의 정치

2015년 페미니즘의 대중화 이후 일군의 퀴어 혐오, 트랜스 혐오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집단이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교수라는 직함을 단 윤김지영도 있었는데, 윤김지영은 트랜스 혐오와 여성 범주의 본질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주장을 전개했다. SNS에서 출발하여 오프라인의 강의, 그리고 출판, 강연 영상 등으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본질주의적 페미니즘 논리를 주장했고, 이 과정에서 트랜스 혐오에 논리와 이론을 제공했다.
이제는 회고담처럼 말해지는 이 역사에서, 나는 주변의 몇몇 지인이 내게 한 말을 잊지 못한다. 언제적 혐오 논리냐, 윤김지영을 비판하는 글을 쓰는 것도 아깝다, 비판하는 글이 오히려 윤김지영을 키워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논리는 윤김지영이나 국지혜와 같은 이들이 트랜스 혐오를 전면에 내세우는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비판을 하지 않는 심정적 근거가 되었다.
그 심정적 근거를 아주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어떤 사건이나 상황, 논의에 개입할 때면 빈번하게 드는 고민이기도 하다. 괜히 반박글을 씀으로써 상대를 띄워주는 것은 아닐까. 괜히 판을 키워주는 것은 아닐까. 괜히 혐오의 논리를 정말로 이론적 논거로 승인해주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매 순간 이런 고민을 하고, 그래서 논쟁이나 사건에 개입하기를 망설인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는 적극 참여했고 어떤 상황에서는 소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어떤 상황에서는 분노하면서도 일단은 말을 삼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참여하고, 적극 발언했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지금 발생하는 사건에 개입하기. 뒤늦은 후회에도 현재에 개입하는 실천은 무척 어려운 일인데, 이와 관련한 고민은 게일 루빈의 책 『일탈』 서문에도 나와 있다. 루빈은 언제나 지금 현재에 개입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고, 루빈의 유명한 글의 상당수도 현재에 개입하며 사유를 재편성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루빈은 현재에 개입하는 학술적 실천의 어려움을 말하면서도 그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페미니즘 연구, 퀴어 연구, 트랜스젠더퀴어 연구에 참여하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라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혐오와 적대의 분위기에서 어떤 식으로 개입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수세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며, 내가 지지하거나 내가 속한 집단의 상황을 피해자화하지 않으면서,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으면서, 내가 무조건 옳다는 오만함을 내포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논의의 가능성을 생산할 것인가와 연결된 고민이다. 이분법의 선악 구도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논의의 가능성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때로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나는 요즘 쓰고 있는 논문의 서론을 완전히 갈아 엎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것은 개입하지 않는 태도가 어떤 여파를 만드는가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윤김지영이나 국지혜를 직접 언급하는 비판은 사실 별로 부담스럽지 않다. 실명 비판을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그 논쟁을 보고 배운 나는 실명 비판을 중요한 태도로 익혀 왔고 그래서 곧잘 인사를 나누던 지인도 실명으로 비판하는 글을 여럿 쓰기도 했다. 그러니 윤김지영이나 국지혜 같은 인물을 비판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문제는 이런 비판이 상대방의 판을 키워주는 태도라는 저어함이 결국 그들이 기고만장해질 수 있는 토대는 아니었는가라는 점이다.
2001년 하리수가 등장했을 때, 일군의 페미니스트는 트랜스젠더퀴어를 적대하는 글을 썼지만, 많은 페미니스트는 이와 관련해서 침묵했다. 그 시절 즈음 나와 친했던 페미니스트들은 하리수 혹은 트랜스젠더퀴어를 부정하는 논리를 설파했지만, 그 언어들이 직접 출판되어 남아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구두로만 돌았던 그 논리는 어느 순간 트랜스젠더퀴어가 인권 의제로 재편되면서 그냥 없었던 일처럼 잊혔다. 돌이켜 고민하면, 그때 적극적으로 논쟁을 히고, 논의를 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당시에 내가 들었던, 혹은 사석에서만 유통되었던 트랜스젠더퀴어를 향한 적대나 혐오 논리를 공론화시켜야 했던 것은 아닐까.
혹은 2015년 이후 새롭게 부상한 트랜스 혐오 페미니즘 논의에 더 적극 개입하고 비판하며 새로운 논의 지형을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성소수자인권포럼이니 한국여성학회의 여름캠프를 비롯하여 여러 학회와 행사에서 트랜스 혐오를 전면에 내세운 일군의 페미니스트를 비판하는 장을 마련했다. 그러니 적극적 개입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더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논의의 장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반성한다. 어떤 저어함, 망설임이 2021년 초에 잇따라 발생한 죽음의 도화선은 아니었을까.
놀랍게도 이 글을 쓴 나의 의도는 트랜스 혐오 페미니즘에 적극 개입하지 않은 나의 게으름이나 주류 페미니즘의 방임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최근 서울시는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하는 결정을 했다. 그런데 이 결정이 알려지자 민주당 지지자 중 일부는 문재인 때, 혹은 민주당 정권 때는 비판 목소리를 크게 내더니 윤석열, 오세훈 때는 조용히 있다며, 이렇게 될 줄 몰랐냐고 고소하다는 반응을 드러냈다. 저런 반응은 일일이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총체적 난국이다. 그 중 하나만 짚는다면, ‘이렇게 될 줄 몰랐냐’라는 반응은 현재의 폭압적 정치를 정당화하고 승인하는 태도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왜 너희들은 더 적극적으로 낙선운동이나 반대 운동을 하지 않았느냐고 비판할 수 있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식의 태도는 패배주의적 태도, 현재의 문제를 당연시하는 태도라는 점에서 현 정권의 행태에 적극 공모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렇게 될 줄 몰랐냐’라는 말은 현 상황에 비판하는 위치에 있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나는 정확하게 지금 이 상황에 개입하는 말을 보태고 싶었다. 요즘 들어 자주하는 고민은, 예를 들어 노동조합에 가장 적대적인 정권은 윤석열과 같은 극우 정권 아니라 민주당과 같은 중도보수 정권일 때라는 점이다. 윤석열을 비롯한 국민의힘 계열 정권은 노동조합을 노골적으로 탄압한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일 때는 노골적으로 탄압하지는 않는 모양새를 취한다. 이런 점에서는 민주당이 더 문제라는 지적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민주당 지지자는 노동조합을 비롯해서 인권 단체, 시민 단체 등 시위와 항의, 저항하는 모든 세력을 적대한다. 그래서 민주당 정권일 때 민주당 지지자들이 많이 모이는 게시판이나 댓글에는 노조, 민주노총, 시민단체, 여성단체, 페미니즘 단체, 성소수자 단체를 향한 적대와 혐오가 넘쳐난다. 하지만 국민의힘 계열이 집권을 하면, 이들의 항의와 시위는 매우 정당하고 소중한 행동이 된다. 그리고 정확하게 이런 태도가, 서울퀴어문화축제를 향한 서울시의 횡포를 두고 민주당 지지자 중 일부가 서울퀴어문화축제를 비난하는 태도의 근거라고 고민한다.
이런 이유로 현재의 정치, 지금의 논쟁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논의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저것들은 비판할 가치도 없다는 식의 태도가 ‘저것들’을 기고만장하게 만들고 커다란 세력으로 만든다. 지금 현재에 개입하지 않는 태도는 결국 간접적으로라도 ‘저것들’을 지지하는 행동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50H50 칼럼]

SNS시대에 라디오 듣기

나는 자주 나를 라디오키즈라고 고민한다. 이 구절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잘 없지만(사실 뜬금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말은 내 삶의 일부를 잘 포착한다.
물론 나는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노래가 등장한 이후 이 세상에 출고되었다. MTV의 세대, TV 매체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세상에 출고되었으니 TV 매체에 더 많이 노출되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라디오를 더 많이 들었는데, 마침 어릴 때부터 집에 라디오가 있었고 혈연가족의 다른 이들은 모두 TV를 선호했기에 라디오는 내가 독점할 수 있는 매체이자 기기이기도 했다. 집에 있으면 종일 라디오를 켜두었고, 시험공부를 할 때도, 수험 공부를 할 때도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를 좋아한 이들은 알겠지만 과거에 라디오는 시간에 종속된 매체이자 휘발성이 강한 매체였다. 한 번 흘러간 사연은 다시 나오지 않았고, 이미 지나간 시간을 다시 잡기는 어려웠다. 노래를 듣고 나서야 그 노래가 맘에 들 때, 가수도 제목도 알기 어려웠다. 그러니 언제나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 했고 그것은 늘 실패와 미완성, 혹은 불완전을 동반했다.
그럼에도 나는 라디오를 계속 들었다. 라디오 헤븐. 이문세가 사연을 보낸 청취자를 힐난하는 소리를 들었고, 창원MBC인지 마산MBC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수 하림이 속했던 그룹 벤이 출연해서는 이번에는 꼭 성공하겠다고 춤도 추기로 했다고 다짐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에세이라는 그룹의 안단테라는 곡을 들려준 유희열은 노래 속도가 안단테가 아니라며 불만을 표하는 멘트를 했었다. 물론 다 휘발된 기억이다. 벤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하림은 군대에 갔고 이후 인생은 이미 너무 유명하니… 주파수를 바꿔가며 라디오를 들었던 삶.
서울에서 처음 혼자 살기 시작했던 시절, 라디오는 인테리어의 일부이자 공기의 일부였다. 특정 음악을 들을 때만 제외하면 나는 항상 라디오를 켜두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잠에서 깼고, 나른한 사연을 들으며 오후의 소금처럼 뜨거운 태양을 견뎠고, 늦은 밤이 조금은 덜 쓸쓸하고 덜 우울할 수 있었다. 시선집중이 시작되었을 때는, 라디오를 듣기 위해 일부러 아침 6시에 깨었고 손석희와 김종배의 만담에 낄낄거렸다. 정선희의 목소리가 유쾌했으며(하리수를 향한 친밀한 혐오 농담도 들었고), 양희은의 목소리는 언제나 체제에 가장 순응적이라는 착각을 일으키면서도 틈새를 만드는 방식을 고민하게 했다. 그렇다. 라디오는 시간에 종속되어 있으며 시간은 목소리라는 형태로 흘러갔으며, 목소리처럼 휘발되어 포착되기 어려웠다. 라디오는 휘발되는 소리라는 것이 주는 위로.
SNS를 하지 않는다. 트위터가 한국에서 이제 막 유행하던 시기에 들어갔다가,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기 직전에 탈출했고 구글플러스를 한동안 사용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SNS는 내가 오래 머문 적 없지만 언제나 관심이 많은 매체에 가깝다. 주변에 SNS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고, 이제 SNS는 단체 행사 소식, 사건사고 소식, 논쟁, 현재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논의가 진행되는 곳이기에 SNS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이 세상, 혹은 내가 주로 참여하는 사회와 거리를 두겠다는 태도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늘 SNS를 사용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니 SNS와 관련한 고민은 나의 고민보다는 타인의 고민에서 배우는 것에 더 가까운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내가 만든 세상이었다. 나의 타임라인에 흘러가는 논의는 내가 만든 세상이며, 본계의 경우에는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일 때도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자조적으로 타임라인만 보면 녹색당과 정의당이 200석이고 민주당이 좀 있고, 국민의힘은 아예 없거나 거의 없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혐오가 없는 세상이며, 혹은 혐오에 가장 민감하고 예민한 세상이며 그래서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SNS를 자주하는 사람들 중에서 SNS를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또 만나지 못했다. SNS가 유용하다는 말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만, 새로운 정보를 접하기에 유용하고 홍보하기에도 유용하지만… 내가 만든 타임라인의 세상이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인가. 왜 내가 구축한 세상이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은 아닌가라는 질문은 더 많은 고민을 남긴다.
내가 만든 세상이라는 말은 나의 관심사로만 구축된 세상이라는 뜻인데, 나의 관심사로만 구축된 세상이 과연 좋은 세상일까? SNS는 안 하지만 유튜브는 종일 들으니 관심사로 구축된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 라디오에 나온 한 심리학자가 말해준 내용을 늘 떠올린다. 유튜브 홈 화면에 한두 가지 주제만 나온다면 그 삶을 다시 되돌아봐야 한다고… 관심 주제가 한두 가지로 국한된다면 심리학적으로 건강한 상태는 아니라고. 관심사를 많이 넓히고 새로운 정보, 새로운 의견, 새로운 소식에 자신을 열어 둬야 한다고…
SNS 시대에 라디오 듣기.
이것은 유튜브 시대에 가장 각광받는 매체가 라디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인화된 정보, 개인화된 화면, 개인화된 검색 결과… SNS 시대라는 말의 핵심은 단순히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와 같은 특정 SNS를 사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것이 개인화되고, 개인의 관심으로만 구축된 세상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 그리하여 낯설고 관심 없는 타인의 목소리가 기입될 여지가 없는 세상.
그래서 나는 매일 반드시 라디오를 듣는다. 사실 이것은 선후 관계가 바뀐 표현이다. 나는 라디오를 들었고, 지금은 유튜브로 라디오를 듣는다(하지만 나는 유튜브를 듣는다고 표현하기보다 라디오를 듣는다고 더 많이 표현한다). 한때 라디오는 시간에 종속된 휘발적 매체였기에 동시간대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은 한 가지 뿐이었지만, 유튜브 시대에 다시 듣기를 할 수 있게 변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두 번 오늘의 날씨 정보와 아침 7시 즈음의 교통 정보를 듣는다. 아침 라디오 방송을 두 개 정도는 듣는다는 뜻이다. 처음엔 그냥 내가 좋아하는 매체여서 유튜브로 라디오를 듣지만, 이제는 삶의 중요한 일상이자 정치적 실천으로서 라디오를 듣는다.
공중파 방송은 내가 구축한 세상이 아니며, 청취자와 빈번하게 피드백을 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PD와 작가와 진행자가 조직한 내용으로 구축한 세상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내가 관심이 많은 주제를 들려주기도 하지만(예를 들어, 시선집중은 매주 금요일마다 10.29 참사 유족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어 유족과 고인의 구체적 삶을 배울 수 있다) 내가 결코 찾아듣지 않을 집단의 의견도 들려준다. 그 세상은 내가 관심 있는 주제부터 관심이 없는 주제를 모두 모아 들려주는 세상이며, 나의 핵심 관심사는 드물게 가끔씩 들려주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라디오를 듣는다. 아무리 바빠 오전에 라디오를 들을 수 없다면 잠들기 전에라도 듣는다. 내가 구축하지 않은 세상. 내가 관심이 있는 주제는 구글 뉴스 검색을 통해 일부러 찾는다(구글은 RSS 리더를 다시 살려내라!!!).
유튜브보다 책이 더 낫다는 식의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데 이미 지식의 유통 방식이 변한 시대에 유튜브나 SNS의 속도, 유통 방식을 폄하하는 발언은 오히려 새로운 세상을 거부하려는 태도처럼 읽히기도 한다. 물론 지금 이 발언도 위험하다. 그냥 다 활용하면 되는데 이것보다 저것이 더 낫다는 식의 발언에 동의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사실 나는 SNS를 사용하지 않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은 SNS로 구축한 세상보다 더 좁고 좁계 구축된 세상이기도 하다. 사실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나는 라디오를 좋아한다 한 마디 뿐이다. 그 말을 이렇게 뻥튀기할 필요가 있나 싶게 쓰고 있지만, 아무려나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