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상실, 몸 가는 길

밤에 잠 들 때면, 하고 싶은 말이 뭉글뭉글 피어난다. 그리고 이렇게 피어난 말들이 몸을 타고 돌면, ‘그래, 내일은 이런 글을 써야지’라고 다짐한다.

자고 일어나면 잠 속으로 말들은 빠져들고, 하고 싶다고 다짐했던 말 중 남아 있는 말은 없다. 무엇을 말 할 수 있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든 걸 잊어버린다. “이상한 나라”에라도 갔다 온 걸까? 혹은 몸 어딘가에 말들을 숨긴 걸까.

몇 가지 일들이 있지만, 쓸 수 있는 것도 쓰고 싶은 것도 없다. 왜일까? 이렇게 쌓아두면 언젠가 다시 말들이 넘쳐흘러선, 마구마구 쓰는 날도 올까? 하지만 글 좀 안 쓴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닌 걸.

하루면 읽을 수 있을 글들을, 이틀이나 걸려서 읽곤 한다. 게으름을 반증한다. 하지만 좀 게으르면 어때. 강박들.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들. 그런 강박 속에서 실상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 몸은 없고 강박만 남은 걸까? 강박이 몸을 잠식한 걸까? 그래, 몸은 없고 강박만 남았다: 강박이 몸을 잠식했다.

서두르지 말기로 해, 라는 말을 다시 중얼거린다. 루인이 무식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타고난 재능도 없으니, 그저 꾸준히 진행하면 그만이다. 그러면서 좀 놀기도 하고 아무 것도 안 하는 시간을 가지면, 그것대로 또 좋은 거다. 몸은 솔직하니까.

즐거운 몸. 즐거운 몸. 몸 가는 데로 가기.

두런두런

01
도넛자세님과 키드님께 고마움을!
덕분에 뮤즈내한공연 스탠딩 티켓을 구했어요.

02
아침에 사무실에 오니, 초콜릿 두 개. 어제 지렁이 회의를 하며 선물(?) 받았지요. 달콤씁쓸한 초콜릿이 좋아요.
고마워요, 잘 먹을 게요 🙂

03
할 말을 잃었어요. 쓰고 싶은 글은 있지만 글을 쓰지 않고 있어요. 최근의 운세와도 관련 있는 걸까요?
이 번 달이 지나가면 다시 글이 조금씩 올라오지 않을까요?
혹은 영화라도 읽으러 갈까요?
울 수 있는 영화라면 언제든지 좋아요 🙂

[영화] 묵공: 나의 말은 나의 권력이 담보한다.

[묵공] 2007.01.24. 18:55, 아트레온 7관 9층 E-19

01
어둠의 파일은 진즉에 받아둔 상태였다. 그럼에도 왜 극장에 가고 싶었을까? 무협영화나 중국영화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저 이주일 만에 아트레온에서 내린다는 걸 알아서 일까?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그저 묵자와 관련 있다는 정보 하나-하지만 묵자나 묵가사상이 뭔지는 모른다-, 일전에 ps네 갔다가 영화정보프로그램에서 이 영화를 소개했고 심드렁하게 봤던 기억 하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어요.

02
영화를 보며 순간적으로 불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한 축은 일열(판빙빙 분)과 혁리(유덕화 분)의 관계. 일열이 왜 혁리를 좋아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이런 건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초반의 일열은 항상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모습… 어색했다. ㅠ_ㅠ 아니, 어색했다고 하기 보다는 뭔가 포스가 부족했다. 일테면 왕자로 나온 양적(최시원 분)이 왕자로서의 포스를 갖지 못한 것처럼(심지어 연기도 어색하다!). [사실, 갑옷을 입고 나온 사람 중에서 갑옷의 포스와 어울리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다 -_-;;] 그럼에도 그 모습, 꽤나 멋졌는데, 혁리를 간호하는 장면 이후로, 특히나 혁리와 일열이 같이 조나라를 염탐하고 돌아 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갑옷 입은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이 순간부터 내내 불편하고 불쾌함을 느꼈다.

혁리는 영화 내내 혁리로 존재하지만 일열은 혁리를 좋아하는 순간 더 이상 기마병 장군이 아니라 혁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전쟁은 진행 중이었고 일열도 군사들을 지휘하지만, 이 장면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다소 ‘진부한’ 방식으로 읽으면 “남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남성”-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여성”은 사랑을 통해서만, 남성을 매개해서만 존재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랄까.

물론 이런 식의 독해 역시 불편하다. 혁리도 일열도, 영화 속 누구도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말한 적 없다(“왕자”가 곧 “남성”임을 “딸”이 곧 “여성”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일테면-맥락은 다르지만- 오이디푸스는 안티고네를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일열과 혁리의 사랑은 ‘동성애’일 수도 있고, 둘의 관계를 어떤 특정 성적 지향성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왜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고통 받고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성찰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읽고 싶었다.

03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몸에 와 닿은 말은, 혁리고 뭐고 가족이 다 죽었는데 내게 무슨 소용이냐는 한 평민의 울부짖음이었다. 묵자나 묵가사상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루인에게 이 영화는 권력이 대표성을 담보해 줌을 말한다고 읽었다.

알다시피 소위 말하는 대의명분이라는 것, 민족이라는 것, ‘우리’라는 것, 국가의 존망이라는 것, 경제적인 손실이라는 것 등은 모두에게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최근 있는 현대자동차의 파업 사태를 접하며 답답했던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파업한 노동자를 욕한다는 것. 최근의 사태 뿐 아니라 거의 모든 파업은 노동자라는 가해자와 노동파업에 따른 경제적인 손실을 감당해야 하는 피해자인 경영자라는 구도이다. 노동자는 노동자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거나 노동자는 노동자 편이라는 식의 구도를 만들자는 의미가 아니라 항상 회사나 국가, 민족과 같은 어떤 “대의명분”이라는 것 앞에 개인의 욕망은 무시되거나 과도한 욕망으로 간주되는 점이 화가 난다는 의미이다.

감독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루인은 이 영화를 이 지점에서 읽었다. 소위 대의명분이라고 불리는 민족이나 국가란 이름 아래 개인의 욕망과 생명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이런 대의명분이라는 것도 결국 개인의 욕망이라는 것. 결국 권력관계가 어떤 개인(일테면 왕)의 욕망은 국가적인 것, 그래서 너무도 중요한 것으로 만들지만, 다른 어떤 개인의 욕망은 하찮거나 무례한 것, 과도한 것으로 만든다.

황장군(안성기 분)이나 왕의 전쟁 욕망은 대의명분이나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들이 상대방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죽도록 방치했다. 하지만 황장군이나 왕의 개인적인 욕망은 국가적인 대의명분이고, 한 평민의, 한 병사의 욕망은 국가의 존망을 거스르는 위협이나 부당한 과욕이 된다. 결국, 자신의 언어가 힘을 가지기 위해선 논리가 아니라 권력이라는 것, 자신의 말은 자신의 권력 여부가 담보한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를 읽으며 느낀 지점이며 이 영화가 말하고 있다고 느낀 지점이다.

기업의 이득(사실상 기업주의 이득), 국가의 이득(기득권자의 이득)이 다른 그 어떤 이득보다 중요하다고 정규교육을 통해 배우는 사회에서, 이런 지식이 말하지 않는 이들의 요구는 언제나 부당하고 과도한 욕망으로 간주하고 그래서 모든 파업은 곧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 행동이라고 욕하는 상황.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 때가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 때, 더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되었다는 건 무얼 의미하나.)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아래 끊임없이 침묵할 것을, 기업주가 주는 월급으로 살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나”의 목소리/주장은 언제나 해서는 안 될 범죄이다. (결국 일열은 성대를 잘린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아부가 아니라 저항이 권력을 준다는 말은, 진실이다.

(※최근 한 매체에서 “economicS”라는 글을 읽었는데, 이런 맥락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04
물론 영화는 무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