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기록물 읽기: 트랜스젠더 흔적 추적

1993년에 책으로 출간된 기록물을 하나 읽었다. 트랜스젠더를 게이라고 표현한 기록물이다. 처음 공개되었을 때 서울 지역 동성애자에게, 특히 남성동성애자 게이에게 그 내용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그 기록물이 처음 공개된 후, 그 당시 십대였던 게이는 학교에서 “너도 나중에 성전환수술을 할 거니?”란 얘기를 들었다고 하니까. 이 기록물은 게이와 트랜스젠더를 구분 못 한 시절의 기록물로만 평가받고 있다. 혹은 게이를 트랜스젠더로 오인하던 시절의 역사를 드러내는 기록물로만 언급되고 있다. 나 역시 막연하게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다.비트랜스-게이 혹은 비트랜스-동성애자의 맥락에선 적절한 비평이지만 트랜스젠더 맥락에선 달리 해석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이를 간과한 건 나의 어리석음과 게으름 때문이다.
이번에 그 기록물을 읽으며,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도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주류미디어의 첫 작품이란 점을 감안하면, 놀랍다고 밖에 달리 평가할 말이 없다. 비록 불쌍한 존재로 다루고 있다고 해도 트랜스젠더가 겪는 다양한 어려움을 나쁘지 않게 다루고 있다. 트랜스젠더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수렴될.때에도 사회구조적 의제로 전환해야 함을 놓치지도 않는다. 좋은 건 아니라고 해도 시대적 정황을 고려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2007년인가, 트랜스젠더 혹은 인간의 젠더는 뇌의 형태로 결정된다고 설명한 TV 방송보다는 백 배 낫다.) 1990년대는 지금보다 더딘, 덜 발달한 시대란 뜻이 아니다.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논의가 지금과 같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무성애자 트랜스젠더를 논하고 있다. 인터뷰에선 이성애자되기를 주로 얘기하지만 설명하는 부분에선 이성애자로 한정하지 않는다. 길진 않지만 트랜스젠더가 반드시 수술을 욕망하는 건 아니란 점도 언급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좋게 평가할 만하다.
흥미로운 건 용어사용에 있다. 이 기록물은, 지금은 트랜스젠더로 불리는 존재를 일괄 게이로 기록한다. 그 시대적 언어사용법처럼 게이와 호모로 구분한다. 재밌는 건 기록물의 집필자가 게이와 호모의 사전적 의미를 꽤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트랜스섹슈얼리즘, 성전환과 같은 용어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 이후에 지금은 트랜스젠더로 불리는 존재를 게이란 말로 기록한다. 이것은 기록물 제작자의 오판이었을까? 실수였을까? 부족한 이해의 징표일까? 난 이것이 매우 적절한 판단이라고 여긴다.
예를 들어 지금으로부터 21년 뒤에 젠더퀴어란 용어가 널리 쓰이고 트랜스젠더란 용어는 과거 유물이 된다고 치자. 아니, 트랜스젠더는 잘못된 표현이었다는 비판과 함께 폐기된다고 치자. 그럴 때 2034넌을 살고 있는 어느 이론가가 2013년에 생산된 일련의 기록물에서 트랜스젠더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어리석은 판단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13년에도 소수의 사람들에게 젠더퀴어란 용어가 쓰이고 있었음에도 적극 채용하지 않은 것을 두고 어리석음 혹은 무지로 제단하는 것이 가당할까?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트랜스젠더는 공동체에서, 대중문화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용어다. 때때로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적극 차용하고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용어기도 하다.
1990년대 초반의 게이와 호모 역시 비슷하다고 평가할 순 없을까? 호모란 용어는 차치하더라도, 현재의 트랜스젠더를 지칭하며 게이란 용어를 사용한 건 그 당시 맥락에선 최선이었으리라. 공동체 혹은 소위 당사자라고 분류하는 이들이 자신을 게이라고 분류하는데 타인이 다른 용어를 적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 다른 용어를 적용하는 건 지식권력의 행사일 수 있다. 이것은 ‘당사자’의 본질적 권력때문이 아니라 범주 명명의 지식 권력을 누가 행사하는가의 이슈다. 누가 무슨 근거로 범주 명명의 옳고 그름을 규정할 수 있는가. ‘그 명명은 틀렸고 이 명명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게이-호모
트랜스젠더-게이
용어 사용의 변천은 잘못된 용법이 제대로 된 용어로 교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 시대적 맥락에 따라 변한 것 뿐이다. 그럼 어떤 맥락이 있었을까? 난 지금까지, LGBT 운동의 성과만 언급했는데 단지 운동의 성과라고만 해석해도 괜찮을까? 어떤 다른 변화는 없었을까? 용어의 변화는 순식간이지만 단순히 특정 집단만의 노력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누가 이 맥락을 연구하면 좋겠다.
…라고 적어봐야 누구도 안 할 거 안다. 정말 누군가가 한다면 기꺼이 사… 사… 사ㄹ.. 사탕을 드릴게요.. ;;; 정말 누군가가 연구하면 상당히 재밌을 텐데… 결국 내가 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슬플 것 같아.
덧븥이면 <캠프 트랜스> 후속 작업으로 1990년대 이태원의 역사를 읽고 싶다. 1989년으로 끝냈을 때부터 1990년대는 따로 다룰 계획이었다. 현재는 잠정 중단되었지만 관련 기록물은 꾸준히 모으고 있고. 하지만 반드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훌륭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고작 저랑 비교해서 죄송합니다ㅠㅠ) 아울러 비슷한 주제를 여러 사람이 각자의 맥락에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면 더 재밌는 일이고! 그래서 누군가가 작업하면 좋겠다.

입는 컴퓨터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자동차의 빵빵거리는 크락션은 두 가지 전제에서 출발한다: 사람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혹은 사람에겐 어떤 경고음을 들을 의지가 있다. 첫 번째 전제는 청각장애인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특히 문제고, 두 번째 전제는 현대 시대와 맞지 않아서 문제다. 두 번째 전제에 초점을 맞출 때, 갈 수록 많은 이들이 경고음을 들을 의지가 없거나 자발적으로 차단한다. 이를테면 나는 길을 걸으며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걷는데, 이런 이유로 여러 번 교통사고를 겪을 뻔했다. 이어폰을 낄때 비로소 개인이 되는 내게 크락션의 경고음은 의미 있는 소통체계가 아니다. 이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니리라. 외국에선 이어폰에서 출력할 수 있는 볼륨을 제한한다는 말도 있고, 청소년의 청력을 걱정하는 소리도 있다. 소리가 더 이상 의미 있는 경고체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이 지점에서 구글 등이 개발하고 있는 무인자동차, 구글글래스 같이 착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그 기능을 발휘하겠지. 자동차는 인공위성과 통신하며 주변의 모든 변수를 염두에 두고 움직일 것이고 몸에 착용한 컴퓨터 역시 장기적으로 인공위성과 통신하며 사고 가능성을 끊임없이 점검하겠지. 그래서 OS가 같건 다르건 상관없이 호환성이 매우 중요하겠지. 몸에 입는 컴퓨터가 사고를 예방하는 방식은, OS 기반이어선 안 될 테고. 이를 테면 구글무인자동차에 장착할 OS는 구글글래스 및 안드로이드폰과만 호환하고 iOS와 호환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쓸모가 없을 테니까. 앱이건 웹이건 내가 모르는 다른 무엇이건 호환성이 가장 중요하겠지.
아울러 경고의 핵심은 자동차를 제어하는데 있지 사람을 제어하는데 있진 않겠지. 길은 보행자 중심이어야지 자동차 중심이어선 안 된다. 즉, 자동차가 지나가기 때문에 사람이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지나가기 때문에 자동차가 멈춰서야 한다. 그러니 무인자동차가 속도를 줄이거나 급정거하는 식이겠지. 이럴 때 운전자를 보호할 방안도 물론 필요하고.
(나는 청각 중심으로 얘기했지만 입는 컴퓨터는 시각장애인에게도 상당히 유용한 기술을 제공하지 않을까 싶고.)
이것이 불편한 세대도 있겠지만 아니 낯설고 어색한 세대도 있겠지만, 나 역시 지금은 상상만 하며 낯설어하지만, 어떤 세대에겐 일상이겠지. 그럼 이런 시대의 몸은 어떤 공간이자 체험의 터전일까?

트랜스젠더 이슈와 관련한 단편: 니키, 수잔, 역사 연구

01
어제 아침에 들은 내부자 소식. 5월에 Nikki가 한국에 온단다.. 꺄아아아아악!!!!!!!!!!
니키, 니키, 니키, 니키가 한국에 온다니!!! 니키, 니키, 니키!!
내가 애호하는 학자 중 한국에서 본다면 쥬디거나 수잔일 줄 알았다. 그런데 니키를 먼저 만나다니. 나 그날 무슨 일이 있어도 참가할 거야. 아, 아니지. 어쩌면 등록하지 않고 참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헤헤. 니키 만나면 책에 싸인 받을 거야. 안 되는 영어로라도 꼭 말 한 마디 붙여볼 거야!!
01-1
근데 이렇게 부르니 마치 친한 친구 같구나.. 당연하지만 그분들은 저를 몰라요.. ㅠㅠㅠ 저 혼자 친한 거예요.. ㅠㅠㅠ
02
며칠 전 위키피디아에서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를 소개한 페이지를 읽다가, 짐작은 했지만 새삼 확인한 사실이 하나 있다. 스트라이커가 1994년에 쓴 논문이,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사람이 쓴 글 중 동료리뷰 학술지에 실린 최초라고 한다.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설명하는 사람이 쓴 첫 학술논문은 샌디 스톤의 글이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물론 다른 대중 잡지, 공동체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실린 글은 더 많다). 스트라이커 역시 트랜스젠더 연구의 역사를 개괄할 때면 늘 샌디 스톤의 글을 가장 먼저 언급한다. 그리고 자신의 글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시기 발간된 논문 자체가 몇 안 되기에 짐작은 했지만… 동료리뷰 학술지, 한국에선 익명 심사자의 심사를 받는 학술지에 실린, 트랜스젠더가 직접 쓴 첫 논문이라니.. 하아.. 역시 나의 스트라이커.. (음? ;;; )
그러다 한국에선 어떨까를 떠올리려다가, 그냥 관뒀다.
03
한국의 상황을 떠올리다 관둔 이유 중엔 “공개적”, 영어로는 “openly”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도 있다. 이를테면 나는 공개적 트랜스젠더일까? 루인으로 아는 사람은 내가 트랜스젠더란 점을 알고, 루인으로 생활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 나는 나를 트랜스젠더로 설명한다. 하지만 가족에겐 이런 점을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나는 ‘공개적’일까 ‘비공개적’일까 ‘반공개적’일까? 다른 대중활동에선 자신의 특정 범주를 밝히지만 부모나 원가족에겐 밝히지 않는 사람과 원가족에겐 밝히지만 다른 곳에선 거의 밝히지 않는 사람 중 누가 더 공개적이고 덜 공개적일까? 나는 과거 한 신문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인터뷰를 했고 그 기사가 포털 메인에도 올라갔다. 이 정도면 공개적인가? 근데 원가족과 그 친족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이러면 다시 공개적 커밍아웃을 안 한 것인가? 이런 복잡하고도 또 말도 안 되는 분류 때문에 “공개적”이란 표현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
03-1
이래저래 귀찮으니, ‘저는 덜 공개적이고[openly] 덜 폐쇄적인[closet]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입니다’ 정도면 되려나? 아니지, 아니지. ‘저는 반개구간 혹은 반폐구간 레즈비언 mtf 트랜스젠더입니다’면 되겠지? 😛
03-1-1
첨언하면, 수학에선 폐구간이 개구간을 포함한다.
04
지난 주말, 미국에서 트랜스젠더 이슈, 동아시아의 섹슈얼리티 역사 등을 연구하는 T. H. 교수와 만나 얘기를 나눴다. 얘기를 나누며 많은 자극을 받았고 또 안타까웠다. 안타까움의 핵심은 한국에서 퀴어 관련 역사, 트랜스젠더의 역사, 퀴어 범주 논쟁의 역사와 관련한 논문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퀴어 이슈 관련 역사가 거의 없다. 이해솔 씨, 한채윤 님, 그리고 끼리끼리, 친구사이 등에서 낸, 운동 중심의 소논문 분량인 글이 몇 편 있다. 하지만 학위논문 수준에서, 다른 말로 단행본 수준의 분량으로 역사를 다룬 연구는 없다. 이 점을 마치 처음 알았던 것처럼 깨달았고 아쉬웠다. 한국에서 첫 레즈비언 학위논문이 1995년에 나왔으니 이제 얼추 20년 정도 되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레즈비언의 긴 역사를 학위논문 수준에서 다룬 논문을 쓸 법도 한데.. 박차의 박사학위 논문을 기대해야 하나? 후후.
이상하게도 나는 역사를 공부한 적 단 한번도 없는데, 역사와 관련한 논문이 더 많이 나오길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