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당신에게 닿고 싶던 바람의 실 하나가 끊어졌을 뿐, 폐쇄가 상실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가시야: 증발
당신이 사라졌다. 며칠 전 발견하고 이제야 쓴다. 당신의 증발. 폐쇄. 다시 찾을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있다. 담담하다. 슬프지 않다.
그저 당신에게 닿고 싶던 바람의 실 하나가 끊어졌을 뿐, 폐쇄가 상실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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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 종이매체 발간을 위해 글 추천에 들어갔다. 아직 모두가 다 한 건 아니지만, 그런 추천 속에 루인의 글이 몇 편 있다. 재밌는 건, 지난 번에도 느낀 거지만, 루인이 쓴 글 중, 루인이 좋아하는 글과 다른 사람들이 읽을만 하다고 추천한 글에서 차이가 생긴다는 것. 루인은 그럭저럭이라고 여긴 글이 다수의 추천을 받는가 하면 애착이 많이 가는 글은 종종 루인만 추천하는 식이다.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매체를 인쇄할 땐, 결국 다수의 추천에 따르겠지만 글에 대한 접근이 어떻게 다르기에 이렇게 다른 추천이 나오는지는 항상 궁금하다. (이 접점에서 대화와 관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모든 글쓰기/말하기는 협상하는 글쓰기/말하기이기에 커밍아웃을 했다고 해서 이곳에 이반queer/트랜스 정체성과 관련 생활들에 관한 아무 얘기나 다 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 공개했을 때,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가 관건이며 어떻게 얘기해야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가 핵심이다. 그 전에 이곳에 쓸 것인가 말 것인가로 더 갈등하지만. 물론 이런 협상을 무시하고 쓰는 글도 종종 있지만, 혼자 즐기고 말 것이 아니기에 겪는 과정이다.
이 협상력이 자원이라고 몸앓는다. “약자”, “소수자”로서의 지표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음의 지표이다. 이 과정이 언어를 획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