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

유난히도 할 말이 없는 요즘이다. 더욱이 발제문 같은 글을 쓰고 있을 때면 할 말은, 하고 싶은 말은 더욱더 줄어든다. 지난주에 발제문 한 편. 수요일에 있을 세미나를 위해, 오늘도 발제문을 한 편 마감. 아니, 90% 정도 수준에서 마감. 내일 좀 고치면 마무리가 될 듯. 내일은 무언가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내일부턴 알바를 달려야해.

라디오를 들을 때마다, 다른 운동 다 접고 대운하건설을 반대하는 집회라고 해야 하는 고민을 한다. 이거 정말 무섭다. 이상도 하지. 내 삶에 좀 더 직접적일 일보다도 대운하가 더 직접적인 일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정말로 대운하건설을 반대하는 연대체가 생기면(이미 생겼을까?) 가입하고 활동을 하든가 후원금이라도 내든가, 할 태세다.

어찌어찌하여 안경을 살 수 있는 여유자금이 생겼다. 며칠 전에 생겼는데, 사지 않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안경을 살 수 있는 돈 이상의 여유자금이 생겼다. 아마 지금까지 살며 가장 많은 여유자금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엄청난 액수는 아니고. 그래서 더 궁핍하다는 느낌에 빠져있다. 재밌는 일이다. 여유자금이 전혀 없어서 매달 간당간당한 생활을 할 때보다, 약간일지언정 어느 정도 여유자금이 생긴 지금이 더 가난하다는 느낌이다.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걸까? 여유자금만 생기면 사리라 다짐했던 책도 별로 사지 않고 있다.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수학책에 빠질 기미가 보인다. 기쁘다.

방 계약 연장

앗싸, 집 계약을 연장했다.

그 동안 집 주인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고, 드물게 마주칠 때면 집주인의 표정은 별로 안 좋았다. 정말 1년을 더 살 거냐고 묻는 주인이니 반가울 리가 없다.

그런데 오늘 다시 마주쳤을 때, 마침 계약서를 작성한 집주인은 1년 만 더 살 것을 재차 확인했고, 새로운 사람을 들였으면 방값을 올리려고 했는데 지금까지 살던 사람이라 그냥 동일 금액으로 계약한다는 말도 했다. 아무려나, 다시 일 년을 여기서 살기로 했다. 이히. 다행이다.

{영화} 그르바비차

[그르바비차] 2007.01.04.금. 10:40, 씨네큐브광화문 2관 43번

01
얼마 전에 어느 매체에 기고했다는 글은, 이미 인터넷에 올라왔다. 디자인 편집과정을 거친 모습을 보며 낯설었다. 조금 당황하기도 했다. 글을 읽으며 마치 남이 쓴 글 같았다. 확실히 펜으로 쓴 글과 워드작업을 거쳐 인쇄를 해서 읽는 글과 디자인 편집을 거쳐 인터넷 매체에 실리는 글의 느낌은 제각각 다르다.

디자인 편집을 거친 그 글을 읽으며, 글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과 디자인 편집을 하는 분이 강조한 부분이 달라 조금 당황했다. 그 글에서 “나는 조금 불안하다”와 “나는 조금 피곤하다”란 말을 썼다. 이때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피곤함이었지만, 디자인 편집자는 불안을 말 하는 부분에 다른 색깔을 사용하는 것으로 강조의 의미를 부여했다.

내 글쓰기 방식의 문제인지, 글을 통해 풍기는 뉘앙스가 그랬는지, 디자인 편집자가 트랜스젠더에게 가진 어떤 선입견이 있어 빚어낸 상황인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 뭐가 중요하랴. 시험문제의 지문처럼 정답이 있는 글도 아니고, 글은 공개되는 순간 나완 상관없으니까. 또 모르잖아. 사실은 불안을 말하고 싶었으면서 피곤함을 말하고 싶다고 우기는 건지도. 몇 달 후에 다시 이 글을 설명하며 불안을 말하고 싶었다고 할지, 누가 알까.

02
영화 키워드만 확인하곤, 망설였다. 2008년 처음으로 읽는 영화를, 아침부터 성폭력이란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영화를 읽는다니. 극장에 안 갈 것도 아니면서 괜히 궁시렁 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트랜스젠더란 이슈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거운 주제이리라. 그러니 성폭력이란 주제가 무거워서가 아니었다. 이건 어떤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상기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이 싫은 건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서 거의 말하지 않는 어떤 시기 혹은 사건이 몇 개 있다. 물론 가끔씩 말할 때가 있긴 한데, 입으로 말하는 경우는 드물고, 거의 항상 글을 통해서만 말할 뿐이다. 물론 글로도 말하지 않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고.

03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황이 떠오를 때가 있다.

04
이 영화,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