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 ‘남성’에 대한 판타지:[브로크백 마운틴]이 좋았던 이유

몇 해 전, 도서관에서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을 빌렸다. 그냥 일본 소설 쪽을 기웃거리다 묘하게 끌려서. 나중에야, 에쿠니 가오리 소설이 도서관에 남아 있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란 걸 알았다. 거의 항상 예약해야 하거나 예약도 끝나서 한정 없는 시간을 기다려야 하거나. 그렇게 접한 에쿠니 가오리는 결국 도서관에 있는 책에 한해선 다 읽고 말았다. 좋았다.

그때 읽은 에쿠니 가오리의 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하느님의 보트]와 [반짝반짝 빛나는], 이렇게 두 권이다. [하느님의 보트]는 그 광기가 좋았고 [반짝반짝 빛나는]은 주인공 ‘여자’가 딱 루인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울증에 뜨거운 물이 가득한 욕조에 몇 시간이고 들어가 있는 걸 좋아하는. 자취를 하며 가장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가 욕조가 없다는 것.

그 시절 에쿠니 가오리를 읽은 후, 더 이상 에쿠니 가오리를 읽지 않았고 더 찾지도 않았으며, 헌책방에서 발견하더라도 대체로 시큰둥한 정도였다. [하느님의 보트]와 [반짝반짝 빛나는]이 나오면 사야지 했지만 아직 헌책방에서 발견한 적이 없다. 그러니 여전히 루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이 두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짝반짝 빛나는]이 아프게 즐길 수 있기만 한 책이냐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너무 불편해서 화를 내고 싶은 책이다. 이성애 ‘여성’이 게이 ‘남성’에게 가지는 판타지를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같이 여행하기 “안전”하고 대화가 잘 통하고 패션 감각이 뛰어나고 세련되고, 등등 이성애’남성’에게 바라지만 실현할 수 없는 지점들을 게이 ‘남성’들에게 투사하고 있는 이 소설의 내용은 사실 소설에서만의 것이 아니라 루인이 가끔 혹은 우연히 들리곤 하는 블로그에서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본 적은 없지만 한국의 한 드라마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왔다고 들었다.)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란 말을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어왔다. 이성간의 관계는 곧 성적인 관계란 얘기다. 이성친구와 조금만 친하거나 자주 같이 다녀도 “둘이 사귄데”란 소문이 돌고 그로인해 멀어진 사람도 몇 있다. 잘 통하는 친구일 뿐인데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만남 자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말과 이런 반응은 모든 사람은 이성애자란 전제를 깔고 있다. 물론 요즘은 동성끼리 손잡고 다니면 “이반이냐?”란 말을 듣기도 하지만, 여전히 이성애를 정상화하고 비’이성애’자를 별나라의 외계인 취급한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게이 ‘남성’에 대한 판타지가 이성애 ‘여성’에게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른바 사회에서 “남성다움”이라는 역할-무뚝뚝한 것이 “남자답다”로 여겨지고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등의 행동들에서 게이 ‘남성’은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판타지. 결국 이성애 제도에선 무성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이코드”, “동성애코드” 따위의 말이 모두 이를 드러내는 언어들이다(“이성애코드”란 말은 없다).

정말 이런 사람이 있다, 없다, 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판타지가 폭력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반/비’이성애’자/트랜스들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고 이들의 담론이 자신의 세계관을 흔드는 것은 거부하지만 판타지를 재현할 수 있는 “스크린”이 된다면 환영이라는 것. 에쿠니 가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은 이런 이성애 ‘여성’이 게이 ‘남성’에게 바라는 판타지를 완벽하게 그리는 “동화”일 뿐이라 읽고 나면 좋은 만큼 짜증도 함께 밀려온다.

어제 [브로크백 마운틴]과 놀고 난 후기를 쓰며, 에니스의 가부장적인 모습을 언급했던 이유도, 에니스에게 일이 생기자 알마가 바쁘게 일을 하고 있음에도 짜증을 내며 아이들을 맡기고 가버리는 장면이 몸에 깊이 남은 이유도 그래서다. 불필요한 판타지를 덧입히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자신을 게이라고 정체화하고 커밍아웃을 하거나 운동을 하지도 않고 그저 죽은 잭을 기억하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좋았다. 이반queer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반들이 권리투쟁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러지 않아서 실망했다는 얘길 들은 기억이 몸에 있는데 이반이면 모두가 운동을 해야 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운동하지 않음을 비판하고 운동을 요구하는 반응은, 노골적인 이반혐오와 별로 다르지 않은 혐오다.

그냥 잘 만든 로맨스물이라고 부르고 싶다. ‘동성애’가 나온다고 “비주류” 영화라는 식의 표현은 심각한 착각이며 과도하게 “퀴어/동성애” 운운하는 건 오버일 뿐이다.

몸살/영화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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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글에도 적었듯이 몸살로 앓고 있다. 심한 건 아니고 애매한 상태. 봄바람이 따뜻했건만, 상의를 세 겹이나 입었다. 영하 20도에 가까운 기온에도 잠바 합쳐서 상의는 두 겹만 입는 루인이지만(대충 아무렇게 입는 루인으로선 가을 옷에 겨울 잠바를 걸치면 그게 겨울 복장. 큭큭.), 으스스한 것이 괜히 얇게 입었다가 영화와 노는데 방해가 될까봐. 그래도 으스스해서 춥다고 느꼈다. 지금은 겨울 파카를 입고 있다-_-;; 그냥 머리가 아프고 코가 먹먹하니 낼 약 사먹으면 되겠지, 싶다.

참, 혼자 살면서 아프면 서럽다고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_-;; 이성애혈연가족과 살 때도 아프다고 해서 딱히 누군가가 챙겨주거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프면 직접 약국에 가서 약 사먹었기에, 혼자 산다고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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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F를 사용하는데, 마일리지가 이제 영화 한 편만 보면 끝이다. 끄아아, 벌써 다 써가다니ㅠ_ㅠ 졸업식 날 빕스에 간 덕분이다. 딱 2,000점이 남은 건 아니지만 잔여 포인트를 사용할 곳도 마땅찮다. 작년까진 계속해서 남았는데 올해는 벌써 끝나다니. 마지막 포인트는 화요일에 [브로크백 마운틴] 조조에 사용할 계획. 이로써 2,500원으로 영화를 즐기는 건 당분간 안녕, 이다. 흑흑.

[메종 드 히미코]를 볼까 말까로 망설이고 있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그다지 좋게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만든 영화지만 불편 지점도 있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동성애”와 관련 있단 얘길 듣고도 지금까지 망설이고 안 보고 있다. 참, [타임 투 리브]도 아직 극장에서 안 놀았구나. 개봉도 하기 전에 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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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캣 블로그에서 [브로크백 마운틴] 폐인을 자처하는 모습을 보며 왜 그런가, 했는데 알 것 같다.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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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에 [음란서생] 홍보전단을 못 챙겨서 몰랐는데, 오늘 홍보전단에서 감독의 작가 필모그래피를 읽다가, 아하!, 했다. [로드무비]를 썼구나. 그랬구나,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아직 못 즐겼다. DVD타이틀을 살까? 하지만 돈이… 흑. 만약 산다면 [청연]과 함께 살지도 모르겠다. 물론 언제 살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헤헤-_-;;

브로크백 마운틴: 이반/퀴어와 그 가족들 그리고 혐오증

2006.03.05. 아침 9시 조조. 2,500원.

01. 어제 밤, 갑자기 속이 매스껍고 어지러웠다. 뭔가 잘못 먹은 것이 있나 했지만 딱히 짐작 가는 것이 없었다. 속을 달래야지 하고, 매실차를 마셨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몸살기운이란 걸. 이런, 이런. 지난겨울, 아니 최근 몇 년 동안 (알러지성 비염을 제외하면) 감기라곤 걸린 적이 없고 4년 전에 걸린 몸살이 가장 최근에 걸린 몸살이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낮에 열어둔 창문 너머로 부는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었다. 그 때문인가.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안 좋은 예감. 조조로 [브로크백 마운틴]과 놀 예정인데.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치 일주일 앓고 몸을 추스른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이불 속에서 뒹굴 루인이 아니다. 괜히 일정을 세우면 그대로 하는 “새마을 형 인간”이라고 루인 소개글에 적었겠느냐고.

02. [나의 남편 베티My Husband Betty]란 제목의 책이 있다. [내 남편은 나의 옷을 입는다My Husband Wears My Clothes]란 제목의 책도 있다. 둘 다 미국에서 출판한 영어 책이다. 당연히(!) 루인도 아직 안/못 읽었다. 도서관에 주문한 상태. 제목만 읽어도 대충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내 남편은 게이다My Husband Is Gay]란 책도 있다.)

읽지도 않았고 번역도 안 된, 아니 결코 번역이 안 될 것만 같은 책 제목을 나열하는 이유가 뭘까.

맞벌이 부부로 아내가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가면, 퇴근해서 집에 혼자 있으면서 아내의 옷을 입는 남편들이 있다. 미국의 사례지만 한국에도 있다고 짐작한다. 몇 달 전부터, 이와 관련한 글을 쓰고 싶었다. 언젠가 이와 관련한 논문을 쓸지 책을 쓸지는 알 수 없지만 관련 글을 쓰리란 걸 안다. 그 남편의 생활을 접하며 아팠다.

이 글을 이렇게 시작하는 이유를, [브로크백 마운틴]을 이미 즐긴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직 안 봤지만 곧 볼 예정이라도 이 글을 읽었다고 해서 별 방해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스포일러가 없을 것 같으니까. (추가: 조금 있음.)

일전에 카페 “빵”에서 [2006 퀴어 오디세이]를 해서 갔다가 옴니버스 영화 [동백꽃 프로젝트]의 한 편인 [동백 아가씨]를 봤다. 자살한 남편의 옛 애인을 찾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 애인은 ‘남성’이었고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이 게이인 걸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브로크백 마운틴] 역시 이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이성애-젠더 사회에서 살면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나이 40 즈음 되어서야 자신이 레즈비언인 걸 깨닫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시기는 누구나 다르다. 이성애혈연가족주의가 완강한 사회에선 누구나 이성애결혼을 해야 하고 그렇기에 자신의 성정체성은 무시당한다. 비’이성애’자/이반queer/트랜스지만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기에 이성애혈연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이성애결혼을 하는 사례가 많다. 그 결과는 다양하다. 아내가 출장을 가면 아내의 옷을 입는 사람도 있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이반으로서의 생활도 계속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무수한 가능성들이 있다. 문제는 결혼한 상대방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반응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에니스의 아내 알마(미셸 윌리엄스 분)가 에니스와 잭의 관계를 목격한 후의 반응을 보며, 미셸 윌리엄스(알마)의 연기력에 소름끼쳤다. 홍보지에서 이 영화에 보낸 많은 수상이나 찬사가 “남우주연/조연상”에 집중해 있지만, 미셸 윌리엄스의 연기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이 장면으로 인해 이 영화는 더욱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만약 이 영화가 에니스와 잭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주변 사람들의 고통과 갈등을 그리지 않았다면 실망했을 것 같다. 게이지만 가사 노동은 “당연히” ‘여성’의 몫으로 여기는 에니스의 행동들은 에니스의 성격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들이다. 자신을 게이로 받아들이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덴 이런 요소들이 동시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혼 이후, 만난 여성(이름이…;;;)이 “사랑은 재미로 하는 게 아니”다란 얘길 하지 않았다면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영화 초반, 둘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고 나서 하는 “난 게이가 아냐”, “나도 아냐”라는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이 말이 나올 것을 기대했다는 듯이. 이 말을 들으며(엄밀하게는 자막을 읽으며-_-;;) 일주일에 두세 번 동성과의 성관계를 가지지만 자신을 이성애자로 부르고 이반으로 불리는 걸 극도로 꺼리는 어떤 사람의 얘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에니스와 잭이 나중엔 게이일까? 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성정체성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60살에 트랜스 정체성을 깨닫고 성전환 수술을 받는 사람도 있다. 이성애자로 정체화 하면서도 동성과 연애를 하거나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도 있고 동성애자로 정체화하면서도 이성과만 연애를 하고 성관계를 맺는 사람도 있다(양성애자로 정체화 하는 것도 아니다). 에니스와 잭이 자신들의 성정체성을 어떤 식으로 명명할런 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에니스는 이반혐오증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잭은 이반혐오증으로 살해된다. (잭이 죽었다는 말을 처음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에니스와 도망치겠지, 하는 기대로. 그랬기에 혐오증살해로 죽는 장면에서 더 많이 울었다. 더 많이 무서웠다.)

에니스의 딸이 결혼한다는 말에, ‘남자’친구가 정말로 사랑하느냐고 되묻는 말에 아픔이 전해왔다. 에니스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불안했던 것이다. 그건 자신의 “거짓” 결혼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이성애를 강제하는 사회에서 비’이성애’자로 살아가는 것의 고통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아마, 또 볼 것 같다. 꽤 전에 받아두고도 안 보고 극장에서 보길 잘했다고 몸앓는다. 어쩌면 몇 번 더 극장에서 볼지도 모른다.

※엔딩으로 두 곡이 흐른다. 가사가 어쩌면 이리도 내용과 잘 맞을까.
Willie Nelson – He Was A Friend Of Mine
Rufus Wainwright – The Maker Makes.
불이 밝게 켜진 영화관을 나서며 사운드트랙을 사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살지 안 살지는 좀더 고민하겠지만, 그 동안은 이렇게 녹음한 걸로 위로받아야지. (가사는 직접 찾으세용, 쉽게 나와요.)