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명 중 한 명?

계속 드는 의문. ‘열 명 중 한 명은 성적소수자다’라는 구절을 운동 전략으로 계속 사용해도 괜찮을까? 단순한 수사라고 해도 이것은 유용한 전략이 아니라 부적절한 전략 아닐까?
우선 열 명 중 한 명인지는 아무도 모르잖은가? 더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고. 인구구성 비율의 10%라는 건 구체적 수치라기보다 상징적 수치인데, 그럼에도 이것은 많은 경우 문자그대로 받아들여지고, 그리하여 열 명 중 한 명이니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도 많다. 또한 성적 소수자의 소수자란 용어와 결합되면서 권력의 의미는 희석되고 숫자의 의미만 남는다.
더 중요한 건 이런 수사는 이성애와 비이성애,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확고하게 구분하는 언설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나와는 다른 어떤 성적소수자가 있다’는 사유를 강화한다. 그리하여 권력 자체, 이성애나 비트랜스젠더 자체를 문제 삼지 못 하고 비이성애, 트랜스젠더만 문제 삼도록 한다. 운동을 통해 그토록 문제삼으려는 이성애-비트랜스젠더 범주는 견고하게 남는다.
사실 굳이 이렇게 블로깅을 하지 않아도 ‘열 명 중 한 명’이란 구절이 갖는 문제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왜 이런 수사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일까? 다른 문구를 새로 만들지 않는 것일까? 이것이 이성애-비트랜스젠더 집단에게 쉽게 통용되는 언설이라고 해서 우리가 늘 그 언설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때때로 그런 언설에 문제제기하며 운동을 하고 논의를 전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열 명 중 한 명’ 이란 수사는 반복하는 것일까? 아무리 마포구청의 행태가 있다고 해도, 그것과 별도로 이 구절을 둘러싼 논의와 검토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꽁알꽁알꽁알…

성적소수자/LGBT/퀴어와 산부인과의사의 만남, 후기

지난 화요일,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에서 성적소수자와 대한임상산부인과학회가 만나는 워크숍이 있었다( https://www.runtoruin.com/2172 ). 지난 4월 성형외과 의사를 만난 것과 연장 선상에 있는 일이기도 하다.
상세한 이야기는 E님의 블로그를 참고하시고…
애초 기획은 성적소수자/LGBT/퀴어가 산부인과를 이용할 때 혹은 이용하려고 할 때 겪는 어려움을 먼저 나누고 이후에 의사와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의사들과 함께 얘기를 진행했는데…
흥미로운 것 몇 가지.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산부인과 의사의 감수성에 놀랐다. 일단 의사 자신의 구술이란 점을 염두에 둬야겠지만 mtf/트랜스여성이라면 당연히 산부인과를 사용해야 한다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한 점이다. 산부인과를 찾는 mtf/트랜스여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얘기함이 아니라 mtf/트랜스여성이라면 산부인과를 찾아야 한다는 건, 접근 방향/방법 자체가 다르다. 이것이 이태원이란 지역 근처에 있으면서, 많은 mtf/트랜스여성을 만났기에 발생한 감수성일까 싶었다. 그저 한두 명의 mtf/트랜스여성을 만나서 갖는 감수성이 아니라 그냥 동네주민을 만나는 어떤 감수성이었다. 혹은 그냥 돈벌이 상대로서 환자가 아니라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환자를 대하는 느낌이기도 했고. 물론 이것은 의사가 직접 표현한 부분이라 걸러들을 부분이지만, 다른 병원의 의사와는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다.
김원회라고 “성과학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을 처음 알았고 분노했다. 부들부들. 이를테면, 성적소수자란 말은 사용하면 안 되고 LGBT를 사용해야 한다, LGBT는 다양한 성적 소수자 중 정신병이 아니라고 승인된 범주다 운운. 의료적 조치를 하지 않은 ftm에게 김원회는 근래 폴리섹슈얼이 등장하면서 굳이 수술을 할 필요 없고 자기 몸을 긍정하면 된다 운운. 이 양반[그의 오만한 말을 들으며 나는 그를 존중하지 않기로 했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LGBT가 승인된/적법한 범주라면 난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다른 범주로 나를 설명하겠다. 아울러 폴리섹슈얼이건 폴리젠더건 섹스/젠더의 다양성은 의사가 트랜스젠더에게 하라고 나온 인식론적 전환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비트랜스여성 아니면 비트랜스남성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존재는 둘 중 하나로 사라져야 한다는 사회적/의학적 강박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사유다. 그런데 이런 맥락을 다 지우고 마구잡이로 들이대는 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걸까? 김원회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성과학의 대가인지 궁금했다. 무엇이 대가란 말인가? 이상하게 떠들어도 혼자 떠들면 대가가 되는 것인가?
고객/환자가 의사를 찾을 때 어떤 경험을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는 지적이 다양한 방식으로 있었다. 이에 발언한 거의 모든 의사가 천편일률, “당당하게 의사에게 말하면 된다”고 했다. LGBT운동의 자긍심은 어찌하며 의사가 LGBT에게 권하는 조언이 되었나… -_-;;; 의사의 권력과 권위, 이성애-비트랜스젠더의 특권적 위치 등을 조금도 고민하지 않으면서 관용하겠다는 가장 흔한 방법이라 날선 언어로 비판할 수도 있었다. 기존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관용만 베풀겠다는 인식에 도전하지 않고 있어 참기 힘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선 다들 그냥 넘어갔다. 다른 자리였으면 비판적으로 논했겠지만 그날 행사가 좀 그랬다. 물론 자리가 끝나고 아는 사람들끼리만 있을 때 ‘당당하게’는 여러 번 희화화되었다.
놀라움과 아쉬움, 짜증이 교차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만나는 자리가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다. 이렇게 만날 자리를 또 언제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단발적 만남이 아니라 지속적 만남이 중요하다. 또 다른 자리를 기대한다.

mtf 트랜스젠더의 수염

언젠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도 상영한 적 있는 <마법의 성별>Juggling Gender(저글링 젠더, http://goo.gl/82FmG )엔 수염난 여성, 제니퍼 밀러(Jennifer Miller, http://goo.gl/ggRgR )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구글링하면 이미지를 바로 찾을 수 있다.) 학부 수업 때 이 영화를 소개받았는데, 그 수업에선 젠더를 저글링하는 것, 젠더를 수행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하여 젠더란 몸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구성이란 지적을 했다.
기본적으로 수염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남성성과 밀접하고 특히 권력과 밀접하다. 남성의 수염(혹은 털)은 권력이나 권위 등을 상징하고 여성의 털은 수치심을 상징한다는 말은, 적어도 이곳에 오는 분들에겐 익숙할 듯하다. 그래서 여성에게 허용되는 털은 머리카락 정도고 남성에겐 거의 모든 털이 공공에 노출되어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털 혹은 수염과 남성성의 관계는 몸의 생물학적 작용이지만 사회적 의미가 가장 노골적이고 흔하게 전시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수업 시간에 <마법의 성별>를 소개한 선생님은 다른 시간에, 다음의 숙제를 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잘 때까지 여성성 혹은 남성성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꼼꼼하게 다 적어서 내라는 것.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젠더화된 삶을 살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를 위한 예시로 ‘남성이라면 아침에 면도를 할 것이고’라고 말했다. 이 찰나, 나는 잠시 두려움을 느꼈다. 면도를 하는 사람은 남성인가? 이런 식의 예시가 <마법의 성별>과 충돌하는데 왜 그 찰나를 포착 못 하는 걸까? 그럼에도 나는 한동안, 아니 여전히 수염을 남성성으로 해석하는 관념에 자유롭진 않다.
물론 수염과 남성/남성성이 밀접하기에 관련 코드로 유머를 만들기도 한다. 이를 테면 얼마 전에 본 <뮤지컬 드랙퀸>엔, 드랙퀸 지화자가 대기실에서 면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대체로 여성의 몸에 나는 일상적 수염으로 독해되기보다 트랜스여성의 ‘남성 생물학의 흔적’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독해된다. 혹은 여성의 몸에 나는 수염이라고 해도 숨겨야 할 것이기에 재빨리 깎아야 하는 것이거나. 물론 나는 이런 식의 장면을 사랑하는데, 내겐 이 장면이 일종의 해학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삶이기도 해서, 낄낄 웃는다.
수염과 남성/남성성의 관계와 관련해서 계속 질문하는 건, 수염이 나고 면도를 하는 행위는 남성의 어떤 성적 특질, 문화적 실천을 수행함이가란 질문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이슈는 언제나 글을 통해서만, 아니 글에서도 에둘러서 말하지만 나로선 가장 스트레스 받는 주제기도 하다. 해학이면서 스트레스다.
영화 <마법의 성별>를 봤을 때, 해당 수업 선생님은 젠더 수행성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런 부분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는 게 수행인데 뭘 새삼스럽게.. 그보다 밀러가, 나는 여성이어서 수염이 난다,고 말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자칫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읽힐 수도 있겠지만 이 말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내게 이 말은, 기존의 관념 자체를 다시 독해하도록 하는 발언이다. 여성이어서 수염이 난다. 그것도 잔수염이 나는 게 아니라 덥수룩하게 난다. 이럴 때 면도하는 행위, 수염의 의미를 남성과 붙여서 설명할 수 있을까? 면도와 수염이 아무리 비트랜스남성이 압도적으로 겪는 일이라고 해도(정말 압도적 비율의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의미를 단순하게 붙이는 것은 곤란하지 않나…
(골드키위새 작가의 <우리집 새새끼> 초반에 작가가 수염난 모습을 보여줘서, 댓글에 작가의 성별을 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대해 작가는 여성도 수염 나는 것 아니냐고 당황한듯 혹은 능청스럽게 되물었다. 매력적인 순간이다.)
<마법의 성별>를 처음 본 게 2000년대 중반이다. 그 이후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는 그 영화의 주인공 밀러처럼 수염을 기르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떤 사람에겐 남성의 수염으로 독해되겠지만 내겐 mtf 트랜스젠더의 수염이고 그리하여 다른 정치적 의미를, 혹은 다른 어떤 가능성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아니 정치적 의미 같은 건 나중 문제고 그냥 수염으로 어떤 장난을 치고 싶다는 바람을 품곤 한다. 이것을 내가 실현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호르몬투여를 한다면, 그땐 수염을 기르고 돌아다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이제, 이런 실천은 나 혼자의 독단적 판단으로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해봐도 재밌겠다는 어떤 상상.
아무려나 나는 태어날 때 남성으로 지정받아서 수염 흔적이 있는 게 아니다. mtf 트랜스젠더라서 수염 흔적이 있다(당연하게, 모든 mtf/트랜스여성에게 수염 흔적이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의 수염 흔적은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흔적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