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루인은 롱스커트를 입었고 다른 ftm 트랜스남성은 여고 다닐 때의 교복을 입었는데요, 그러면서 서울여성플라자 건물을 돌아다녔더래요. 후후. 아무튼 엘리베이터를 탈 일이 있어서 사람들이랑 같이 기다리는데 그 건물에 볼일이 있던 한 사람이, 루인과 동행들을 보더니 아주 불쾌한 표정으로 걸어서 올라가더라는 재밌는 일화가 있었지요. 흐흐흐. 그냥 걸어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지 재밌었어요. 헤헤.
트랜스/젠더: 메일을 통한
한 선생님과 메일을 주고 받으며 루인이 쓴 답메일의 일부예요. 그냥 이곳에도 남겨두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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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을 읽으면서 지금 적을 수 있는 내용도 있지만 어떤 질문은 지금 할 수 없는, 어쩌면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할 수 있는 대답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어제 밤 메일을 읽고 계속해서 고민을 하며 떠오른 상념들 속에서 깨달은 것 중 하나입니다.
요즘 루인의 고민 중 하나는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cisgender)라는 구분이 가능한가 혹은 그 경계는 어디인가, 예요. 선생님께 보낸 글 혹은 이번에 텍스트논평으로 쓴 글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다음에 쓴 글에선 시스젠더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전략으로 사용했는데 지금에 와선 그런 사용이 불편하게 다가 왔거든요. 마지못해 비트랜스젠더 혹은 “바이오 여성”/”바이오 남성”이란 ‘관용어구’를 차용하기도 했지만 어느 쪽도 다 문제라고 느끼고요.
예전에 아는 사람과 관련 얘기를 하며 시스젠더를 설명하자, 자기는 시스젠더도 트랜스젠더도 아니라고 얘기를 했었는데, 그때 들은 말이 서서히 몸에 퍼져나가고 있다는 의미일까요. 이건 루인이 모색하는 트랜스/젠더 정치학과 연동하는 문제이기도 해요. 트랜스젠더를 특수화하는 작동들, 트랜스젠더만을 외과적으로 구성한 몸으로 얘기하는 언설들을 비판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한 선생님이 루인에게 물었던 질문 중에, 그럼 “여성으로 대해주길 바라는 건 가요?”라는 질문을 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대답하기가 정말 어려웠는데, 루인은 사람들이 루인을 “남성”으로 대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만큼이나 “여성”으로 대해주길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제 3의 성이 아니라 트랜스 혹은 트랜스젠더로 관계 맺길 바라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루인에게 “여자야 남자야?”라고 물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고, 트랜스공동체 혹은 모임 내부에서도 mtf인지 ftm인지 헷갈려하는 걸 재밌어 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이 지점에서 “루인이 욕망하는 트랜스의 의미”를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느끼고 있어요. 자명한 것 같으면서도 낯설고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이거든요. 이건 “남성 아니면 여성”이라는 오직 둘 뿐인 젠더해석으로 루인의 욕망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트랜스/젠더를 특화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건 아닌가하는 의심때문이기도 해요. 혹은 의도하건 아니건 상관없이 ‘투명한 주체’로 설명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요.
루인이 이 글을 통해 혹은 수업시간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남성임” 혹은 “여성임”이란 것이(있다고 전제한다면) 그렇게 ‘단조로운’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 오직 둘 뿐인 젠더란 믿음이 자명하지도 않거니와 그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에요. ‘단조로운’ 의미가 아니란 건, 일테면, 하리수가 표현하는 “이성애 욕망”이란 걸 단순하게 “이성애를 강화하는 행동”으로 비난할 수 없고, 트랜스여성이 자신의 여성젠더정체성을 주장하는 건 “이성애를 강화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해석할 수 없음을 얘기하는 것이죠. 그런 비난은 맥락을 무시하는 발화들이고요. 이런 맥락에서 두 번째 질문인 “여성으로 간주되는 자가 여성으로 보여지는 여성을 욕망하는 것”과 “남성으로 보여지지만 여성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여성으로 보여지는 자를 욕망하는 것”의 “차이”는 미묘하게 다른 맥락이 있다고 느껴요. 그건 두 가지 뿐이라는 젠더 해석에서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의심받는 혹은 요구하고 주장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지점에서죠. 동시에 이것이 작동하는 맥락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느끼고요. (또한 그렇게 “보여진다”는 의미 혹은 그 구조도 질문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고요.)_M#]
트랜스젠더는 소수자가 아니다
“우리는 소수자가 아닙니다.”
이건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를 발족하며, 발족선언문에 쓴 첫 문장이다. 우리는 소수자가 아니다…라는 말.
흔히,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들, 퀴어들, ‘장애’인들 등을 소수자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혹은 약자라고 부르는 경향도 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관련 글을 한 번 쓴 적이 있네. 여기) 하지만 루인은 그렇게 선언하지 않기로 했다.
소수자라는 말은 의도하건 아니건 상관없이 수적으로 적음을 환기한다. 정치적인 권력관계에서의 소수임을 의미하지만 이 단어는 항상 수적으로 적음을 환기하고, 그래서 동성애자는 10%, 장애인은 10%라는 식의 통계를 들먹인다. 하지만 그 통계는 정확한가. 그 기준이라는 것, 적음을 환기하며 들먹이는 통계의 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닌가.
소수자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맥락적인 언어임에도 어느 순간부터 하나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는 경향이 있다. 트랜스젠더가 소수자라고 말할 때는 그것이 다른 모든 맥락과의 관계 중 젠더 정체성이라는 측면만이 부각될 때, 바로 그때만 소수자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소수자라는 말을 하나의 고정적인 정체성으로 간주하면서 트랜스젠더의 모든 조건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소수자 정체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트랜스남성이 트랜스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여성”에게 언어성폭력을 행사할 때도 트랜스남성은 ‘소수자’인가. 한국처럼 인종차별주의가 극심한 사회에서 트랜스여성은 동남아지역에서 이주한 남성보다 ‘소수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보다 더 강하게 작동할 수도 있다. 이런 맥락을 고민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소수자라는 언어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사용한다는 건, 트랜스 개개인들의 여러 정체성들을 오로지 트랜스젠더임 그 하나로 환원하는 방식이다.
소수자라는 말, 특히 트랜스젠더가 소수자이기 위해선 오직 둘 뿐이라는 젠더를 고정적이고 주어진 것으로 간주할 때만 성립할 수 있는 언어이다. 태어날 때 할당한 성별-“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것만이 유일하고 그렇게 할당한 성에 적합한 모습으로 자라야 한다는 것을 당연시할 때, 그 환상/허구를 가정할 때만 ‘소수자’라는 말이 성립가능하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정치학은 이런 가정 자체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젠더를 둘로만 해석하는 바로 그것이 문제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트랜스젠더를 소수자라고 명명하긴 힘들다.
물론 우리는 소수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수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