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츠이치 [ZOO]

요즘, 방학이란 핑계로 소설책을 몇 권 읽고 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 중 상당수가 추리소설 혹은 그 언저리의 범주에 속하는 소설들. 이렇게 읽고 있는 소설들 중 한 권이 오츠이치(Z一)의 [ZOO]. 작가의 단편들을 모은 책이다. 따지고 보면 굳이 독후감까지 쓸 정도의 감흥이 있었던 건 아니다. 책을 홍보하기 위해 두른 띠엔

“이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일본문학의 충격
(…)
‘시대의 천재’ 오츠이치의 대표작 한국 출간

란 구절이 있는데, 짐작할 수 있듯 그저 웃음만 날 뿐인 진부한 홍보문구이다. 번역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재”란 느낌도 안 들고, “충격”적일만한 소설도 아니다. 고어영화에 큰 거부감만 없다면, 내용도 그렇게 끔찍하지 않고(모든 작품이 고어인 건 아니고).

소설들을 읽고 있노라면 포(Poe)가 떠오른다. 그렇다고 포만큼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기보다는, 포의 영향을 받았구나, 혹은 포의 어느 소설이 떠오르는 형식이구나, 하는 느낌이 많이 든달까. 그렇다고 포의 아류작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는 건 아니고. 홍보구절과 같은 호들갑이 이 소설들을 읽는데 오히려 방해인 것 같기도 하다. 아직은 덜 여물었다는 느낌도 있고. 소름끼치거나 서늘한 느낌을 소설이라면, 차라리 마루야마 겐지의 초기작품이 낫지 않을까? (마루야마 겐지를 안 읽었다면, 기타노 다케시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나 [소나티네], [하나비] 등을 떠올리면 될 듯.)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은 지 일주일이 넘은 지금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건, 이 소설집에 실린 두 번째 소설 “SO – far”의 설정 때문이다. 엄마, 아빠 그리고 주인공인 나, 이렇게 세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엄마는 아빠가 안 보인다고 말하고, 아빠는 엄마가 안 보인다고 말한다. 셋이서 같은 소파에 앉아 있을 때에도 엄마에겐 나만 보일 뿐 아빠는 안 보이고, 아빠 역시 나만 보일 뿐 엄마는 안 보인다고. 왜 그런가 했더니,

무슨 볼일이 있어서 친척 숙부에게 갖다 주어야 할 게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 두 사람은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쪽이 전차를 타고 숙부의 집에 갔다고 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가위바위보를 한 뒤부터가 달라졌다. 엄마가 있던 세계에서는 아빠가 져서 열차를 탔다고 한다. 그러나 아빠가 있던 세계에서는 엄마가 숙부의 집에 갔다고 한다.
전차는 사고를 일으켰다. 그래서 엄마가 있던 세계에서는 아빠가, 아빠가 있던 세계에서는 엄마가 죽고 만 모양이다. 각각의 세계에서 살아난 쪽은 나와 둘만 남게 되었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였다. (p.84)

엄마건 아빠건 둘 중의 한 명은 죽었다고 하고, 주인공인 나는 둘 다 살아 있다고 믿고 실제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함께 살고. 흥미로운 건, 위에 인용한 구절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엄마의 입장에선 아빠가 죽었기에 엄마와 나, 둘 만 남았고, 아빠의 입장에선 엄마가 죽었기에 아빠와 나, 둘 만 남았지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인용한 구절의 마지막 문장에 따르면, ‘살아남은 엄마와 살아가는 나’의 세계는 살아남은 엄마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죽은 아빠의 걱정 혹은 상상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상이고, ‘살아남은 아빠와 살아가는 나’의 세계 역시 죽은 엄마의 걱정 혹은 상상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상이란 점이다.

엄마는 아빠가 죽었다고 얘기하지만, 그런 엄마와 나의 삶은 죽은 아빠의 세계에서, 아빠는 엄마가 죽었다고 얘기하지만, 그런 아빠와 나의 삶은 죽은 엄마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정. 이 설정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물론 소설의 결론은 전혀 다른 ‘사실’을 알려준다.) 이런 구성은, 영화 [기담]에서 인영과 동원의 세계를 이루는 방식이기도 하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살아가는 이들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의 상상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설정. 사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역시 이렇지 않다는 보장은 없다.

이런 설정이 유난히 걸린 건, 최근 겪은 일들 때문이기도 하다.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혹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이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뭔가 기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테면 한 선생님의 상만 해도, 돌아가신 분이 존재한 적이 없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죽음을 전해 듣고 서야 비로소 그 분의 존재를 깨달은 셈이다. 나의 인식 범위에서 존재한 적도 없는 이가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것. 이 느낌이 기묘했다. 그리고 이런 느낌들은 죽은 이의 상상에서 살고 있는 산 자들의 삶과 닮은 건 아닐는지.

숨책, 책, 논문주제

숨책에서 알바를 하고 왔다. 오후에 연락이 왔을 때만 해도, 주말에 시간이 되느냐는 전화려니 했는데 오늘 저녁에 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요 며칠 전부터 돈 벌 궁리를 하고 있어서, 전화가 유난히 반가웠다. (몇 달 전부터, ‘아주 굶어 죽으란 법은 없구나’란 인생을 살고 있다. 흐흐 -_-;;) 내일 저녁에도 하기로 했고, 어쩌면 목요일 저녁에도 한다. 사흘 간 알바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사흘 동안 자리를 비운다는 게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는 걸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렇잖아도 숨책에 갈 일이 있었는데, 알바하러 간 김에 책도 두 권 샀다. 수잔 브라이슨의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와 네이폴의 소설 [흉내].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책이 출판된 당시부터 사야지 하면서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있어서 망설임 없이 골랐다. 하지만 언제 읽을까? 아주아주 나중에 읽을 것 같다. 네이폴의 [흉내]는, 사실, 네이폴이란 작가 자체를 잘 모른다. 이름은 귀 설지 않은데 누군지 모르겠다. 그저, 책날개에 적혀 있는

…지난 세월의 혼돈을 기억하고 응시하는 한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을 촘촘하게 따라간다. 주인공의 그 쓸쓸한 돌이킴 속에는 ‘진짜’가 되기 위해 ‘진짜인 척’하고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사실은 겉보기의 중심을 흉내 낸 맹목에 지나지 않았다는 섬뜩한 자기반성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란 구절을 읽고, 사지 않을 수 없었달까. 제대로 모르면서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는 행동, 트랜스도 아니고 전환/이행(transition)의 경험도 없는 “태어날 때부터 여성(혹은 남성)”이었다란 식의 서사, “패싱passing” 등이 동시에 떠올라, 이 책을 골랐다.

석사논문 주제도 이런 고민과 겹치는 부분이 없지 않고. 지난 몇 달 전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주제가 다가오고 있다. 그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면, 지금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충 알 것 같다. 두 개의 주제를 하나로 엮어갈 텐데, 그중 하나는 많진 않아도 몇몇 참고 문헌을 찾아둔 상태고 그 중 일부는 이미 한 번 읽었다. 문제는 다른 주제와 관련해서 당장 떠오르는 참고문헌이 전혀 없다는 거… lllon_ 간단하게 언급한 논문은 하나 있지만, 이와 관련해서 유용한 아이디어를 얻을 만한 논문이나 책을 모르고 있는 상태다. 흑흑. (아, 방금 아이디어를 줄 만한 글이 몇 개 떠오르긴 했다. 힛. -_-;;;)

사실, 며칠 전에 몇몇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제를 얘기했더니, 다들 좋아는 하는데, “박사논문 쓰려고?”라는 반응도 있어서 살짝 당황했다. 정작 루인은 A4지로 10페이지 분량이면 충분할 내용이면 어쩌나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려나, 어떻게 되겠지, 뭐. 흐흐.

어쨌든 며칠 알바를 하면, 생활비도 벌고 영화비도 번다!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랑 [카모메 식당] 읽으러 가야지. 후후.

검은 집, 혹은 텅빈 …: 기원

그동안 영화만 읽고 책은 안 읽는다는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쓰는 독후감. 음핫핫. -_-;;;

게을러서 인지, 아직 정리가 안 되어서 지금까지 안 쓴 건진 애매하지만(‘게으르다’에 한 표 ;;) 암튼 영화 [검은 집]의 원작인,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이선희 옮김, 창해)을 2주 전에 읽었다. 어릴 때부터 추리소설이나 공포소설을 곧잘 읽는 편이지만(기억 속에, 처음으로 저금해서 모은 돈으로 산 책도 추리소설로 기억하고 있다) 요즘 들어선 거의 안 읽고 있었기에, 꽤나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소설책을 읽어야지, 했던 건, 문득 이 영화 혹은 소설에서 발생하는 공포는 전혀 다른 곳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영화만 읽었을 때, 그리고 영화를 읽고 나온 직후엔, 적어도 표면 상 나타나는 공포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범인이라던가,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습들, 지하실에 널부러저 있는 시체들의 이미지가 주는 효과가 컸다. 싸이코패스를 “비인간적인”, “인간적인 감정이 없는” 존재로 간주하는 인식 자체는 꽤나 불편했고.

소설책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원작과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글쎄, 인물들의 비중이 변하고, 이 과정에서 성격도 좀 바뀌지만 그렇다고 소설과 영화가 그렇게까지 다른 건 아니다. (물론 후반부는 좀 많이 다르다.) 소설 역시 싸이코패스는 “인간적인 감정이 없는” 그런 존재로 나오고 바로 이런 부분이 공포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어쩌면 [검은 집]이란 텍스트에서 발생하는 공포는, 원인 없음, 설명할 수 없음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만 그럴 줄 알았는데,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사이코패스의 어린 시절을 찾아가고 그 과정에서 문집을 찾고, 문집에 실린 글을 범행의 흔적으로 발굴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얘기는 “싸이코패스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이다. 일테면 부모와의 관계를 이유로 들기도 하지만 부모와의 관계가 안 좋았던 모든 사람들이 싸이코패스는 아니란 점에서, 싸이코패스의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혹시 이 영화와 소설에서 발생하는 공포는 “원인(을 알 수 )없음”이 아닐는지.

논문뿐만 아니라 신문 기사 등의 글을 읽다보면, “왜” 그랬는지 이유를 밝히고, 언제부터 그랬는지 혹은 어떤 경험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른바 인과관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글을 구성하고 있단 걸 느낄 때가 있다. “유영철은 왜 그랬는가?”, “탈영병은 왜 탈영했는가?”와 같은 원인 찾기와 이렇게 만든 원인으로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 이것이 요즘 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논리구조이고 소통방식이다. (혹시 초등학생시절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를 배우고 시험에 나온다고 암기한 기억들 있지 않나요? 문장 혹은 한 편의 글은 이런 육하원칙에 따라 써야 한다고 배웠던 기억이 문득;;;)

하지만 [검은 집]에서 공포를 유발하는 싸이코패스는 “왜”라는 질문을 무력하게 만든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이면 이러이러할 것이다”란 식의 어떤 이상적인 인간상도, “왜 그렇게 하느냐”란 질문만큼이나 싸이코패스에겐 무의미하다. 분명한 인과관계로 설명하고 치료하는 방식이 근대적인 방식이라면, 이런 방식에 부적절한 존재란 점에서 “싸이코패스”는 그 사회가 느끼는 공포의 원인이자 위협이다. 그렇기에, 인과관계로 설명하고자 하는 질문방식 자체에 한계(구멍)가 있음에도 한계를 얘기하기보다는, 이런 한계를 드러내는 싸이고패스를 사회악으로 설정함으로서 기존의 방식을 유지하고자 한다.

학부 시절, 어설프게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워듣곤, 아는 사람과 괜히 아는 척 하며 했던 말 중에, “그냥”이라는 말이야 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아, 부끄러워 -_-;;). 여전히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게 뭔지 모르지만, 아무려나, “그냥”이란 말은 “그거 왜 해?”와 같은 질문을 무력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 경향이 있다. “그게 왜 재밌어?”란 질문에 “그냥”이라고 답하는 건, 모든 걸 인과관계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는 점에서, “왜”라는 질문구조 자체에 문제제기하는 셈이다.

[검은 집]은 바로 이전 긴장 관계를 공포로 설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끊임없이 인과관계로 설명하고자 하는데, 자꾸만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경험들이 발생할 때 느끼는 감정을, 저자는 공포라는 형식으로 풀어가고 있는 건 아닐는지.

근데 여전히 이미지 쇄신이 안 되고 있다는 느낌이… -_-;;;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