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조금 심란하여 건물 주변을 산책했다. 그래봐야 아주 잠깐, 그저 한 바퀴 도는 정도. 나의 여행이 새벽에 떠나 오전에 돌아오는 것이듯, 산책 역시 노래 한 곡을 듣는 정도다. 그래도 바람이 선선하니 좋다. 쌀쌀하지 않으면서 덥지도 않은. 밤에 더 이상 선풍기를 켜지 않고 잠들 수 있는 걸 보면 가을이 오긴 오나 보다.

내가 머무는 연구실이 있는 건물 앞은, 얼추 2년간 진행한 공사를 마무리하는 중이다. 새로 공사한 곳은 공사한 티가 팍팍 난다. 냄새가 다르다. 머리 아픈 냄새. 페인트를 칠한 냄새가 아니어도, 머리 아픈 냄새가 난다.

예전에 비해 걷기는 편하다. 예전엔 산책을 하기에 좋았던 것 같진 않다. 앉거나 누워 있기에 좋았다. 근데 이젠 산책하기에 좋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그래, 공원으로 바뀌었다. 나무 적당히 있고 벽돌 포장 잘 되어 있고 벤치도 있고. 산책로를 만들었다. 비장애인이 걷기에 좋은. 자전거나 휠체어를 타기엔 불편한. 그곳을 잠시 산책했다. 비가 올 것 같더니 구름만 조금 있는 맑은 하늘. 저물녘의 선선한 바람. 좋은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삭막하다.

그리고… 오늘 석박사 졸업식을 하더라. 초등학교 고학년이거나 중학생은 됐을 법한 아이가 있는 졸업생도 있었다. 예전엔 남 얘기였는데 이젠 남의 일 같지 않다. 물론 나의 일이 될 가능성은 없다. 그저, 지나가는 길에 그 모습이 내 미래의 여러 가능성 중에 하나겠구나 싶어 잠시 쳐다봤다. 아이가 있는 건 빼고. 흐흐. 모르지, 뭐. 입양을 할지. 근데 변태도 입양할 수 있나? 흐. 농담이다. 난 앞으로도 계속해서 혼자 살 거다. 이런 생활이 몸에 익었다.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근거 없는 희망과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가는 생활. 서두르지 말아야지. 시간 제약이 있다고 해서 서두를 이유는 없다. 서두르면 넘어진다. 그런데도 조급한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영혼 없는 존재”

몇 달 전, 공무원시험이라도 볼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지 않게 했다. 내겐 ‘공무원시험을 준비해볼까?’ 하는 고민이라도 했다는 게 중요했다. 먹고 살기 막막함. 운동도 좋고 공부도 좋은데 먹고 사는 게 너무 불안정하니 이런 고민도 했다.

특강을 나가 특강료를 받는 건 덜 부담스럽다. 주최하는 측 대부분이 돈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학교나 정당 같은 경우, 특강료에 허덕일 정도의 재정은 아니지 않나. 단체에서 불러도, 대부분은 정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불렀다. 프로젝트의 경우 이미 강사료가 책정되어 있어 부담이 덜하긴 마찬가지. 하지만 원고료의 경우엔 이야기가 다르다. 대부분이 자치언론이거나 재정이 열악한 곳이다. 어떤 경우엔 고료가 전혀 없기도 하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소액이나마 고료를 준다. 그리고 이런 고료를 받는 게 쉽지가 않다. 고료야 내가 부르는 게 아니라 청탁하는 곳에 주는 대로 받지만, 그래도 부담스럽다. 계좌번호를 알려주기까지 몇 번이고 고민한다. 그냥 후원할까? 하고. 이런 곳의 재정이 얼마나 열악한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국 계좌번호를 보낸다. 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ㅠ_ㅠ (물론 먹고 살아야 해서만은 아니다.) 그래서 ‘공무원 시험’이란 고민까지 해봤다.

하고많은 직종 중에서 왜 공무원이냐고? 어릴 때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 거 같다. 친척 중에 하위직이지만, 아무려나 공무원이 많다보니 공무원 하라는 얘길 많이 들었다. 그리고 아마 중학생인가 고등학생인가 그때부터 결코 하지 않으려고 작정한 직종이 공무원이다. 공무원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이런 옛일이 떠오른 건, [시사인] 이번 호(49호)를 읽다가 “영혼 없는 공무원”이란 구절을 봤기 때문이다. 기사는, 정권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소신도 버리고 현정권을 옹호하는 이들을 지적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 탄생에 기여한 이춘발 KBS 이사는 정연주 사장 퇴임에 앞장서고 있다. 김장수는 “난 참여정부 장관이다.”며 현 정권의 국방부 장관 유임을 거절했지만,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다. 이런 저런 인물들을 언급하며, 그 중 “영혼 없는 공무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말을 한다.

내가 공무원만은 하지 않겠다고 한 이유도 이거였다. 적어도 내 주변에 있던 이들은, 항상 당시의 정권을 지지했다. 노태우정권 땐, 선거에서 노태우를 찍었고 노태우를 지지하고. 김영삼정권 땐, 선거에서 김영삼을 찍었고 김영삼을 지지하고. 김대중정권 땐, 선거에서 김대중을 찍었고 김대중을 지지하고. 노무현정권 땐, 선거에서 노무현을 찍었고 노무현을 지지하고. 이명박정권인 지금 선거에서 이명박을 찍었다. 지지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땐 이런 신분이, 이런 모습이 혐오스러웠다. 아니,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있는데 전혀 다른 성격의 정권을 지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공무원만은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지금은 혐오스럽기보단 안쓰럽다. 공무원이란 자리가 요구하는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기 시작하자, 안쓰러웠다. 어떤 위치나 자리에 오르면, 그런 공간에 들어가면 그에 주어진 역할이 있다. 정치적 신념도 중요하지만 이런 위치, 주어진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런 위치에도 다른 방식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고, 변화를 모색하는 이들도 있다. 공무원노조를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고, 현재 정권에서 일하지만 현재 정권을 지지하지 않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매 정권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이를 비난/비판할 수는 없지 않는가. 이는 조금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매 정권을 지지한다고 말하는 이들 중, 내가 아는 이들은 대체로 보수주의자이긴 했다. 분배보다 성장이 중요했고, 기업 세습을 지지했고, 직급이 올라가면 하는 일 없어도 월급 많은 걸 당연하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조금 달리 접근해야 한다는 나의 말을, 나도 의심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개혁을 주장하는 데 넌 왜 “영혼이 없느냐?”고 묻는 건, 이걸 한 개인에게 책임 소재를 돌리는 건 문제가 있다. 물론 그 개인이 차지하는 자리에 따라 다르다는 건 분명히 하고.

아무려나 [시사인] 기사에 실린 한 구절, 공무원을 일컬어 “영혼 없는 존재”란 표현이 참 적절하구나 싶었다. 없을 수도 있고, 포기한 걸 수도 있다. 직장에 있을 때만 잠시 젖혀둔 걸 수도 있고. 아무려나 슬펐다. 공무원이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있기 마련. 그러니 자신이 누굴 찍건 직장에서 자리를 유지하는 건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영혼이 없어야”만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라서. 공무원이란 직장을 선택하는 순간, 자신의 정치적 입장은 잠시 젖혀둬야 한다는 의미라서. “대한민국 국민은 표현의 자유가 있다”지만(정말?) 공무원에겐, 현 정권을 지지하는 것 이외의 정치적 입장은 없다는 의미라서. 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을 발설해선 안 된다는 의미라서. 애당초 이런 건 포기하란 의미라서.

+
그나저나, 내가 경험한 공무원 개인은 왜 그리도 거만한 걸까? 학교 교직원 중 일부는 왜 그리도 오만한 걸까? -_-;;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소리. 예전에 행정조교하던 시절과 행정기관을 이용하던 시절이 떠올라서. ;; 그래도 오늘 학사문제 해결해준 분은 꽤나 친절했음.

갈팡질팡, 소통

과신할 필요도 없지만 불신할 필요도 없지 않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근데 난 항상 과신과 불신 사이에서 갈팡질팡. 이렇게 산다. 뭔가 특별할 것도 없는 진부한 일상의 흐름 속에서, 갈팡질팡. 내가 무얼 하려는지 잊곤 갈피를 못 잡다가도 갑자기 방향을 찾는다. 방향을 찾는 과정은 언제나 우발적이거나 우연.

[다크 나이트] 보러 영화관에 가고 싶다. 갈 시간이 없다. 아니다.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여유가 없다. 그냥 어느 날 밤, 훌쩍 영화관에 가면 그만인데. 그렇게 할 여유가 없다. 혹은 지금 이 시기에 영화관에 간다는 것에 일종의 죄의식이라도 느끼는 걸까? 어떤 비난이 두려운 걸까? 근데 무슨 죄의식? 무슨 비난? 아님, 한 번 극장에 가면 앞으로도 계속 가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 하리란 걸 알기에 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극장에 안 간지 상당히 오래 되었다. 극장이란 공간은 중독. 한 번 가면 계속 가고 싶다. 그래서 억지로 참는 걸까?

예전 같으면, 극장에 갈 법한 영화가 몇 있었는데 다 관뒀다. 회피했다. 회피하는 방식으로, 망각하는 방식으로 가지 않았다. 비가 많이 내리던 오늘 아침, 오늘 밤엔 극장에 가야지, 다짐했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난 지금, 가서 뭐하나. … 그래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그래도 모나미153 볼펜을 한 통 샀다. 심만 파는 것도 한 통 샀다. 이걸 다 쓸 일은 없겠지만, 글을 쓰기엔, 꽤나 긴 글을 쓰기엔 만년필보다 모나미153 볼펜이 좋다. 편하고 부담이 없다. 한땐 모나미153 볼펜만 사용했다. 이렇게 조금씩 준비하고 있다.

아침부터 신경을 썼더니 또 편두통 혹은 신경성 두통이다.

+
불안정한 삶, 불확실성, 불연속, 비일관성.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안정적이고 확실함이 있고 일관된 논리를 구사한다는 것. 좀 모순이라 느꼈다. 불일치를 표현하기 위해 일치된 논리와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불일치를 설득하기 위해 논리를 구사해야 한다. 뭔가 모순이라고 느꼈다. 근데 이 둘 사이의 충돌-한 쪽은 자기의 모순 없는 표현인데 한 쪽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충돌, 간극, 균열. 이런 것이 소통 아닐는지. 얘기가 통한다고 느끼는 순간이 아니라, 어느 순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소통, 아닐까? 사실은 각자 자기의 얘기만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거.

근데, 내가 찾는 언어는 어느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