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저항의 맥락화: Lila Abu-Lughod “The Romance Of Resistance”

관련 글: 저항의 낭만화(한나님의 글)

※카테고리는 그다지 신경쓰지 마세요;;;;;

저자: Lila Abu-Lughod
제목: The Romance of Resistance (여기)
출처: American Ethnologist, Vol. 17, No. 1. (Feb., 1990), pp. 41-55

종종, “아, 나 그거 알아”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어디서 들어본 것, 혹은 언젠가 어느 수업 시간에 배운 것만 같은 것일 경우, 이런 식으로 반응하면서 아는 척 하려는 루인과 만난다. 공부를 하면서 가장 무섭다고 느끼는 건 익숙해지는 것이다. 학년 구분 없는 수업시간에 4학년이 1학년 보다 유리한 점은 4학년이 1학년 보다 더 많이 안다거나 책을 더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답안을 작성하는 방법, 공부를 하는 방법 등이 익숙할 가능성 때문이다. 전공수업일 경우엔 그 전공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들에, 1학년 보다는 4학년이 더 익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무서운 건 이 지점이다.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그저 자주 듣다보니 자주 접하다 보니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맥락인지 모른체 “아, 나 그거 알아”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 그렇게 익숙하기만 할 뿐인데 마치 안다고 믿게 되는 것이 무서운 일이다.

일테면, 젠더라는 단어가 그렇다. 여성학 수업을 몇 번 듣고 나면 혹은 여성학과 관련한 책을 몇 권 읽고 나면 젠더라는 단어는 너무도 익숙해서 그저 일상어처럼 사용하기 쉽다. 루인 역시 너무도 자주 그러하고. 하지만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의 어떤 맥락을 알고 있다는 걸까?
젠더라는 단어는 너무도 자주 사용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는 언어이다.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던 이유엔 “젠더”라는 단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트랜스/젠더가 루인의 전공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여전히 젠더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여성학기초 과목을 들으면 젠더를 아주 간단하게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으로서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지만, 당시 기말 답안지엔 이 문장을 A4 한 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적기도 했지만, 지금에 와선 이토록 단순한 설명에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요즘의 고민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위에 링크한 한나님의 글을 읽으며,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이었다. 행위성을 안다고 착각했지만, 그동안 무얼 안다고 믿었던 걸까.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싶었고, 얼추 일주일 전 즈음에 이 논문을 읽었다. 그러며 남은 화두는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라는 말.

뒤통수를 맞은 것만 같은 느낌은, 이 말에서 비롯한다. 그동안 행위성 혹은 저항을 한 개인이 그 사람의 맥락에서 어떻게 협상하는가를 읽으면서, 그것이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전복”이란 의미가 아님은 분명히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권력의 작동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고민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저항 혹은 행위성을 통해 권력의 징후를 읽어 내지 않았다면/않고 있다면, 도대체 무얼 안다고 믿는 걸까,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한다는 말 혹은 어떤 앎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렇게 작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위치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의 이론적 위치를 모르는 상태에서 작업하는 건 언제든 자신을 투명한 위치로 간주할 위험성이 있고, 자신이 무슨 문제를 범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저항은 권력을 징후한다는 말은 무겁게 다가왔다. 어떤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은 이것에서 비롯한다. 처음으로 치마를 입고 밖으로 나갔을 때, 들었던 그 복잡한 감정-혹시나 공포범죄를 경험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이런 불안이 싫음과 도대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 라는 질문은 정확하게 이런 감정이 발생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옷이라는 것, 옷을 입는다는 것의 의미와

저자의 또 다른 지적은 저항이란 언제나 맥락적이라는 지점이다. 즉, 모든 저항의 행위가 모든 문화적인 가치를 전복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점에선 저항일 수 있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다른 지점에선 권력을 지지하는 방식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트랜스젠더는 성별이분법을 강화한다는 말과 성별이분법을 초월한다는 말은 모두 같은 의미이다. 하리수가 등장했을 때, 하리수를 향한 비난 중 하나는 하리수는 이성애 성별이분법을 더욱더 강화한다는 점이었다. 이런 식의 비난이 가능했던 이유는, 주민등록번호 1번/3번을 할당 받으면 평생 1번/3번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주민등록번호 2번/4번을 할당 받으면 평생 2번/4번에게 요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고, 이런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인식에서 하리수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했다. 성별 혹은 젠더가 (어떤 의미에서) 임의적이라는 말은 기존의 성별이분법에 저항하는 것으로 느껴졌지만, 방송을 통해 하리수는 이른바 “여성”이라는 그 어떤 이미지를 “여성보다 더 여성답게” 재현했고 그래서 기존의 성별이분법을 더 강화한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하리수의 행동은 동시에 이른바 “여성성”(혹은 “남성성”)이라는 젠더가 몸에 부착해 있는 본질적인 속성이 아님을 얘기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처럼 저항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Abu-Lughod는 이걸 훨씬 멋지게 설명하고 있다. ㅠ_ㅠ)

그러니 저항 혹은 행위성은 맥락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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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Butler가 현상학을 비판하는 지점 역시 이 지점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버틀러의 글 혹은 이론은 현상학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버틀러는 종종 현상학을 비판하는데, 현상학은 담론이 작동하는 측면을 놓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이 말이 현상학으론 담론의 작동을 얘기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버틀러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은 Abu-Lughod가 저항을 낭만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말고 권력을 징후하는 것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제안과 상당히 일치한다.

[영화] 좋지아니한가家: 순박 혹은 “순정”이라고 불리는 폭력

[좋지아니한가家] 2007.03.08. 19:40, 아트레온 7관 9층 I-5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중 읽고 싶은 영화는 세 편. [훌라걸스], [행복을 찾아서] 그리고 지금 이 영화, [좋지아니한가家]. 이 영화감독의 전작인 [마라톤]은 아직 안 읽었다. 그래서 어떤 감독인지 모르는 상태이며, 이런 의미에서 루인에겐 신인감독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감독이지만, 개봉하기 전부터 몇몇 영화 관련 매체에서 많이도 띄운 영화기도 했다. 물론 관련 기사를 읽지는 않았지만, 관련 기사가 많이도 나온 건 알 수 있었다. 이 영화에 흥미가 생긴 건, 김혜수가 나온다는 거(물론 김혜수의 열혈 팬은 아니다, 그저 90년대 후반 라디오에 게스트로 나왔을 때 처음 알았는데;; 그때의 인상이 상당히 좋아서 아직까지 김혜수 하면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제목이 재밌다는 거 정도랄까? “좋지 아니 한가”와 “좋지 아니 한 家”를 동시에 의미 하고 있어서 재밌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포일러는 기본
이 영화를 읽던 와중에, 불현듯 모든 판단을 중지해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코미디 정도의 장르일 이 영화는 불현듯 아주 불쾌한 영화로 바뀌었는데, 그건 아들 역할을 하는 용태(유아인 분)가 하은(정유미 분)에게 하는 말에서 비롯한다. 영화 초반에 용태는 하은의 집 앞에 가선, 하은이 원조교제(혹은 ‘청소녀’ ‘성판매’)를 하는 걸 알고, “창녀 같은 X야”라고 외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불쾌함은 그 다음에 찾아가선 뜬금없이 “모든 걸 다 용서 할께”라는 말로 바뀌고 그러고선 매일 찾아가선 용서한다고 말한다.

누가 누굴 용서하고, 누가 누굴 용서할 권리/권력이 있으며, 하은은 무슨 잘못을 한거지?

이 불쾌함 때문에, 용태의 이런 태도는 후반에 뒤집힐 줄 알았다. 아니 그런 걸 기대했다. 즉 마치 용태 자신에게 하은을 용서할 권리/권력이라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과도한 기대였고, 감독은 이런 용태의 태도를 끝까지 끌고 가고 이것을 사랑에 따른 “순정” 혹은 “순수함”으로 포장한다. 쳇. 불편함은 여기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천진함 혹은 순수함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그렇게 의미화하는 것에 따른 해석이다. 얼마 전, 우연히 동영상을 한 편 보다가 중간에 끈 적이 있다. 그 동영상은 일본 방송 프로그램을 편집한 내용이었다. 우선 한 명의 흑인(지금 이 글에서 흑인이라는 말은 사실상 아프리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미국 등 세계 각지에 사는 사람들을 싸잡아 획일화할 수 있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문제이다, 다만 그 사람의 국적이 안 떠올라서;;;)이 나와서 자신의 나라는 스페인(?) 혹은 유럽의 어느 나라가 사실상 700년 가까이 침략해서 지배했지만 사과 한 마디 안 했다면서 일본이 한국을 35년 간 침략한 건 비교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에 한국인으로 추정하는 사람(그 사람은 정말 “한국인”일까?)이 35년이 아니라 36년이라고 정정하며 ‘차분’하게 식민지 기간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고 침략했다는 그것 자체에 문제제기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그 “흑인”은 ‘언성을 높이며’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읽다가 짜증나서 닫았는데, 그 짜증의 이유는 댓글들에 있었다. “한국인”은 차분하고 조리 있게 말하는데 “흑인”은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말한다는 내용들. (물론 일본식민지 경험과 관련해서 상상 가능한 댓글들 역시 수두룩했고!)

루인이라고 그렇게 느끼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해석할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왜냐면 그 사람이 사는 지역마다 감정이나 언어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이에 따른 반응이 현저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20년을 살고 대학부터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루인은, 루인의 말투로 인해 종종 씨니컬하다, 공격적이다, 라는 얘길 많이 듣는 편이다. 한동안은 루인도 스스로를 그렇게 설명하곤 했고 지금도 종종 이렇게 설명하는 편이지만 이는 단순히 루인 개인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얘기들을 듣는 와중에 깨달은 건, 재밌게도 정작 부산에선 이런 말을 거의 듣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며 문득 떠올랐다. 지역에 따른 말투의 차이를.

부산에서 살다보면 종종 서울지역어를 비꼬는 얘길 자주 듣는다. 현재 몸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추적하면, 대충 “말투가 곱상한 것이 재수 없다”란 반응이 핵심이었다. 여기엔 당연히 양성이라는 성별이분법이 작동하며, “머시마가 재수 없게 말투가 그게 뭐냐”라는 반응들. 이에 반해 서울에 살며 자주 들은 혹은 방송을 통해 듣는, 부산이나 경상도 지역의 말투나 언어에 관한 내용은 공격적이고 쌈질 하는 것 같음이었다. 즉, 부산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 꼭 싸우는 것 같다는 반응들. 물론 루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공격적이거나 씨니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루인의 말투나 루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 지역색을 배제할 수 있을까? 적어도 루인이 아는 한 루인의 말투가 공격적이라고 말한 사람들 중 절대 다수가 비부산, 비경상도 지역 출신이었다. 이것을 일반화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만, 한국이라는 지역에서도 지역에 따라 말투가 다르고, 그래서 어떤 지역에선 일상적인 말투가 다른 지역에선 공격적이고 시비를 거는 것 같은 말투로 여겨진다.

그 “흑인”의 말투가 감정적이거나 공격적이라고 여겨진 건, 댓글을 단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하기 방식에 비추어 발생하는 반응이고, 여기에 한국의 극심한 민족주의, 일본에 가지는 열등감, 그리고 그 사람이 “흑인”이라는 것이 겹치며 발생한 반응임을, 동영상 아래 달린 댓글에서 느꼈기에 더 이상 그 동영상을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용태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어떤 “순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루인에겐 용태의 행동이 상당히 폭력적으로 다가왔는데, 용태에겐 애시 당초 하은의 감정이나 상황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제멋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하은의 상황에 관심 없기로는 감독도 마찬가지인데 감독은 그저 엄마가 아프지만 약값도 없는 가난한 상황의 하은이라는 정도의 설명만 한다.) 용태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순정” 혹은 “순박함”이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행동양식에 자신을 맞춤으로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하은은 “원조교제”를 한다는 이유로 용태의 모든 행동은 더욱더 정당화 된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이 영화는 유쾌할 수가 없었다.

물론 하은의 반응은 언제나 무관심이고 그래서 용태의 행동은 튕겨나갈 뿐이다. 이 영화를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지점에 있는데, 하은의 무반응은 용태의 말을 수긍하는 동시에 무시한다. 즉, “그래서 뭐?” 끊임없이 쫓아다니면서 좋아한다는 용태의 말에 좋아하면서도 용태의 비난과 “용서”를 무시하는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용태의 행동이 얼마나 불편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낳는다. 용태의 아버지 창수(천호진 분)의 동영상을 본 후 하은을 찾아가 신경질을 내고 혼자서 나자빠지는 장면은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는/착각하는 사람의 행동이 사실은 제멋대로의 행동일 뿐임을 말하는 것인 동시에 모든 사람이 이런 도덕적 판단에 동일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님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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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가족이 새롭지 않았는데, 이 영화 속 가족구도가 새롭다면 이는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이라는 환상에 부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족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지, 영화 속의 가족구조 자체가 새로워서는 아니다. 새롭다니? 너무도 익숙한 걸.

이 영화를 읽고 나왔을 때 이 영화를 가장 재밌게 읽으려면 다섯 번은 읽어야겠다고 중얼거렸다. 캐릭터마다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고, 용선(황보라 분)이란 인물은 참 매력적인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시작하며 등장하는 용태와 하은의 관계는 다른 지점을 읽지 못하게 할 정도로 크게 다가왔다. 다시 읽고 싶지는 않지만 다시 읽을까?

“기분 죠아요” : 뮤즈 2007 내한 공연

뮤즈(Muse) 내한공연 live in Seoul 2007
일시: 2007.03.07. 20:00
장소: 잠실실내체육관
좌석: 스탠딩 나구역 입장번호 1358

01
전날 다 못 읽은 버틀러(Judith Butler)의 “Performative Acts and Gender Constitution: An Essay in Phenomenology and Feminist Theory”(Women, Knowledge, and Reality, Ann Garry and Marilyn Pearsall eds. Boston: Unwin Hyman, 1989)를 아침부터 읽었다. 조교업무가 가끔씩 있었지만 다섯 시까지는 다 읽을 수 있었다.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 읽고 싶어서 다 읽어야 했다. 읽으면서 너무너무 좋았다. 재간둥이 버틀러_ 하지만 귀에서 흐르는 음악 때문에 종종 비명을 질렀다. 뮤즈. 너무도 달콤한 매혹의 음악들 때문에 온 몸에 간지러움이 퍼지는 것 같았다. 며칠 전부터 이랬는데, 더 심해지고 있었다. 종종 너무 좋아서, 너무 두근거려서 온 몸을 방방 구르기도 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4시 40분 즈음이 되었을 때, 길지 않은 버틀러의 글을 다 읽을 수 있었다. 이젠 슬슬 출발 준비를 했다. 가방은 미리 챙겨온 작은 것으로 바꾸고, 필요한 몇 가지만 챙겼다. 가능한 부담 없이 가서 신나게 놀고 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방이 크면 방방 뛰기 힘드니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공연하는 날을 축하한다는 듯이. 하얀 눈이 내리고 설렘에 두근거림에 종종 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02
지하철에서 내리자 꽤나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얗게 덮여가는 중… 이전의 기억은 다 잊고 오늘만 기억하라는 의미일까. 하얀 눈을 맞으며 잠실실내체육관으로 향했다. 향하는 길에 뮤즈의 옷과 가방과 뺏지를 두 세트 샀다. 옷은 공연장에 가기 전부터 사려고 작정 했었고, 가방은 너무 예뻐서이기도 하지만, 뮤즈기에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가방이 안 예뻤어도 샀을 테다. 뮤즈니까. 뺏지는 두 세트를 샀다. 한 세트는 보관용, 한 세트는 사용하는 것으로. 가방도 옷도 돈만 많았다면 보관용으로 하나씩 더 샀을 지도 모른다.

스탠딩 입장을 위한 대기실로 갔다. 농구연습장 같은 곳. 번호대로 줄을 섰다. 도착한 시간은 6시 20분 즈음. 인터넷 공지로 입장 시간은 7시.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입장 시간이 연기되었다는 공지를 했다. 공연도 늦어질 거라고 했고. 하지만 상관없었다. 실제 입장 시간은 8시가 거의 다 되어서였다. 하지만 조금의 불평도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까지 모두 공연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동안의 설렘도 공연의 일부이기에 더 좋았다. 충분한 기다림과 몸의 준비 시간.

인터넷 공지를 통해선 스탠딩 석을 구분하는 바리케이트를 없앤다고 했다가 다시 설치한다고 하더니, 결국 다시 없앤다고 했다. 실제 가보니 스탠딩 석을 구분하는 장벽이 없었다. 뮤즈 측에서 강력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사랑해요 공연준비 측에선 사실 상당히 신경 쓰일 일이지만 스탠딩 석에 있는 입장에선 너무 좋은 일이었다. 물론 각자 살아남기 위해 일정 정도의 질서를 유지했고, 종종 앞에 있던 사람이 뒤로 빠지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선 애매한 중간보다 뒤에서 더 잘 보였기 때문이다.

03
20시 30분에 시작한다는 공연은 다시 15분 정도를 더 기다려 시작했다. 아아.. 불이 꺼지고 “Take A Bow”로 공연을 시작했을 때, 그 열광적인 소리들. 뮤즈가 등장하기 전에도 종종 열광적인 소리를 질렀었다. 스탭의 등장을 뮤즈의 등장으로 착각하며.

사실, 스탠딩 입장번호가 한참 후반부이다 보니 무대가 잘 안 보였고, 그래서 무대보다 대형스크린을 통해 공연을 봐야하는 상황이다 보니 공연장에 있다는 실감이 안 나기도 했고, 신경 쓰이기도 했다. 무대를 보고 싶다는 바람이 관람을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연을 진행할수록 무대를 바라보는 요령이 생기며 더 잘 보이기 시작했고, 더 이상 이런 것에 신경 쓰는 몸도 아니었다. 음악 소리에 미친 듯이 반응하는 몸이었다.

“New Born”의 피아노 전주가 시작했을 땐, 정말이지 소리를 지르겠다고 해서가 아니라 몸이 자동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하긴. 앨범으로 들을 때에도 장소 불문하고 “New Born”의 피아노 전주엔 소리를 지르니까. 공연을 진행할수록 다리가 아파오고 팔이 아프고 목이 쉬려 했다. 그래서 조금씩 쉬면서 구경하려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곡이 나올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손가락으로 “I Love You”를 표시하며 양손을 뻗었고 온 몸으로 방방 뛰었다. 아 정말이지 다리에 알이 베길 것만 같았는데도, 아니 알이 베기기 시작했는데도 몸은 뛰고 있었다. 겨울 잠바를 입고 있었기에 더웠고 온 몸이 땀이었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뛰는 와중에 누군가가 물을 뿌렸고 그 물이 얼굴에 날아왔지만, 다른 때 같으면 싫었을 상황이 이땐 좋았다. 그냥 신났다.

이렇게 공연을 진행하는 와중에, 후반부가 될 즈음,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이대로 죽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이었다.

정규 공연이 끝나자 시작했다. 그러며 부른 곡은 “Soldier’s Poem”. 앵콜로 이 곡이 제격이다는 느낌을 받았다. 앨범을 사서 이 곡을 들었을 땐 살짝 뜨악한 느낌이었는데, 앵콜로 부르니 정말 좋았다. 그리고 정말 이 곡이 마지막일 까봐 걱정이었다. 다른 한 편으론 끝이었으면 했는데, 팔이며 다리며 안 아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서 있기도 조금 버거운 상황이었다. 이 곡이 끝나자 “Invincible”을 불렀다. 아아, 너무 멋져ㅠ_ㅠ 앨범에서도 연결되어 있는 곡인데 라이브에서도 같이 부르다니… 흑흑흑. 다음 곡은, 왜 안 불렀을까 싶었던 “Time Is Running Out”이었고 열광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마지막 곡은 “Knights Of Cydonia”. 이날 뮤즈의 공연은 종종 연주/변주곡을 몇 번 했는데(다른 곳에서도 자주 하지만), “Knights Of Cydonia” 역시 변주로 시작했다. 그러며 이 곡의 멜로디가 흘렀을 때 그 감정이란! 이 곡을 들으며 더 감동받았던 건, 대형스크린을 통해 가사를 조금 보여줬는데 “You and I must fight for our rights. You and I must fight to survive.”라는 가사때문. 이렇게 보니 새삼스러웠고, “survive”라는 말이 몸에 콱, 박혔다. 생존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말(물론 이때의 싸움이 반드시 무기 등을 통한 전쟁이나 폭력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 말을 읽으며, 들으며 뭔지 모를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이 가사를 부르고 나면 강렬한 기타 연주를 하는데, 이미 지친 몸이었음에도 이전보다 더 뛰었다. 그냥 몸이 뛰고 있었다. 손을 뻗으며 열광하고 있었다.

04
정말로 공연이 끝났다. 다시 한 번 앵콜을 외쳤지만 스탭들이 장비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떠나기 싫은 몸으로, 아쉬운 몸으로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돌아섰다. 나가는 와중에도 다시 한 번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그러며 중얼거렸다. “오늘 공연을 본 힘으로 일 년을 버틸 거라고. 오늘 공연을 보며 얻은 힘으로 일 년을 살아가겠다”고.

Pat Metheny Group은 매년 정기적으로 찾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팬들도 매년 연례행사처럼 당연히 찾아 간다고 한다. 그러니, 뮤즈, 당신들도 매년 한 번은 꼭 오라고. 그래서 연례행사처럼 만나자고…

어제의 공연은 정말 끝났지만 사실 끝나지 않았다. 아침 학교 혹은 사무실에 오는 길에 뮤즈를 들으며 방방 뛰려는 몸을 느꼈다. 특히 “You and I must fight for our rights. You and I must fight to survive.”라는 가사가 끝난 후의 기타연주 부분에선, 길이지만, 뛰어야 할 것 같았다.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이 힘으로 일 년을 살겠어. 그러니 당신들, 꼭 내년에도 와야 해. 아니, 올해 또 오라고. 일본에 자주 가니까, 가는 길에 들려도 좋아. 꼭 오라고. 또 갈 테니. 몇 번을 와도 몇 번이고 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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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공연 중에 매튜가 한 말. 의례적으로 “감사합니다”와 같은 말이야 다른 여타 외국 밴드들도 하는 말이지만, “기분 죠아요”(발음을 고려한 표기법;;;)라고 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 말은 정확하게 루인의 몸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매튜가 할 수 있는 한국어의 범주가 이 정도라는 점에서 이 말이 가장 정확하게 당시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라면, 그것은 정확하게 루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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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녹음을 했는데, 녹음 상태가 엉망이라 열광의 환호성만 들리고 음악은 거의 안 들리네요. 흑흑흑. 하지만 종종 들을 것 같아요. 그리울 때마다 환호성만 들리는 파일을 들으며 좋아하겠지요. 아울러 조만간에 다방에 공연리스트에 따라 선곡해서 올리겠어요. 으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