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혐오 폭력과 이성애 구성 강의안


수업은 아직 한 번 더 남았지만 기말페이퍼를 제출했으니.. 드디어 방학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일정의 시작이다. 그 전에 6월 말까지는 좀 느긋하게 지내야지. 히히. 7월부턴 또 빠듯하겠지만.
어제 저녁부터 방학이지만 20일까지는 여전히 일정이 빠듯하다. 뭐, 언제는 안 그랬냐고.. 흐흐.
혐오 폭력과 이성애 범주의 구성으로 강의해드립니다.. 불러만 주셔요… oTL.. 흐흐흐
기말페이퍼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트랜스혐오, 젠더혐오, 퀴어혐오와 이에 따른 폭력이 단순히 피해경험자의 젠더 실천을 규제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이성애-이원 젠더 범주를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내용입니다. 당장 글로 출판할 계획은 없습니다. 좀 묵히려고요(라기보단 나중에 뭔가를 급하게 써야 할 때를 위해 쟁여두.. 아. 아닙니다;; ). 대신 강의를 할 수 있다면 이 주제로 강의를 하면서 고민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요.
트랜스젠더란, 동성애란..과 같이 기초 강의 말고 이성애 범주를 탐문하는 강의가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속에서 이성애 범주 형성과 퀴어 범주 규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궁금하신 분들, 망설이지 말고 불러주세요.. 굽신굽신…

잡담: 규범, 공부, 결과, 글

규범을 균열 내는 건 어렵다. 그렇다고 규범에 내재하는 균열을 놓치는 건 곤란하다. 규범은 솔기 없이 단단한 것이 아니라 허술한 형태다. 규범은 혼종이다. 그래서 규범의 균열을 읽는 작업이 중요하다. 적어도 내겐 이런 작업이 내 삶에 숨통을 틔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알바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택배가 와 있었다. 주문한 게 없는데? 이런저런 생활비에 돈 나갈 일이 많아 책 지름을 못 하고 있다. 그리하여 택배를 받을 일이 거의 없다. 최근 무언가를 주문한 일도 없고. 그런데 뭐지? 주소를 확인하니 출판사였다. 4월 말 주로 지하철에서 쓴 원고가 이제 출판되었나보다. 소리 소문 없이 글이 나온 느낌이다. 글을 쓸 때만 해도 언제 나오나 싶었는데 나오고 보니 나오긴 나오는구나 싶다. 아울러 글을 쓸 당시만 해도 6월이 언제 오나 했는데 벌써 6월 중순이다. 오늘 오후에 하나 마무리하고 이제 한두 편만 더 쓰면 상반기 마감이다. (4월부터 6월까지 총 6편이라고 했는데… 7~8으로 수정해야.. ;ㅅ; 1월부터 기준으로 하면 오늘까지 8편을 썼구나.. 끄응…)
암튼 이렇게 잡지에 출판된 글을 보니, 그래도 좀 뿌듯하다. 그동안 뭔가 하긴 했는데 그 형태가 안 보여서 ‘나 지금 뭐하고 있나’싶을 때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계속 바쁜 일상인데 그 결과는 확인할 수 없는 시간. 특히 글을 썼으면 지금까지 쓴 글 목록에 등록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그냥 빈둥거리며 논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바쁘다고 흰소리만 한 것 같고. 그래서인지 책의 형태로 글이 나오니 조금은 뿌듯하다. 얼마나 잘 썼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어쨌거나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 좋다. 뭐, 이 정도의 자기만족이라도 있어야지… ;;;
그러고 보니 지난 6월 8일에 또 다른 글이 하나 출간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왜 소식이 없지? 2월 경 급하게 마무리한 글인데…;;; 물론 글 자체는 초고부터 완성까지 거의 10달 걸렸지만…
뭔가 계속 생산하고 있는데, 생산만 하고 있으니 깊이는 없고 다들 얄팍하구나.. 훌쩍..
과거 어떤 학자는 10년에 한 편, 책을 냈다. 근데 가만 고민하면 10년에 한 편이 아니라 10년에 걸쳐 한 권의 책을 쓴 것이다. 둘은 전혀 다른 작업이다. 나도 그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지금처럼 돌려막는 느낌으로 쓰지 않고 좀 진득하게 작업할 수 있을까? 역시나 박사학위 논문이 유일한 희망일까… 아아…
그래도 지금 상황은 내게 과분한 복이다. 지금 상황이 고마울 따름이다. 글을 요청하는 곳이 있고 읽어주는 분이 계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가가 젠더, 할버스탐

수업 쪽글입니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얘기를 정확하게 요약하는 것이 쪽글의 의도라 그렇게 적었습니다만… 할버스탐Judith Halberstam의 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뭐..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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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할버스탐(J. Jack Halberstam)의 글은 기술적 재생산 시대에 양육의 젠더 규범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몇 년 전 오프라 윈프리 쇼에 등장한 임신한 남성 토마스 비티(Thomas Beatie)로 논의를 시작하는 할버스탐은 양육에서, 모성과 부성에서 젠더 질서[gender order]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어떤 다른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지를 탐문한다.

ftm/트랜스남성인 토마스 비티는 파트너와의 협의 하에 자신이 직접 임신했고 이 사실을 인기방송에 공개하면서 ‘세계 최초 임신한 남성’이란 타이틀을 획득했다. 하지만 그 전에도 ftm/트랜스남성의 임신은 공공연했다. 또한 여성만이 임신을 하지 않음 혹은 젠더와 임신 및 출산의 분리 관련 논의는 제2 물결 페미니즘의 초기부터 진행되었다. 1970년대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은 여성억압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임신과 출산을 여성이 전담하는데 있다고 해석하며 기술을 통해 여성이 더 이상 재생산을 하지 않는다면 여성은 해방될 것이라고 주장했다(Halberstam, 33-37). 비록 당시엔 이것이 말이 안 되는 얘기 같았지만 IVF, 인공수정, 남성의 임신 및 출산이 가능한 지금 시대에 임신과 출산은 더 이상 여성에게 배타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면 여성에게 부여하는 젠더 규범 역시 희미해지고 있는가? 할버스탐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데, “기술이 진전한다고 해도 양육에 부과된 이데올로기는 이전과 같은 상태로 남아 있다”(37)는 점 때문이다. 즉 사라질 것 같은 이원 젠더 구분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37).
임신과 출산 기술의 발달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젠더 규범은 2000년대 이후 미국에서 방영된 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The Switch, The Full Monty, Roger Dodger, Big Love, The Kids Are All Right와 같은 작품은 남성은 쓸모없는 존재거나 남성 파트너 없이 임신하고 출산하는 여성의 삶을 다루면서 ‘남성의 종식(終熄)’으로 해석될 여지를 제공했다. 이것은 ‘남성성의 위기’라고 불리는 시대, 후기산업사회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고용되는 시대에 징후와도 같았다. 몇몇 언론은 “남성의 종식”(46)이란 제목을 직접 사용했다. 하지만 이들 작품에서 레즈비언인 여성은 결국 남성과의 밀접한 관계로 마무리되거나, 레즈비언의 성애적 관계는 묘사되지 않고 이야기되지만 이성애 남성의 성애적 관계는 이야기되기보다 묘사된다(56). 남성 없는 임신과 양육이나 ‘대안적’ 가족 이야기에 레즈비언 관계는 여전히 부재한다.
뿐만 아니라 싱글맘가족, 여성가장가족 등 남성이 부재하는 현상은, 후기산업사회의 특화된 현상이 아니라 비백인 집단에겐 과거에도 만연한 현상이었다. 따라서 “남성의 종식”과 같은 언설은 백인만을 염두에 둔 언설이며, 비백인을 함께 고민한다면 전혀 다른 식으로 논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다(50).
그렇다면 가족구성에서, 양육 실천에서 다른 가능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할버스탐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예시한다. 부치-펨 관계는 젠더의 임의성 속에서, 가부장제와 강제적 이성애 없이 권위와 젠더 구분을 가르칠 수 있다(58). 그리하여 젠더를 존재가 아니라 행위로 이해하도록 할 수 있다(58). 뿐만 아니라 학부모 행사에서 부치의 행동은 다른 남성의 행동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59).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 역시 가족 관계에서도 다른 가능성을 원한다. 그럼에도 강제적 이성애는, 불완전하고 흠이 많은 이성애를 유일한 가능성, 유일한 젠더 역할, 규범적 양육 방식으로 인식하도록 할 뿐이다(61). 그러니 충분히 매력적인 다른 양육 실천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