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만해도, 다른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며,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얘기하면, 언제나 루인만 쓸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고 느꼈다. INFP의 잔다르크 형 인간인 루인에게 현재는 회피의 대상이고 미래는 과대망상으로 가득해서, 미래에 어떻게 할 것인가는 그저 ‘무얼 하고 싶어’의 문제이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는 고민하지 않는 편이었다. (고민한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잖아? 라고 정당화하면서…)
이런 루인이기에 십 년이 지나도 루인은 언제나 여기, 이곳에 있기 마련이었다. 이에 반해 상대방은 어딘가로 떠난다는 얘기를 했다. 그것이 유학이건 뭐건 상관없이 어딘가로 떠날 거라는 얘기. 그것이 아쉬웠다. 평생 친구로 함께 하고 싶은 바람이 있을 때, 이렇게 떠난다는 말은 아쉬움을 넘어 결국 또 다들 떠나는구나 하는 쓸쓸함으로 다가왔다. 루인에게 떠남은 영원한 이별,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의미하기에 이별을 준비해야겠구나, 했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 전에 연락이 끊겼고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루인이었는데, 최근, 문득, 다른 누군가에게 루인이 어딘가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얘길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고 정말 떠날지도 모를 일이지만, 외국으로 몇 년간 떠날지도 모른다는 얘길 하는 루인을 깨달았다. 물론 그런 말들의 끝엔 “하지만 돈도 없고 영어를 못 해서 안 갈 거 같아요.”라고 덧붙이며 웃고 말지만.
어느 새 떠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아쉬워하는 루인이 아니라 떠날지도 모른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사람에 대한 미련이나 정이, 그나마도 적었는데, 사라지고 있는 걸까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 보다는 그저 떠남과 헤어짐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사실 루인은 루인이 마냥 어딘가에 머물 줄 알았다. 어떤 공간의 풍경화가 되는 루인을 얘기한 적도 있듯, 그저 머물면서 여전한 모습으로 지낼 거라고 믿었다. 10년이 지나도 후줄근한 모습 그대로 살고 있으리라는 믿음.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어떤 사람들은 이주일에 한 번, 뭔가 느낌이 변했다고, 뭔가 달라졌다고 루인에게 얘기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정말 오랜 만에 만나며, 여전한 모습이라고 얘기한다. 매 순간 변하지만 오랜 세월 속에선 변하지 않는 모습이란 의미일까. 정말 그렇게 살고 있다는 의미일까.
헤어짐, 이별, 이런 말들을 이젠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걸까? 하긴, 그러고 보면 이제 9년에 접어드는 친구와도 언젠가는 헤어지겠지, 하며 이별을 준비하는 몸으로 만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겐 떠나길 독촉하고(헤어짐 혹은 이별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사람과는 여행 중에 만나는 인연 정도의 의미로 만나고. 그렇게 스치고 지나치고 만나고 이별하고 떠나고 붙잡지 않고…. 그러다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